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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기뻐하라 (벧전 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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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기뻐하라 (벧전 4:12-19)


열두 살 된 소년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마당에서 무슨 일인가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소년은 여섯 살 된 동생에게 대신 그 일을 하도록 시켰죠.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일을 하는 대가로 200원을 주기로 했고. 맏아들은 여섯 살 난 동생이 그 일을 하게 되면 저녁 식사 시간까지 그 돈을 가지고 있어도 좋다고 말했고요. 어린 동생은 오후 내내 일을 열심히 했고 드디어 다 끝냅니다. 그리고 큰 형은 약속대로 200원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말해요. “저녁 먹을 때까지만이야. 그 다음엔 형한테 돌려줘야 돼, 알겠지.” 매우 부자이며 부지런한 아버지는 일주일에 7일 모두를 일터에서 보내고 오후 늦게나 집으로 들어오곤 했어요. 

어느날 모처럼 일찍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이 막내 아들이 동전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얘, 그 돈 어디서 났니?” “응, 아빠. 마당 일을 대신 해줬더니 형이 줬어.” “그래서 네가 갖게 됐구나.” “응. 그런데 저녁 먹을 때까지만이야. 그 후엔 돌려줘야 돼.” “뭐, 얘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네가 하루 종일 일하고 난 대가가 겨우 동전을 쥐어볼 수 있는 기회뿐이란 말이야?” 꼬마는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해요. “그렇지만. 아빠, 아빠도 그러잖아.” 그 아이가 맞아요. 사실 아버지는 한 달 내내 애써 일하고 받은 월급을 모두 아내에게 내어줍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잠시 손에 쥐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한 질문은 이것이죠. “우리가 가지고 있을 때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 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오래된 곡간을 헐고 새 곡간을 다시 지었지만, 자기 영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선 참으로 지혜로운 아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는 아주 놀라운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펼치기 위해서 아버지의 도움을 청합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재산이 있으니 그 재산 나중에 죽은 다음이 아닌 살아계실 때 좀 나눠줄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뭐 그 마음은 좀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흔쾌히 투자를 합니다. 물론 네게 줄 유산을 미리 주는 거라는 말도 빼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처음에는 나름대로 자리를 잘 잡는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그러다보니 아들 녀석이 좀 질이 안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결국 아들이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서 그만 파산하고 말았다는 소식까지 듣게 됩니다. 아무리 어쩌니 저쩌니 해도 아들인 것을! 그래 이제라도 좀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아들은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려고 하지는 않고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돼지 농장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될 때 그 아버지의 마음은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가뭄까지 들어 자기 한 몸 먹거리조차 장만하기 힘들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 주인이 돼지먹이로 주라고 하는 가장 하층민의 먹거리인 쥐엄나무 열매를 보고는 그거로라도 배를 좀 채워보려고 했지만 그거조차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밑바닥 생활의 어려움과 고픈 배를 움켜쥐고 이 아들은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 차라리 여기서 품꾼으로 있느니 아버지에게 품꾼으로 써달라고 요청해서 허락이 된다면 최소한 굶지는 않지 않겠나 싶은 마음에 그는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어떻게 맞이했는가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바 입니다. 
여기서 잠깐 우수개 소리 하나 나누도록 하죠. 
주일학교 여선생님이 유치부 어린이들에게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다 끝나고 선생님은 어린이들을 향해 물어보았습니다. 
“자, 탕자가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싫어했는지 아는 어린이?” 
가장 조그만 어린이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습니다. 
“살찐 송아지요!”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게나 시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4~15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미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이 지닌 약점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16에서 요한 사도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먹고 싶고 가지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정말 처량할 것입니다. 반면에 건강상 이유 때문에 먹고 싶어도 절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어쩌면 더 딱합니다. 몸이 아파서 입맛이 없고 해서 먹지 못한다면 그래도 낫습니다. 입맛도 좋아요. 먹거리로 풍족합니다. 그런데 차려주어도 먹지 못합니다. 

