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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15규빗의 차이 (창 7: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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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규빗의 차이 (창 7:13-24)

우리가 사는 덴버는 건조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비가 자주 오지는 않습니다. 봄 오후에 소나기가 조금 오는 정도지요. 그러나 우리가 살던 한국에는 비가 많이 왔습니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보슬비, 주룩주룩 내리는 장대비, 때로는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것과 같은 비도 내립니다. 그래서 장마 때나, 태풍이 불 때는 여기저기에서 물난리가 납니다. 보통 시간당 100-200mm 정도 비가 오면 홍수가 집니다. 

세계에서 비가 제일 많이 오는 지역은 하와이에 있다고 합니다. 와이알레알레 산은 1500m가 넘는 산인데 1년에 350일 정도 비가 온다고 합니다. 최고기록은 1982년에 17340mm라고 하는데, 1년에 17m가 넘는 비가 왔으니 많은 비가 온 것이지요. 

보통 우리나라에 오는 비보다 한 10배정도 온 것으로 보면 옳겠습니다. 비는 어떻게 오는 것인가요? 지상에 있는 물이 증발하면 수증기가 되지요. 그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 모입니다. 그리고 구름이 됩니다. 구름이 점점 무거워지고, 결국 비가 되어 땅에 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땅에 물이 없다면 구름이 생기지 않고, 구름이 생기지 않으면 비가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수증기가 올라가 구름을 만들고,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물을 이루고, 물이 다시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오늘의 본문은 노아의 홍수입니다. 노아는 아담과 하와의 10대손입니다. 당시 온 세상에 죄가 가득 찹니다. 창세기 6장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세상에 죄가 관영했다 라고 말씀할 정도로 세상에는 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당시 의로웠던 노아를 택하시고,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방주의 크기는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입니다. 일규빗은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로 약 45cm 정도됩니다. 그러므로 방주의 크기는 길이 135m, 넓이 22.5m, 높이가 13.5m나 되는 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8식구와 각종 짐승의 한쌍씩을 방주에 태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모든 것이 다 완료된 후에 노아의 식구와 모든 동물의 한쌍씩은 방주로 들어 갑니다. 그리고 방주의 문이 닫칩니다. 7일 지난 후에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본문 12절에 의하면 40주야 동안 비가 땅에 쏟아 졌다 말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40일간 비가 온다고 온 세상에 물바다가 되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짐승이 다 죽을까요? 우리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것은 전설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는 절대로 전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진정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비가 올 수 있단 말이나요?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세상에서 제일 비가 많이 오는 지방에도 1년에 오는 비의 양이 약 17m 정도됩니다. 그러나 노아의 시대에 내렸던 비는 40일간에 수천m가 내렸습니다. 가능한 일인가요? 그 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비가 아닙니다. 수증기가 변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이 모여 비가 되는 것이 아니었단 말이지요. 

창세기 1장 6,7절을 읽지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궁창은 하늘을 뜻합니다. 하늘 아래에 물이 있고, 하늘 위에 물이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늘 밑에 있는 물은 모여서 바다가 됩니다. 하늘 위에 물은 대기권 밖에서 지구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 물 때문에 지구는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우주로부터 오는 나쁜 광선을 막아주고, 모든 동식물이 잘 살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늘 위에서 지구를 감싸고 있던 그 물이 땅위에 쏟아진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노아 육백세 되던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궁창 위에 있던 모든 물들이 땅위로 쏟아진 것이고, 땅 아래에 있던 깊은 샘들도 터진 것이지요. 그랫기에 세상을 덮고 남음이 있는 많은 비가 세상에 내린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전에는 사람들이 900세 정도 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 므두셀라라는 사람은 969살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홍수 이후 사람들의 수명이 500년, 400년, 300년으로 줄어들더니 결국 100세가 조금 넘는 수준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학자들에 의하면 궁창 위에 있던 물이 사라져서 지구에 나쁜 광선들이 직접 오기 때문에 짧아졌다 라고 합니다. 궁창 위에 있던 물들이 차단해주던 것들이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쳐서 수명이 짧아진 것이지요. 
   
세상에 죄가 관영해지고,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에 내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멸망을 당합니다. 오직 노아와 그 식구 8명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본문 23절은 말씀합니다. 같이 읽지요.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거기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오직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만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방주 바깥은 온통 물바다였고, 그 어떤 사람이나 동물도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얼마 위로 물이 넘쳤을까요? 본문 20절입니다.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힌지라" 제일 높은 산 보다 십오 규빗 더 높이 비가 내린 것이지요. 십오 규빗은 7m가 안되는 높이입니다. 물이 세상에 창일하자 방주가 두둥실 떠오릅니다. 
   
