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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교만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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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교만 (눅 18:9-14)


금세기 최고의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21세기 리더의 선택'(Leader to Leader)이라는 책에서 리더십을 아주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참된 리더십이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기인한다."  그래서 그는 21세기에 성공하는 기업은 비영리단체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니세프, 적십자사,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단체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 때문에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21세기에 지식 사회를 이끄는 리더들의 당면 과제란 바로 그들이 몸담고 있는 조직을 위한 비전과 성취동기를 유발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리더들은 상처의 치유자이자, 조직의 통합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리더십을 단순한 능력과 재능에 두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재능(capacity)보다 성품(character)이 더 중요합니다.  능력(power) 보다 인격(personality)이 더 우선입니다.  재주(talent) 보다 품성(tendency)이 더 소중합니다.

좋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다,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좋은 교인을 만나서 은혜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좋은 교인이 되어서 은혜로운 생활을 창조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데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는 자신의 개인적인 성취와 성공만을 추구하며 달려가는 나 중심의 사람을 지도자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보다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비전과 성취를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사명 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명예욕이나 직분을 바라보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따라 사역을 보고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조직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상처를 치유해 주고, 서로가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통합적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과거에는 개인의 능력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의 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조직의 하나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통합적 인간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성품을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조직과 공동체의 팀웍과 하나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며,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3절 이하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하여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된 나라와 교회를 축복하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세워주셨습니다.  성도들이 하나가 될 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모이기를 힘쓰고 사랑의 나눔이 있을 때 세상에서 허다한 무리들을 교회로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역사였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피로 사신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되는 일에 힘을 모아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지난 주일부터 우리는 공동체의 하나됨을 허무는 작은 여우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깨뜨리게 만드는 작은 여우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반드시 잡아야 할 작은 여우, 그 두 번째는 교만이라는 여우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에는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바리새인은 당시에 율법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대표적인 종교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요, 죄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모두가 존경하는 대상이었지만 세리는 미움의 대상,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들 두 사람이 한 교회 안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이들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말씀으로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있는 자나 없는 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강한 자나 약한 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가 한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그리고 11절과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는 이들 두 사람이 있었지만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과 은혜로 아름다워야 할 믿음의 공동체가 결코 아름답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고발하고자 하시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교만의 죄악을 고발하십니다.  그리고 세리에게서는 겸손의 모습을 칭찬하시면서 너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믿음의 공동체를 허무는 작은 여우, 성도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교만이라고 하는 작은 여우의 정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만이라는 작은 여우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첫째, 교만이라는 작은 여우는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이기주의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베풀어진 대상을 먼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셔야만 했던 대상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기를 존중히 여긴다, 자기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인간 개인의 정신 건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심리학자들도 자존감의 중요성이 인간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건강한 자존심은 죄가 아닙니다.  건강한 자존심은 병적인 자존심과는 구별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이유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풀어진 대상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이기심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난하고 파괴하기 시작할 때 이것은 자존감의 영역을 넘어선 구체적인 죄악의 모습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만은 일종의 자기 숭배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교만을 정의하기를 "교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병이다." 라고 했습니다.

15세기의 설교자 중에 '사보나 롤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어느 날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성당 입구에 있는 마리아상 앞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떤 부인이 경건한 모습으로 참배를 하면서 아주 진지하게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이튿날 산책을 하다 보니까 똑 같은 시간에 그 부인이 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한결같이 같은 시간에 와서 마리아상 앞에 참배하는 이 부인을 보았습니다.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이 사보나 롤라가 산책을 하다가 자기 동료 사제를 만나서 그 부인을 가리키면서 말합니다.  "여보게, 내가 저 부인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이 없어.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이 몰아치나 꼭 같은 시간에 와서 저렇게 기도를 한단 말이야.  참 신앙심이 유별하지?"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제가 낄낄거리면서 웃는 겁니다.  "자네, 모르는구만"  "뭘 모르나?"  "자네, 이야기 모르나?"  "무슨 이야기?"

"옛날에 이 성당에 마리아상을 처음 조각할 때, 그 조각가가 모델을 찾았을 때 저 부인이 처녀 시절에 모델로 선정되었다네.  저 여인을 모델로 해서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은 이후로 그 다음 이튿날부터 출근해서 지금까지 빠진 일이 없다네."

그 부인은 거기서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를 즐거워하고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뿌리입니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찾아와서 첫 번째 유혹을 이렇게 던졌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내가 하나님이 될 수가 있다.  교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절대화한다든지 혹은 나의 주장을 절대화시킬 때 바로 이것이 교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주장을 절대화시키는 그런 이기심의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이 공동체 속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교만이 개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면 인간관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과의 건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겸손한 자세가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하나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 교만이라는 작은 여우는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게 만듭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모습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과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1절에 보면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기도하던 위치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리들과 따로….  자기가 기도하는 자리조차 구별해서 서서 따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두 번씩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같지 아니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나는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다릅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이 세리들을 봤을 때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 숨어있는 것은 바로 우월감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의 뿌리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저 세리들도 비록 로마에 아부하고 민중들의 피를 빨아먹고 착취하는 사람이라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저들을 지으실 때 나와 똑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주신 사람들이다.  저들 안에도 하나님의 영이 있다.  하나님의 생기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라고 생각했었더라면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웃들과 지나치게 선택적으로만 교제의 폭을 좁히는 것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저런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않겠다."  종종 이런 선언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식의 밑바탕에는 숨겨진 우월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웃과의 교제에서 선을 그으려는 행동을 포기하십시오.  그것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사탄은 분리라는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고, 단절시키는 것, 그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악입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아주 비판적인 자세를 갖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정작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일종의 교만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남을 비판할 때는 아주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남들에 의해서 자기가 비판을 받을 때는 그것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의 병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가정에 있으면 가정 전체가 고통을 받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한 공동체에 있으면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런 교만한 사람들, 그들의 공통점은 벽을 쌓는 것입니다.  이웃들과 나 사이에 계속해서 벽을 쌓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패를 이루면서 파벌의 벽을 쌓습니다.  단절의 벽을 쌓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지 않습니까?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예수파….  결국 이것이 교회의 하나됨을 거부했고, 교회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 갔던 것입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들은 이웃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우리 공동체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듯이 우리도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사랑의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은혜의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화평의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교만이라는 작은 여우는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속이려고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기도의 비유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십시오.  11절과 12절을 다시 한 번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는"  우리말에는 두 번밖에 안 나오지만 원문에는 "나"라는 단어가 계속적으로 출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나는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도의 형태를 빌리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선전, 자기 자랑에 몰두하고 있는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이 주 앞에 왔습니다.  하나님!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당연히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야 할 이 기도에 있어서 주어가 뒤바뀌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바리새인, 그리고 자기의 그 아픔을 숨김없이 드러내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보다는 자기 선전에 분주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변화됩니다.  저는 깊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인생이 변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기도해도 안 변합니다.  그것은 그의 기도가 뭔가 잘못 되었습니다.

