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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고후 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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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고후 4:16-18)


90cm의 키, 몸무게 25kg의 숀 스티븐슨(sean stephenson)은 자신을 ‘90cm의 축복’ 이라 부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소개합니다. 비록 작은 체구로 태어났지만 심리치료사이자 스타 강연가로서 전 세계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숀은 뼈가 쉽게 부러지고 골절되는 유전희귀질환인 골형성 부전증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숀의 팔과 다리는 누더기를 기워 만든 솜 인형처럼 이리저리 꺾여 있었습니다. 

또 머리는 출산 과정에서 눌려 찰흙 반죽 덩어리를 구겨 놓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이 아기는 24시간 안에 죽는 편이 낫다’ 는 의사의 절망적 진단에도 불구하고 숀은 32세 청년으로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지만 자신의 쓰임새를 다하고 있습니다. 쉽게 부서지는 몸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을 위해 자신이 반드시 쓰임새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노력했습니다. 

200번 넘게 뼈가 부러지는 극한의 고통 속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는 부모의 가르침은 그에게 희망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장애는 평생 도전과제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숀을 강하게 만들었고 현재 자신의 인생을 어떤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분노하고, 무기력한 우울감에 빠져 있는 이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위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숀의 메시지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저주받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나와 같은 몸을 갖고도 무언가 해내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생각하게 만들어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 때문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행복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고린도 교회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죄악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떠나자 파당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사치와 쾌락과 이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듣지 않았지만 수차례에 걸쳐 눈물로 권면하자 성도들이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감동을 받고 바른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간증하였습니다. “어떤 고난과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라. 나도 고통을 많이 당했지만 끝까지 인내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했노라.” 

낙심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코스’ 인데 ‘가치 없는, 해로운’ 이라는 뜻입니다. 낙심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백해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낙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덜미를 잡혀 살아갑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거듭해서 강조합니다. 과연 낙심하지 아니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속사람이 강해지기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는 20세기 대표적인 복음전도자로 세계인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노쇠한 그도 인생길을 얼마 남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재 92세인데 전립선암과 뇌수종을 앓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날을 회고하며 말씀 묵상과 기도로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일생 가운데 지금이 가장 놀라운 시간이라고 고백하며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다고 합니다. 죽음이 닥쳐와도 육신을 떠나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결코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늙어도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고 느껴집니다. 겉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속사람이 훨씬 더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은 나이가 들수록 육신은 쇠약해지고 추해질지 모르나 영혼은 날마다 새로워지노라 고백합니다. 육신의 나이테는 거친 모습일지 모르나 영혼의 나이테는 곱고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시들어가는 겉 사람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보았습니다. 그의 속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강해졌습니다. 영원을 사모했습니다. 영적 생명이 자랐습니다. 영적 교제가 풍성해졌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소망 중에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겉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속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는 겉 사람 곧 육체적인 문제로 낙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낙엽이 진 앙상한 가지도 살아있는 가지에서 반드시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속사람이 강건한 그리스도인은 겉모습이 낡아도 속사람은 낡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날로 새로워집니다. 부디 겉 사람을 보지 말고 강건한 속사람을 바라보며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환난은 잠시이기에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가 중국 양주에서 선교사역 할 때입니다. 그의 선교에 반대하는 양주의 학자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선교사가 죽어가는 사람의 눈알을 도려내고 어린이들을 잡아먹으며 아이 밴 여자의 배를 갈라 약을 만든다는 악의에 찬 소문이었습니다. 이를 들은 중국인들이 폭도로 변하여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져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국가 간의 문제로 비화하였습니다. 설상가상 테일러가 이끄는 중국내륙선교회가 군함을 앞세우는 선교회로 알려져 후원금마저 줄어들었습니다. 200여명이 넘는 선교사가 소속된 선교회는 재정적 문제에 부딪혀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는 사람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중대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는 줄로 압니다. 이 어려움을 사람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으니 주께서 해결하여 주옵소서.” 얼마 후 죠지 뮬러로부터 2천 파운드 수표와 함께 격려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죠지 뮬러를 통해 어마어마한 금액과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영국에서도 오해가 풀려 허드슨 테일러를 후원하는 모임들이 더 많이 생겼습니다. 다시 교회가 기도하기 시작하고 많은 후원금을 보냄으로 중국선교가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환난을 만난다 할지라도 잠시뿐이라 믿고 낙심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여기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 즉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영원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난은 마귀가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주는 시험이며 마귀의 역사는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성령의 인 치심을 받아 하나님 편에 있다면 마귀는 오래 시험하지 못합니다. 또한 기도를 쉬지 않는 한 절대로 마귀가 넘어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 환난이 다가옵니다. 극복하기 어려운 일도 만납니다. 그때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환난은 잠시뿐이라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인내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 환난은 지나갑니다.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 환난보다 크시고 강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환난 때문에 잃어버린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환난은 잠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난이 되었든지 낙심치 말고 기도하면 반드시 극복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영원을 바라보기에

짐 엘리엇(Philip James Elliot) 선교사는 남미 에콰도르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휘튼대학 기숙사 시절부터 적었던 글과 일기들이 공개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부족한 나무토막 같은 인생에 불을 붙여 주소서. 제가 주를 위해 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소멸시켜 주시옵소서.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죽기를 원합니다.” 엘리엇은 29세에 죽었고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일기장 한 쪽 구석에 이런 글도 적어놓았습니다. “영원히 썩어지지 않을 것에 바치는 나의 희생을 어리석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엘리엇과 같은 사람을 바보라고 말합니다. 광신자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엘리엇은 19살 때 영원을 향한 바라보는 일이 어리석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낙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적 문제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의 세계가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덫에 걸려 현실적 세계가 전부인 줄로 착각할 우려가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궁극적 실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적 문화와 접촉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유혹을 받게 됩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며 높은 산에서 보여 준 것이 무엇입니까? 천하의 아름다운 것들과 부귀 영화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시험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욕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의 영광이요 쉬 사라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영원을 바라보며 낙심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트렌취(Trench George Frederick) 감독의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취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고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삶이 왜 이렇게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작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항상 지키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은 절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사람의 육신은 쇠하여지고 늙어 갑니다. 그러나 결코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겉 사람은 낡아지나 하나님을 향한 속사람이 날로 더 강하여지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당하는 환난이 잠시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이는 현실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이 훨씬 더 소중함을 깨달아 어떤 상황에도 낙심치 아니하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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