노아는 산 위에서 방주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산에 가까워야 방주를 만들 나무를 얻기 쉬웠을 것이니까요? 산 위에서 방주를 만들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짓입니까? 그러나 때가 되었고, 홍수가 세상에 임하자 방주가 있던 곳도 물에 잠겼고, 방주는 물 위에 떠 오릅니다. 비가 옴에 따라 방주는 점점 높이 떠 오르겠지요. 결국 방주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 보다 십오 규빗만큼 높이 떠올랐습니다. 

십오 규빗은 건물 2,3층 정도의 높이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오 규빗 위에 있는 사람은 살았고, 십오 규빗 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높이의 차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심판과 구원의 큰 차이가 된 것입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나기만 하면 산에 오릅니다. 그 분들에게 도대체 산에 왜 올라가느냐 라고 물으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른다고 합니다. 산에 오릅니다. 걷기도 하고, 때로는 줄을 타고 기어 올라가야 하기도 합니다. 고생고생해서 산 정상에 오릅니다. 잠깐 정상에 있다가 다시 내려 옵니다. 내려올 것을 왜 올라 가나요? 그 분들은 말합니다. 산 정상에 오르면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의 발 아래 펼쳐진 것을 보게 되는데, 바로 그 기분에 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세상이 자신의 발 아래 있다 라는 것, 기분 좋은 일이지요. 자신의 발 밑으로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는 것,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래서 등산가들은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자신의 발아래 있는 세상은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원수를 발아래 둔다 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원수에게서 승리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박국도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박국서 3장 19절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것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등산가가 높은 산에 올라가듯, 높은 곳에서 사는 것은 기쁜 일이라는 것이지요. 덴버에도 로키산 쪽으로 가면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곳에 있는 집들은 값도 비싸다고 합니다. 그만큼 높은 곳에 사는 것은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십오 규빗의 높이는 기분이 좋은 정도가 아닙니다. 죽고살고의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노아는 쉬지 않고 방주를 짓습니다. 사람들이 찾아 옵니다. 그리고는 혀를 찹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놀립니다. 해가 쨍쨍 나는 이 때에 무슨 홍수, 웃기지 말라고 노아의 가족들을 놀렸겠지요. 그러나 노아는 끊임없이 방주를 짓습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성경에는 얼마 동안 노아가 방주를 지었는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6장 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는 말씀에 비추어 노아가 방주를 짓는데 120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든다 라는 것,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 일이겠습니까? 누구나 다 놀렸을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유명한 사람, 노아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누구도 노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방주가 다 지어집니다.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모든 짐승의 한쌍씩들이 방주로 들어 갑니다. 그리고 모두가 먹을 양식도 다 실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방주에 와서 크게 놀렸을 것입니다. 비웃으며 노아에게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일주일이 지난 다음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보통 비와는 다른 비가 옵니다. 사람들은 조금 오다가 말겠지 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비는 계속 세차게 옵니다. 

어느 사람은 당장 방주에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문을 두들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닫힌 방주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어느 사람들은 혹시 노아의 말대로 온 세상에 홍수가 날지도 모른다 라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래서 높은 산으로 피합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높은 산에 피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점점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들은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물이 차 오릅니다. 그리고 높은 산보다 십오 규빗 더 높에 물이 차 오릅니다. 결국 세상에 남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죽게 됩니다. 

당시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사람도, 높은 자리에서 큰 소리 치던 사람도, 많은 재물을 가지고 신나게 살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사람은 온 세상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알아줍니다. 존경하고, 우러러 봅니다. 그 사람은 참으로 살맛이 났겠지요. 

