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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사헬과 아브넬의 교훈 (삼하 2:8-9, 18-23, 3:2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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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8-9)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이르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나로라 아브넬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그의 뒤를 쫓으매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이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18-23)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3:20)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오늘 말씀은 다윗의 부하 장수들과 사울의 부하 장수들의 목숨을 건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상징주의 해석법에 따르면 다윗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다윗의 군대장관들은 신약 교회의 직분자들을 상징합니다. 

아사헬은 다윗의 조카요 군대 지휘관으로서 실권자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고 충성심이 뛰어난 무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세력과 사울의 남은 세력 싸움에서 결국 전사했습니다. 아사헬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숙부인 넬의 아들로서 사울과 4촌간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총사령관으로서, 사울이 죽은 후 군대를 모아 다윗과 대결한 사람입니다. 그의 일생은 간음과 살인, 권력 쟁탈 등 세상 사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전투에서 다윗의 군대장관 아사헬을 죽였습니다.

아사헬의 모습이 교회 직분자들의 신앙의 모습이라면, 아브넬의 경우는 거짓 직분자의 모습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아사헬과 아브넬의 모습을 비교하며 오늘 우리의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열정적 신앙과 세속적 신앙 
2:18=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2:8-9=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두 세력 간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다윗의 군대 지휘관 아사헬은 적장 아브넬을 뒤쫓는 일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빨랐습니다. 그는 날렵한 발을 가진 용사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군사인 교회 일꾼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열정적 신앙’ 을 의미합니다. 아사헬이 다윗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한 것처럼 교회의 성도는 예수님과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열심 신앙’ 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한편 아브넬은 어떤 인물입니까?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 사울의 군사령관 아브넬은 이에 강력히 반발합니다. 그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억지로 왕으로 세우고 막강 권력을 손에 넣습니다. 그는 세상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브넬의 모습은 이 시대 교인들의 ‘세속적 신앙’ 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 그룹에 아사헬과 아브넬 같은 상반된 인물이 있었던 것은 오늘 교회 안에 열정적 신앙과 세속적 신앙의 상반된 모습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아사헬처럼 우리도 빠른 발을 가져야 합니다. 아사헬은 그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들판을 달리는 노루발처럼 매우 날렵한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달리는 노루발은 우리의 열정적 신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열심 신앙이 중요합니다. 레위기에도 보면 하나님은 곤충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발에 ‘뛰는 다리’ 가 있는 것으로 제한했습니다.

레 11:21-23= “다만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팥중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메뚜기와 베짱이와 귀뚜라미와 팥중이 종류는 먹을 수 있으나 기어다니는 곤충은 오히려 혐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열심 신앙은 하나님께 아름다운 모습이나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뜻은 성경에 매우 확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그러나 아브넬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 같은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는 아브넬 부류의 사람을 찾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권력욕과 물욕은 탐욕과 음행으로 연결되기 매우 쉽습니다.

3:6=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권력을 잡은 아브넬은 거침없이 죽은 사울 왕의 첩과 통간까지 했습니다. 그는 간음과 타락의 길을 내달렸습니다. 

3:7=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기준은 매우 엄격합니다. “음행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탐욕을 부리는 자나...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발은 아사헬의 노루발 열심 신앙의 빠른 발입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사역에 적어도 한 가지 이상 충성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넬의 세속적 탐욕적 모습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아사헬의 노루발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2. 용기 있는 신앙과 거짓 신앙
2:19=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3:20=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백전노장 아브넬을 뒤쫓는 젊은 장수 아사헬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모습입니다. 아사헬은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적장(敵將)의 뒤를 똑바로 쫓아갔습니다. 그는 주군 다윗의 원수 세력을 쳐부수기 위해 상대가 누구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사헬은 용기 있는 신앙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한편 아브넬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주변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사람들을 데리고 거짓으로 다윗에게 나아왔습니다. 

3:25=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아브넬은 거짓 신앙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가 세운 왕을 겁박(劫迫)하기도 했고, 다윗의 군대장관 아사헬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아사헬은 예수님의 충성되고 용맹한 제자를 상징하는 반면에, 사울은 마귀를 예표하고 아브넬은 거짓 신앙의 사람, 거듭나지 못한 교인을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말에는 온갖 두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마 24:6). 참 성도가 되려면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용기 있는 신앙으로 무장하지 못한다면 결국 세상과 타협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말에 교회를 타락시킬 세속적인 신앙은 음녀와 함께하는 거짓 신앙입니다. 우리는 아브넬에게서 거짓 신앙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계시록의 7교회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리 시대의 세속화 된 교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현대교회는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가난하고 눈 먼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벌거벗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혼합주의와 민주주의가 만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은 명목상 구호일 뿐, 많은 경우에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 중요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배 의식이나 순서가 그렇고, 직원 선출의 과정이나 방법이 그렇습니다. 재정 지출의 우선 순위가 성경적인 가치관에 의해서라기보다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쪽에 무게 중심이 쏠리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대는 무섭게 타락해가고 있는 종말 시대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시대 속에서 살아남은 그루터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 6:12-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1, 2차 공격으로 유대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던 것처럼 지금 유럽의 교회는 황폐하게 되었고 미국 교회도 점점 세속화와 다원주의 물결에 휩쓸려가고 있던 지난 세기에, 한국 교회는 십분의 일로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3차 공격으로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완전히 베임을 당했던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거룩한 그루터기가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목숨을 걸고 우상과 싸우며 다원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세력과 개신교 안의 혼합주의 세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 시대의 발빠른 아사헬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싸울 용기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마귀의 세력을 대적하기 위해 피흘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이 시대의 살아남은 그루터기 신앙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3. 순교의 죽음과 심판의 죽음
2:23=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3: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아사헬은 아브넬의 창에 찔려 죽었고, 그후 아브넬은 아사헬의 형 요압의 칼에 배를 찔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두 사람의 죽음은 그 의미에 있어서 전혀 달랐습니다. 