기도 속에서 자기를 노출할 줄 아는 사람, 내 속에 있는 부조리, 내가 숨기고 있었던 상처를 살아 계신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와 긍휼을 구할 때 어떻게 이 사람의 삶 속에 변화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변화가 안 되는 사람들은 기도 속에서도 자기를 감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숨길 수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교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가 비록 주 앞에 나와서 기도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마음에 교만이라는 작은 여우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만은 하나님 앞에 서서도 자기를 속이는 죄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교만이라는 작은 여우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교만의 결과는 기도가 응답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리는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본문 13절에서 우리는 세리가 드린 기도의 내용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결론은 뜻밖에 이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고 그 죄를 털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 제가 주님만을 의뢰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를 새롭게 하옵소서."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 나와서 주님의 도우심과 용서를 구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순간 성경은 선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신다고 인정하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죄인 됨을 고백하고 십자가 앞에 나와서 예수를 믿는 순간 오히려 그가 의롭다하심을 받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반면에 나는 의롭다고 자기 선전에 분주하고 바빴던 사람, 하나님은 그를 외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외면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첫 번째 복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내 안에 있는 부족함을 알고, 자기의 빈곤을 주님 앞에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가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고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마음이 약하다거나 의지가 굳세지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어떤 빈곤과 필요를 깊이 느낀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난하다'라는 용어는 아무 것도 없는 절대 빈곤을 말합니다.  이것은 재산이나 살림이 완전히 파산하여 거지가 된 처지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무엇이든지 전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구걸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좌절과 절망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 외부로부터 어떤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절대 빈곤을 말합니다.  거지 나사로의 가난한 상태나 가난한 과부의 형편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업적이나 공로가 없는 영적 좌절 상태를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인정하십니까?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하십니까?

자신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예수 믿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자기에게는 그래도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철학, 자기 의, 자기 공로, 자기 배경, 자기 신분, 자기 실력을 은근히 내세우는 사람은 예수 믿고 구원받기가 힘듭니다.  이것은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동체 속에서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전적인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깨닫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이런 사람만이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공동체 속에서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처음 태어나서부터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서 사울 왕이 왜 그처럼 비극적인 불행을 맞았습니까?  그의 마음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언제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가 잘못을 범했지만, 사람을 죽였지만 그의 겸손함을 보시고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인격적 특성이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겸손한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하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습니다.  마음에 상처받을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이 공동체를 하나되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공동체 속에서 사랑 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어떤 학자가 겸손한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  그 마음이 겸허한 만큼 열 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또 겸손한 만큼 인간 관계를 증진시킨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많이 상하고, 인간 관계에 마찰이 생기고 금이 간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난다.  자기를 낮출수록 하나님이 크게 도우시고 높여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겸손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사람의 도움도 받을 줄 아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겸손한 사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한 손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의 손을 붙들고, 또 한 손으로는 내 이웃의 손을 붙들고 인생을 따뜻하게 걸어가는 사람, 이것이 겸손한 사람이다."

그러면 교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이웃의 손도 뿌리치고, 그리고 고독한 파멸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도 여러분이 감당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 모두가 성전에 있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누가 평안함을 얻었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가슴을 치며 눈물 흘리면서 통곡하고 있지만,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나 세리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지만, 나는 저 세리보다 낫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답답함이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지만, 교회에서 봉사하지만, 헌금하고 충성하지만 바리새인의 모습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리가 납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모습으로 일을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화목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든 교인들이 세리의 자세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겸손'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언제나 겸손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언제나 두더지처럼 튀어나오는 교만이라는 작은 여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공동체의 하나됨을 허물고 자신의 신앙적 성숙을 파괴시키는 교만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그 공동체를 세워 가는 사람은 바리새인과 같은 교인이 아닙니다.  이것은 2천년의 교회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만한 바리새인과 같은 교인들을 통해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교인들은 언제나 교회에서 분쟁과 다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하게 낮은 자의 삶을 살았던 세리와 같은 교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들 세리와 같은 교인들이 있어서 교회 공동체에 속한 믿음의 가족들이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자신의 마음에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인해서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보면 사납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겸손하면 다 되는데 교만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망해 가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만 망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믿음의 공동체도 서서히 허물어져 갑니다.  이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심히 잘못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교만,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교만, 우리는 이 작은 여우를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교만한 마음을 내어버리고 겸손함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우리 앞에 새롭게 열려지는 복된 삶의 행진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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