어느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수많은 사람들이 순종합니다. 이리 오라면 이리 오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고, 그의 말은 곧 법입니다. 그의 권력은 세상 구석까지 퍼졌습니다. 어느 사람은 큰 재물을 모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땅이 그의 소유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살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순식간에 다 죽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8, 39절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왔던 대로 세상 속에서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노아가 전한 홍수의 이야기는 웃기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신나게 죄악 속에서 살았습니다. 머지 않아 죽을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예전에 한국에는 쥐가 많았지요. 그래서 쥐잡는 날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쥐약을 놓거나, 쥐틀이나 끈끈이를 놓기도 했습니다. 끈끈이를 놓고, 미끼로 고구마를 달아 놓았습니다. 다음날 보니 커다란 쥐가 한 마리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쥐가 하는 짓이 태연스럽게 미끼로 달린 고구마를 뜯어 먹고 있습니다. 곧 죽을지도 모르고 고구마를 먹고 있는 쥐와 곧 홍수가 올지 모르고, 태연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똑같지요. 그런데 때가 옵니다. 그들 위로 물이 십오 규빗 넘치니 세상의 그 누구도 살아 남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십오 규빗의 차이를 극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열처녀의 비유가 나타납니다. 25장 1절입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유대인의 혼례는 우리와 다릅니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신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 옵니다. 신랑과 신부의 일행이 도착하면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신부의 집이 먼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신랑의 일행이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지겠지요. 처녀 열명이 신랑 일행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들은 신부가 아니고, 들러리입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5처녀는 등을 가지고 있으며 기름을 여분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5처녀는 등만 들고 나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체됩니다. 가지고 간 기름이 떨어집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하지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사러 갑니다. 그 때 신랑의 일행이 도착합니다. 슬기로운 5처녀는 같이 잔치에 참여합니다. 기름을 구하여 온 미련한 5처녀가 도착했지만, 이미 혼인 잔치의 문은 닫혀 버린 후였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은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의 차이는 별 것이 아닙니다. 약간의 기름이 들은 병을 하나 더 들고 있었느냐의 차이뿐입니다. 그러나 누구는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누구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오 규빗의 차이는 별 것이 아닙니다. 7m도 안되는 차이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바로 생명과 죽음의 차이로 변해 버렸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덴버에는 이상하게도 기독교인들의 비율이 더 낮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 높은 산이 있으면 그 곳에는 우상이 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지요. 

우리가 사는 덴버에도 로키산이 있어서 믿는 사람들의 수가 적은 것인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따지고 보면 별로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건강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업도 잘되어서 신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서 건강 때문에 고통받고, 생업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겉 모습을 보아서는 누가 믿는 사람인지, 안믿는 사람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 때가 옵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드러나는 때가 옵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가 기다릴 때에는 차이가 없었지만, 신랑이 도착하자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슬기로운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미련한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혼인 잔치는 바로 천국을 뜻합니다. 

기름을 준비하고 준비하지 않고의 차이는 별 것 아니었지만, 결국 천국에 들어가고 못들어 가고의 차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방주를 준비하고 방주에 들어간 것과 세상에서 신나게 산 것의 차이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여 졌습니다. 홍수가 세상에 왔을 때도 단지 십오 규빗의 차이로만 보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겉보기에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영생의 구원과 영원한 심판으로 차이가 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신나게 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의 어려움도 겪고, 재정적으로 고통도 받고, 세상에서 핍박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분명 우리에게는 때가 옵니다. 구원의 때가 옵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며,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할 말씀입니다. 노아는 당시 온 세상의 조롱거리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뭐라 해도 주저 앉지 않았습니다.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감당했습니다. 그랫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주셨습니다. 세상보다 십오 규빗 높게 들어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물 속에서 죽어 갔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은 생명의 구원을 얻었습니다. 

만약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며, 방주 만드는 것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다가 사람들이 하도 놀리니 중간에 포기했다 라고 생각해 보세요. 방주를 만들고, 방주 안에 들어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도망쳤다 라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일이 생겼겠습니까? 그도 역시 십오 규빗 아래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후회하며 죽어간 것같이, 노아도 후회하며 죽어 갔을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얻은 것은 끝까지 견뎠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는 것이 힘들지요. 특히 이민생활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맙시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감찰하고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 무서운 홍수 속에서 노아를 십오 규빗 높이 들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높게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에게 구원의 때가 되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때가 될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 생명과 죽음, 영생과 영벌, 참으로 큰 차이이지만, 그것은 십오 규빗에서부터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신앙생활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비록 세상에서 보기에는 우리가 가진 신앙이 별것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결과는 엄청나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약속하셨습니다.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겠다 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증표가 바로 무지개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겠다 라는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겠다 라는 약속을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에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세상을 심판하시겠지요. 물이 아니고,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대로입니다. 온 세상에 불로 덮힐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재앙에서 피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노아를 십오 규빗 높게 들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소방수들이 입는 옷이 있지요. 석면으로 만든 옷으로 보통 불에는 견딜 수 있는 옷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어떤 불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옷을 주시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입혀주셔서 어떤 불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다니엘의 세친구를 살리셨던 하나님께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영생의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모든 것이 밝히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답답하고, 안타까울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을 높이 들어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놔두시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노아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도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나 구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매여서 세상의 것만 찾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가지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구원이냐 심판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십오 규빗 아래서 죽은 사람과 십오 규빗 위에서 산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중간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당연히 구원받고 싶지요. 영생을 얻고 싶지요. 그렇다면 믿음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아무렇게 산 사람이 구원의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살펴 보세요. 그리고 결단해야 합니다. 방주의 문이 닫힌 다음 울부짖었던 사람들, 혼인 잔치의 문이 닫힌 다음 열어달라고 소리쳤던 미련한 5처녀, 이 세상을 아무렇게 살다가 심판받을 사람들, 모두가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고 싶습니까? 선택은 바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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