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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련 속에서도 성숙할 수 있습니까? (약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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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에서도 성숙할 수 있습니까? (약 1:2-4)

최근 케이블 채널 tvN의 오디숀 프로그램 <코리아 갓 탤런트>에 출연했던 최 성봉이라는 22살 된 젊은이에게 전 세계 네트즌들의 엄청난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국내외 언론 뉴스들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얼마 전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임 재범씨 사건을 능가하는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임 재범씨 현상은 어디까지나 국내용이었다면 이번엔 국제용 글로벌 신드롬을 낳고 있다는 것입니다. 

CNN 유투브를 통해 최씨의 공연을 본 누리꾼은 전 세계에서 1,00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6월 ABC 방송은 그를 한국의 수잔 보일, 폴포츠로 소개한데 이어 CNN은 그를 제2의 수잔 보일로 소개하면서 “수잔 보일을 넘어서 세계 재능쇼의 열풍을 몰고 온 인물”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의 심상치 않은 인기의 배경은 단순한 그의 노래 실력만이 아닌 그가 걸어온 시련의 인생 역정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태어나 세 살때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극심한 구타와 학대로 고아원을 도망쳐 나왔다고 합니다. 다섯 살부터 나이트클럽을 떠돌며 껌을 팔아 연명을 했습니다. 공용 화장실이나 계단에서 잠을 자는 것이 하루살이 생활의 마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힘센 어른들에 의해 어디론가 붙잡혀 갔다가 다시 도망쳐 나와 거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10년간 껌과 박카스를 팔면서 거리가 그의 집이었습니다. 일용직으로 품을 팔아 연명을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한 그는 검정고시를 거쳐 처음으로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그가 대전에 한 고등학교에 들어가 음악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어느 날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가 춤추는 음악이 아닌 진짜 클래식 성악을 하는 사람의 음악에 매료된 그는 클래식 노래를 연습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지난 6월 어딘지 어색한 손짓과 불안한 눈빛, 그리고 더듬는 말투로 이 tvN 탤런트 쇼 무대에 등장해서 인사를 마친 후 누구도 예상 못한 ‘넬라 판타지아’를 환상적인 목소리로 불러 심사 위원이었던 음악감독 박칼린, 배우 송윤아, 그리고 영화감독 장진을 위시해서 전 세계 시청자들을 울려버린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성숙할 수 있습니까? 대답은 ‘예스’입니다. 최 성봉이라는 이 젊은이의 삶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시련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본문 야고보서는 흩어져 시련 속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고 말합니다. 이 짤막한 본문에 ‘온전히’란 단어가 여러번 반복됩니다. 성경 원문에서 ‘온전하다’는 말은 본래 ‘성숙하다’는 뜻입니다. 시련이 바로 성숙의 통로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시련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성숙한 삶을 약속하는 것일까요? 

1.시련은 믿음의 삶을 약속합니다.

본문 3절을 읽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여기 시련의 본질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한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 ‘시련’이란 말은 희랍어 ‘도키미온’/‘도키모스’(dokimion/dokimos)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 이 단어는 도공들이 도자기를 구워 만들 때 먼저 진흙을 잘 빚어 불에 집어넣고 구운 다음 흠이 있는 것들은 깨버리고 잘 구워진 것들을 향해 도키모스! 곧 합격선언을 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었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prove/trial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배경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벧전1:7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양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연단’이 바로 도키모스입니다. 모든 시련은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속에 들어간 도자기중 쓸 만한 것과 쓰지 못할 버릴 것들이 구별되는 것처럼 시련이 오면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시련의 불속에서 참된 믿음은 더 진지한 믿음으로 연단되지만, 거짓 믿음은 정체를 드러내고 파산합니다. 그리므로 진지한 성도들에게 시련의 시간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오거든 더욱 주를 의지하십시오. 전도자 무디가 그의 찬양 동역자 생키에게 부탁하여 지은 찬송 342장(무디의 애창곡)의 가사를 기억하십니까? “어려운 일 당할 때/나의 믿음 적으나/의지하는 내주를 더욱 의지 합니다/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 뿐 일세/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시련은 바로 믿음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시간입니다. 시련중에 이 가사처럼 주를 바라보고 주를 의지하신다면 시련의 밤이 지나가면 주께서 우리를 향해 도키모스/합격!을 선언하시고 우리를 아름다운 성숙의 자리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

2.시련은 인내의 삶을 약속합니다.