왜요? 몸매 관리한다고 해서 그렇기도 하고 혈압이나 당뇨 때문에 식사 관리를 해야 되는 사람도 있죠. 그런데 이판사판 공사판이라고 하면서 마음 편하게 먹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래 놓고 나중에 후회하지만요. 어쨌든 먹는 문제 참으로 중요합니다. 다음으로는 남녀 관계를 포함한 인간 관계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만남의 관계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만남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만나서 서로에게 득이 되는 사람이 있고 만남이 독이 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 가족들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인지부터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가족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고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가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존재인지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간에 서로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잘 한다고 하는데 상대방은 오히려 고통스럽다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는데 속으로는 우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도 가족 간에는 서로를 배려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텐데 오늘에 와서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건 이웃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있는 반면 이웃 잘못 만나서 친구 잘못 만나서 망하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닙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그저 아무도 없이 혼자라면 무엇을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고 무엇을 가지고 있든 빈손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고 누구에게 보이려고 꾸미는 것도 또한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혼자서는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하는 유혹들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목숨까지도 왔다갔다할 정도로 치명적인 위험에도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늦게 탕자처럼 후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건 세상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믿음 안에서도 충분히 맞닥뜨리는 이야기들입니다. 더군다나 악한 마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오죽 하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심지어 악한 마귀는 예수님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시험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런 시험의 때에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우리가 먼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를 다시 찾아주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하나님의 사역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의 기회를 열어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내가 실패하고 넘어졌던 일들을 거울삼아 나를 한 단계 발전시켜야 될 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를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좋으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탕자가 아버지를 찾아 돌아오듯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아버지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품에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 잔치를 벌여주시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우리의 삶을 잔치 한 마당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훈련을 하십니다. 그래서 광야로 먼저 내보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치고 광야의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잠시는 큰 고통의 시간들이었지만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의 품에 안겨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통과할 때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시내 광야는 단순한 광야가 아닙니다. 우리는 광야라고 하면 그저 넓은 들판을 생각하기 쉬워요. 물론 넓은 들이죠. 하지만 우리처럼 무성한 풀이 없어요. 아니 전혀 풀이란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물이 없어요. 왜 물이 없느냐 하면 그건 비가 안 오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사막입니다. 그냥 쉽게 우리네 식의 산천인데 거기에 아무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곳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곳에 어쩌다 있는 오아시스 외에는 물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먹을 것조차 얻을 길이 없습니다. 길이나 제대로 알 수 있느냐 하면 숙달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깜빡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시내광야입니다. 거기다가 한 낮에는 기온이 40도 이상으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까지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낮에는 더위가 문제고 밤이 되면 거꾸로 추위를 어떻게 견디느냐가 또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더운데도 그늘 속으로만 들어가면 시원합니다. 그래서 구름 기둥으로 그늘을 드리어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비춰주심으로 주위에 해충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도 주실 뿐 아니라 또한 따뜻하게도 만들어 주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의 품안에 있어야 험한 광야의 길에서도 안전할 수가 있고 주님의 인도함을 따라 필요한 모든 것으로 공급하심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께 모든 답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여 주셨습니다. 아침으로는 만나를 하늘로부터 내려 백성들로 그것을 거두어 먹게 하셨고 또 때로는 메추라기를 보내주셔서 그들로 먹어 배부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하지만 광야를 지나간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얼마나 힘들면 그들이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으면서도 틈만 나면 원망하며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했겠습니까? 

