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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나안으로 가는 길 (출 13: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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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모든 성경은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감동시켜 기록케 하신 구원의 책이요 영감(靈感)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역사 한 복판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셨고, 따라서 모든 구원의 책인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진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이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광야를 만나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마침내 조상에게 약속된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오늘 성도들이 이 땅에서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잃지 않고 마침내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천로역정(天路歷程)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땅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큰 민족으로 만드신 후에 엄청난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온 애굽인들의 장자가 죽는 재앙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17절). 

본절 이하는 갓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행군 여정에 관심을 돌려 그들이 홍해 길을 선택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냈다’ 는 의미를 지닌 ‘샬라흐’ 동사는 강세형(Piel)으로 쓰여져서, 이스라엘이 바로의 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홍해와 같은 거대한 장애물이 또다시 그들을 가로막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였습니다. 성경은 강세형을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새롭게 직면하게 된 홍해라는 장애물은 오히려 바로가 ‘완전히 내보낸 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의 어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천로역정의 길에는 더 큰 장애물이 우리를 삼키려 입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모든 경우에 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이 겪은 홍해 사건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장엄하고 역동적인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시각에서 볼 때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출애굽을 완성시킨 한 시대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홍해의 승리가 보여주는 것이 모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보잘 것 없던 노예 민족이 그동안 자신들을 짓누르던 종주국의 허락을 겨우 받아 이루어진 초라한 방면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완패시키고 획득한 진정한 영광의 해방, 영광의 탈출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홍해 사건은 이제 이스라엘이 430년간의 애굽 체류 시대를 과거사로 완전 청산하고 오직 새 시대,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전진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로서 보다 더 큰 의의를 갖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피며 ‘가나안으로 가는 길’ 의 신령한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천로역정’ 의 깊은 의미를 살펴보고, 이 길에 믿음으로 굳게 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이 길은 지나놓고 보아야 아는 길임 (= 훈련의 길)

17절=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가나안으로 가는 믿음의 길은 지나놓고 보아야 알 수 있는 길입니다. 이 길은 지날 당시에는 왜 그리로 가야하는지 알기 어려운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들을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의 광야길로 이끄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째 방법은 애굽의 델타 지역에서 지중해 해변을 따라 북상하여 블레셋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가나안 해안 평야 지대에 이르게 되는 ‘바다 길’ 을 따라 가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본절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 입니다. 당시의 가장 주요한 무역로였던 이 길은 애굽의 국경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고 또한 가나안 초입(初入)에는 호전적인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길은 매우 빠르고 편한 대신에, 추격하는 애굽인들과 가나안 입성을 저지하려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즉각적인 전면전(全面戰)이 불가피하였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바란 광야를 가로질러 네게브 지역을 거쳐 요단 고원 남부 지방으로 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술 길’ 이 있으나 이 역시 전쟁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수에즈만을 통과하여 시내 반도 중앙부를 가로질러 반대편의 아카바만 상부의 에시온 게벨에 도착한 후, 모압 평지를 경유하여 요단 강을 건넘으로써 가나안에 도착하는 소위 ‘왕의 대로(King's Highway)' 를 통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은 엄밀히 말하면 이 세 길 중 어느 길도 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수에즈만의 북단부에서 바다를 건넌 후 계속 수에즈만을 끼고 시내 반도 남단까지 내려가는 완전한 우회로(迂廻路)를 택하였습니다. 

당시 시내 반도 남단은 그 어떤 민족도 정착하고 있지 않은 일종의 세력 공백 지대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일단 애굽의 세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후에 가나안 정복 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내부 진영을 정비할 충분한 시간을 벌도록 하기 위하여 당시의 그 어떤 정규 도로도 아닌 이 남단 우회로를 선택하게 하신 것입니다.

17-18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처럼 깊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홍해 앞에서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모세를 죽일 기세였습니다. 모세 또한 하나님이 왜 홍해 앞으로 인도하셨는지 몰랐지만, 그가 백성들과 달랐던 것은 그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고 외쳤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 이유를 나중에 알았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나님께서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해할 수 있는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 하나님은 보다 깊고 오묘한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광야 길로 들어가서 홍해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고, 하나님은 홍해 사건을 통해 애굽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애굽의 강한 군사들을 몰살시키셨습니다.

광야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시내산 언약을 체결할 수 있었고, 성막을 완성하여 예배 공동체, 즉 하나의 교회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군대로 편성되기 위해서도 광야에서의 생활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지나놓고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연단시키시는 ‘훈련의 길’ 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성도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광야 길, 고난의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욥의 뜻밖의 불행이 그렇고, 요셉의 기막힌 운명이 그렇습니다. 다윗의 오랜 도망자의 삶이 그렇고, 교회사의 수많은 성도들의 역사가 이를 반증합니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 길은 비록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전제되어 있는 ‘훈련의 길’ 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2. 이 길은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는 길임 (= 동행의 길)