시련이 오면 우리 모두는 버티고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인내라고 말합니다. 시련 없이 인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한 성도가 인내심이 부족하여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오 하나님, 이 형제에게 먼저 시련을 허락해 주십시오”하자 성도는 목사님을 툭툭 치며 “아니에요 목사님, 제게 필요한 것은 시련이 아닌 인내에요”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시련 없이 인내는 만들어지지 않는데요”하셨다고 합니다. 인내에도 수동적인 인내와 능동적인 인내가 있습니다. 마지못해 견디기만 하는 인내가 있고 적극적인 소망을 가지고 견디는 인내가 있습니다. 성경은 물론 후자의 인내를 권고합니다. 이것이 4절의 레슨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성경에서 온전하고 구비된 인격의 모델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왜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사모하고 닮아갈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한 제자(아마도 베드로)가 검을 빼어 베어버리자, 그 귀를 만져 붙여주시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것까지 참으라”(눅22:51)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일 베드로는 벧후3:9에서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한 인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오래 참음’이 포함된 것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인내할 때 우린 바로 온전하고 구비된 예수님의 성숙한 인격을 닮아 갑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우리에게 시련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가 인내하시는 주님을 닮게 하는 성숙의 시간입니다. 시련은 인내의 삶을 학습하는 시간입니다.

3.시련은 기쁨의 삶을 약속합니다.

시련 그 자체를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피상적이고 감상적인 아닌 진정한 기쁨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우리가 오늘 경험하는 시련이 우리를 연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게 한다면 그 소망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롬5:3-4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니라” 그래서 오늘 본문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서 “여기라”는 말은 의지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단어로 “계산하라/마음을 먹고 평가하라”는 뜻을 갖기도 합니다. 감정적으로는 기뻐하기 어려워도 이 궁극적으로 초래할 결과를 기대하면서 의지적으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감정적으로도 진심으로 기뻐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시련속에서만 이런 진지한 기쁨의 삶은 선물로 다가옵니다. 야고보는 이런 기쁨이야 말로 피상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이 아닌 온전한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기쁨이야 말로 또한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 곧 하나님 나라에 속한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누리신 기쁨이 바로 그런 기쁨이었다고 믿습니다. 눅10:21을 읽어보십시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무엇으로 기뻐하셨다구요? 예, 맞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시련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자연적인 기쁨의 선물을 인생에게 가져다주는 통로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뻐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하늘의 도움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기쁨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의 화두를 최 성봉이라는 청년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처음 22년의 시련이 없었다면 단 한 번의 무대에서 그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인생의 처음 22년의 눈물이 없었다면 그는 마침내 웃는 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최성봉의 무대가 끝나자 송윤아는 그를 안아주고 싶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습니다. 박 칼린은 그에게 “그 안에 악기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뉴욕 타임즈의 한 기자는 그의 블로그에서 “처음에 이 클립이 가짜인줄 알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짜 최 성봉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시련을 넘어서 카루소처럼 노래한다”는 글을 남깁니다.(음악 동영상) 

지난 주말 트위터와 인터넷 공간은 그의 이야기로 뜨거운 여름을 더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몇 가지만 발췌하여 소개해 봅니다. “진정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담담한 표정, 눈물까지도 사치스러워서일까?” “동영상보고 감동 먹었음. 저렇게 살아왔는데 판타지아를 노래하고 있다니” “이 새벽 이 동영상은 나를 엄청 울린다. 저는 안 울고 나를 울리는 나쁜 놈” 두 번째 무대에서 심사위원들이 그에게 가장 많이 주문한 것이 “웃어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펴는 것으로 웃음을 대신했습니다. 대회는 끝나지 않았고 그가 웃을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파이널리스트가 되면서 처음으로 “기쁘다고 정말 기쁘다”고 말한 후 조용한 웃음을 선물했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그의 웃음이 그리고 그의 기쁨이 얼마나 진지한 기쁨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속담에 “돌이 많은 시내가 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시련은 성숙의 통로입니다. 시련은 기쁨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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