그건 오늘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만큼 힘들었으니 이제는 좀 괜찮아지겠지 하는데 고개 넘어 또 고개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고개 넘어 고개가 아닌 숨이 턱에 찰 것 같은 고바우 길이 계속되기도 합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몰아닥치는 돌개바람 속에 정신도 차리기 힘든 그런 날들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오죽 하면 불시험이라고 하겠습니까? 보세요. 다니엘을 보세요.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는데 거기에 다니엘이 뽑혀서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음식이 문제입니다. 신전에 바쳐졌던 제물을 물려내서 그것을 특별히 하사해서 주는데 신앙 양심상 도저히 그것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채식으로만 달라고 간청을 해서 열흘간 시험하여 보니 고기를 먹는 다른 사람들보다 얼굴도 더 빛나고 좋아서 채식만 하도록 허락을 받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더욱 놀랍도록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뽑혀 중용되게 되는데 이를 시기한 갈대아 사람들로 인해서 갈수록 어려움이 더해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다니엘이 드높이 세워졌고 나중에는 총리대신까지 되지 않습니까? 물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뜨겁게 달궈진 풀무불 속에 던져지기도 했고 다니엘 역시 사자굴속에서 던져졌지만 오히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더욱 존경받고 높임받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 받기에 합당한 자임을 만방에 알리도록 시험하십니다. 모레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번제로 드리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제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줄 내가 알았다고 하십니다. 그럼 그때가 돼서야 하나님이 아셨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그보다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돈독한 믿음의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시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계속되는 불시험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이제 다시금 우리 가운데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언제라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못내 못마땅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악한 마귀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칭찬들을 일에까지도 오히려 비아냥거리고 빈정대게 만들고 사사건건 우리들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다스릴 수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하셨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어 기도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주셨던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리고는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또한 말씀하시기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셨는데 그 권능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입니다. 그런데 그 권능이 내 권능이 아닌 주님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든지 믿음을 따라 말씀으로 역사하셨던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해 주셔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어 기도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요 주님이 역사하시도록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본을 주님이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더더욱 우리가 주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시험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주시려고 부르셨는데 어째서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계속되는가 싶습니까? 그냥 보통의 시험 같으면 또 모르겠는데 이건 정말 감당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태풍과 같이 몰려오는 이 어려움들 그래 얼마나 힘들면 불시험이라고까지 할까요? 한데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랍니다. 

보십시오. 배고파본 사람만이 배고픈 사람의 아픔을 압니다. 우리 가운데도 허리가 안 좋아서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허리 아픈 것이 어느 정도로 아플지 상상이 되지 않는 분들 많으실 것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얼마나 허리가 아플지 나도 겪어봐야겠다고 하나님 나도 허리 좀 아프게 해 주세요 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 앉았다 일어나는 데만도 아구구구를 몇 번도 더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아프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하나의 아픔입니다. 내 건강상의 문제일 뿐입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괜히 트집을 잡고 괜히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내 딴에는 내 할 도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옆에서 계속 비아냥댑니다. “뭐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대라고 했다며” 하면서 툭툭 건드리기도 합니다. 뭐 방귀 뀐 놈이 성질낸다고 잘못은 자기들이 해놓고도 오히려 믿는 사람들이 그것도 참아주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냐고 합니다. 어떤 때는 대놓고 믿는 사람들을 엉뚱한 함정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런데 그것까지 참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야고보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도 말하는 것처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뭐 어쩌고 저쩌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요것도 못참아주냐고 하면서 어쩌고 저쩌고 한다는 것은 곧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한다는 것은 곧 우리들이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허락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은 잠시는 힘이 들지만 고난을 통해서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심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임을 우리는 또한 깨달아 감사해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최후에 웃는 자라고 했습니다. 누가 최후에 웃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우리가 잠시 힘들어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시험들을 통해 우리에게 천국의 소중함을 다시금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우리와 함께 계신 영광의 영과 함께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찬양처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아름다운 고백으로 가득한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다뉴브강을 헤엄쳐 건너는 경기가 있습니다. 이 경기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강 중심의 소용돌이 지역입니다. 수많은 선수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경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노련한 선수들은 소용돌이를 잘 극복해낸다고 합니다. 요령은 간단합니다. 소용돌이 지점에서는 아무리 수영을 잘 하는 사람도 소용이 없어요.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빨려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기진맥진하여 경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프로들은 소용돌이에 잠시 몸을 그대로 맡겨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거센 물결이 사람의 몸을 한껏 빨아들였다가 수면 위로 되돌려놓는다는 군요. 잠시 가만히 있는 것이 소용돌이를 극복하는 비결이라는 것이죠.

인디언들은 1월을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이라고 부른답니다. 인디언들은 1월을 새로운 출발의 의미보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달로 여겼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반년을 지내오는 동안 여러 가지 인생의 소용돌이를 만났고 앞으로도 또 만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온전히 우리를 맡겨보십시오. 그분께서 우리를 삶의 제 자리로 옮겨놓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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