21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가나안으로 가는 믿음의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십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곧장 난 길이 아니었고, 이스라엘이 행진한 흔적을 그려보면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순간마다 곳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에서 ‘가시며(홀레크)’ 는 ‘걷다’ 의 뜻인 ‘할라크‘ 의 분사형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며 계속 걷고 있는(walking) 상태를 회화적(繪畵的)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행진할 때마다 그들 ’앞에서(리프네)‘ 인도하셨고, 이스라엘은 험난한 광야 길이지만 하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동행의 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은 낮에는 광야의 강한 햇살을 막아주는 구름 기둥의 모양을 한 것이 밤에는 광채를 발하여 길을 밝혀주는 불 기둥 같은 모양을 지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당신이 이스라엘 앞에 행하고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머무르면 이스라엘도 머물러야 했고, 이것이 떠올라 진행하면 이스라엘도 진행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동행의 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에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있었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디로 이끌든지 따라야 합니다(계 14:4).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말씀과 성령으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요 14:26, 16:13). 우리의 천국 가는 길에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22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친히 그들을 인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셨습니다. 바다가 가로막고 있으면 갈라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적들이 있으면 돌아서 피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물이 떨어져 목마름으로 신음할 때면 반석을 갈라서 샘믈이 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쏟아부어 주시기를 40년간이나 줄기차게 계속하셨습니다. 40년 동안 그들의 신발을 닳지 않게 하셨고, 옷도 해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으로 잠시도 걷기 어려운 곳이라 구름 기둥으로 햇볕을 가려주셨고, 밤이면 추위로 잠들기 어려운 사막 지대라 불기둥을 보내셔서 따뜻하게 보호하면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성도들이 가는 믿음의 길에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매일 기적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매일이 기적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 동행의 표적이 없는 길은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길은 표적과 기사가 넘쳐나는 길입니다. 

광야 길은 무수한 노약자들과 가축 떼를 이끌고 가기에는 너무나 거칠고도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그 길은 안전하고도 평탄한 길이 될 수 있었습니다.주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십시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동행의 길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를 간구해야겠습니다. 


3. 이 길은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길임 (= 축복의 길)

18절=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라고 하신 길, 가나안으로 가는 믿음의 길은 주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축복의 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홍해의 광야 길로 접어들었지만 그들의 종착지는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에서 ‘나올(알루)’ 의 원형(알라) 동사는 ‘올라가다’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단어는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은 이스라엘이 전투 대형으로 질서정연하게 애굽으로부터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축복된 걸음을 옮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라는 길로만 가면 주님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목적지가 복된 곳이면 가는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이스라엘은 400년 이상 살던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때에 꼭 구름 기둥만 따라갔습니다. 열두 지파 두령들이 모여 회의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마음대로 인도한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원하는 길로 간 것도 아닙니다.

평탄한 길로 순조롭게 간 것도 아닙니다. 이미 난 길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구름 기둥이 가는 길로만 따라갔습니다. 알고 보니 그 길은 축복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천로역정 또한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가 도달하게 될 그곳 천국은 모든 좋은 것들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꿈에도 그리던 곳입니다. 

5절=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하나님은 일찍이 광야의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 엄청난 은혜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데려갈 곳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입니다. 이곳은 궁극적으로 천국을 가리키고, 지금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는 리버사이드 처치(강변교회) 입니다. 날마다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교회입니다. 120년 전에 지어진 교회당은 종이 68개나 달려 있는 멋진 건물입니다. 그 교회를 건축할 때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소년이 있었는데, 학교에도 못 가고 9살 때부터 가게에 취직해야 했습니다. 소년은 두 가지 재산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직과 절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듯이 직장에서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했고 돈을 열심히 모았습니다. 후일 교회가 새 건물을 건축할 때 그가 가진 전 재산 4억불(약 4천억원)을 헌금했습니다. 이분의 손자가 미국 최고 부자가 된 록펠러입니다. 

록펠러는 성공의 비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한 분은 우리 할아버지셨고 그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분의 손자인 나였습니다.” 록펠러 가의 사람들은 대를 이어 축복의 길로 달려간 인물들입니다.

인도에서 수십만의 힌두교도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을 아십니까? 그는 1884년 미국 동부 볼티모어시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회심했습니다. 그가 회심하게 된 것은 학점을 따기 위하여 학교 채플에 참석하게 된 것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날 학생들은 채플시간에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앉아 있으면서 비아냥거리고 있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 고 했는데,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낄낄거리면서 스탠리 존스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어이, 예수가 자네를 부르는군. 빨리 나가 보라구. 혹시 장학금을 줄지 알아?” 학생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님은 스탠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그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곧 일어나서 앞으로 나갔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이날 이후 줄곧 가나안으로 가는 축복의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평생 인도에서 사역했습니다. 그가 1930년대부터 펼친 기독교 아쉬람(Ashram) 운동은 인도를 넘어 미국과 유럽으로 퍼져나갔습니다. 

Time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 로 선정했고(1938.12.12), 1961년에 ‘간디 평화상’ 을 수상했고, 두 번씩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습니다. 천국에 들려 간 스탠리는 어렵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복된 길을 걸어갔던 주의 종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나안 길에 동행하게 된 여러분을 충심으로 환영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는 길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십시오. 잠시 후면 그 길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마련하신 연단의 길, 훈련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잠시 잊어버리고 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말씀과 성령으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약속된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천국으로 가고 있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넘실거리는 바다도 막지 못하는 길입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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