아사헬의 죽음은 주군 다윗을 위한 죽음이었고, 이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울의 군사령관 아브넬의 죽음은 거짓 신앙으로 하나님이 뽑으신 일꾼을 대항하다가 죽임당한 심판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히 9:27). 우리 모두 한 번은 죽습니다. 아사헬도 아브넬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죽음의 가치와 의미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순교의 죽음이었다면 다른 사람은 심판의 죽음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종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30).

또한 양과 염소 비유에서 왼편의 염소들을 향해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고 하셨습니다. 모두 아브넬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자들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순교의 죽음과 심판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는 아사헬들과 아브넬들이 섞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사 2000년에 순교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적지 않습니다. 

3세기 경에 텔레마투스라고 하는 경건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라!”

수도사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로마를 향했습니다. 몇 개월 동안의 긴 여행 끝에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축제기간이었습니다. 원형극장으로 게임을 즐기려 많은 사람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도 따라갔습니다. 검투시합은 두 검투사 중 한 사람이 죽기까지 싸워야 하는 살벌한 경기입니다.

경기에 앞서 두 사람의 검투사는 황제 앞에서 “제가 죽기까지 싸우겠습니

다“ 맹세하고 경례를 한 후 경기장 중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그 수도사의 마음속에 불현듯 `이것은 옳지 못하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그를 로마로 가게 하셨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싸움이 막 시작되는 순간 그는 많은 군중 앞으로 나가 “예수의 이름으로 멈춰라!”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군중들은 쇼의 일부분인줄 알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검투사들이 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 수도사는 경기장에 뛰어 들어 소리쳤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멈춰라!” 관중들은 게임을 방해하는 수도사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바로 그때 검투사 중 한 사람이 수도사를 칼로 찔렀습니다. 그는 칼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멈춰라!” 고 외쳤습니다. 경기장의 분위기는 숙연해졌습니다. 야유하고 조롱하던 그 많은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했습니다. 바로 로마 황제이었습니다. 배석했던 고관들이 황제를 따라 퇴장했습니다. 수도사를 죽였던 검투사들도 고개를 떨구고 퇴장했습니다. 관중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AD 391년에 있었던 이 사건 이후로 로마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검투사의 결투가 사라졌습니다. 한 사람의 용감한 희생으로 더 이상의 무모한 희생은 사라졌습니다. 고귀한 희생, 순교의 죽음입니다.

중국 공산화 당시 서북부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공산당은 선교사들이 세운 대학교를 완전히 장악하고 500명의 학생들에게 일련의 질문이 적힌 질문지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학생들은 얼마 전에 있었던 특별복음집회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 질문지에 있는 질문들은 거의가 유치하고 부적합한 것들이었지만, 맨 끝에 있는 질문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공산당의 이념에 찬성을 하면 O표, 반대하면 X표를 하라' 

조사결과 300명의 학생들은 O표를 하였고, 200명의 학생들은 X표를 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당에 찬성한 300명을 불러 당원직과 일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나머지 200명에 대하여는 한 달 동안 여러 가지 잔인한 방법으로 조롱하고 괴롭혔습니다. 

한 달 후, 다시 전교생에게 용지가 배부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O표의 숫자가 늘어나기는커녕 X표의 숫자가 더 늘어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국자들의 표정은 굳어졌습니다. 

급히 조사를 해본 결과, 매일 아침 7시에 기독 학생들이 그룹으로 모여 시련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성경읽기 모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그룹들을 해체시키고 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기독 학생들은 아침 6시에 다시 모였고, 이것이 발각되자 한 시간을 당겨 5시에 모였고, 그 후부턴 일찍 일어나 새벽 4시부터 성경읽기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당국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따로 격리시키고, 석달 동안 10명의 극렬 당원들 아래서 밤낮 사상교육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고립된 학생들은 날로 초췌해져갔고, 그들은 믿음을 가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앙의 어린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참아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힘은 오직 몰래 간직하고 있는 성경 한 권의 위로뿐이었습니다. 

만 3개월이 지난 후에, 공산당에 동조하지 않는 200명의 학생들은 재판을 받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분위기를 보아 그들이 공산당을 반대한다면 어떤 형벌을 받게 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17세의 가냘픈 소녀가 제일 먼저 호명되어 비틀거리며 단 위에 섰습니다. 

“너는 현재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추상 같은 추궁에 곧 쓰러질 듯한 그녀는 그러나 분명하고 힘있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석달 동안 사상교육을 받으면서 저는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200명의 학생들은 하나씩 호명되었고, 그 중 단 한 명도 주춤거리지 않고 자기의 신앙을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그들은 모두 광장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장렬히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 보시기에 열심 있는 신앙인입니까? 마귀의 세력과 더불어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지금은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의 마지막에 이르런 때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습니다. 처처에 난리와 난리 소문이 그치지 않고, 종말의 징조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2000년 만에 기적적으로 독립한 것이 그러하고, 주류 교회에 종교 다원주의의 배도(背道)의 기운이 만연해진 것이 그러합니다. 동서남북 4대 세력이 편성되었고, 로마의 후예인 유럽연합(EU)이 이제 정치적인 세력으로 급부상하여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온상이 마련되었습니다. 대환난의 전주곡이 울려퍼지고 있는 급박한 때입니다. 이 시간에도 마귀는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 5:8). 

오늘 우리 모두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노루 발 열심’ 이 필요합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 순교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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