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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 우리의 영적 고향 (막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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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우리의 영적 고향  (막 1:1-8)                                                                                          

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을 잇는 성지 순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올 해 전반부에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서 과연 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6월이후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서 무사히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염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성지 순례에서 얻은 교훈 하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광야 체험이었습니다. 우리 성지순례단은 한국성서지리연구원이라는 기관에 관련을 갖고 있는 사람들 12명이 함께 떠난 소규모 탐사단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관광여행처럼 의례껏 다니는 코스는 가급적 줄이고, 성경과 별 상관이 없는 이집트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 군이나, 요르단의 ‘페트라’ 같은 관광 명소를 빼고, 성경을 몸으로 체험하는 색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광야 체험이었습니다. 

일정 중의 일부를 우리는 관광버스 대신 지프차를 타고 이스라엘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내광야의 사막 길을 하루 종일 탐사했습니다. 출애굽 코스 중 ‘엘림’이라는 곳으로 추정되는 ‘와디 가랑달’, ‘돕가’라는 곳으로 추정되는 ‘세라빗-엘-카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며 낙서를 남긴 ‘낙서의 계곡’, 그리고 ‘르디빔’으로 추정되는 ‘와디-페이란’ 등을 거치는 길입니다. 

우리는 40도를 웃도는 열사의 사막에서 길도 없는 길을 달렸습니다. ‘세라빗-엘-카딤’에서는 지프에서도 내려 뜨거운 돌산을 점심도 못 먹은채, 3시간에 걸쳐 걸어 넘었습니다. 시내 광야, 멀리 보이는 벌건 바위산들과 드문 드문 보이는 가시덤불 같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앞에서 말한 이상한 지명들은 이스라엘이 진쳤던 오아시스가 있는 곳들입니다. 그 사막 한 복판에도 간혹 종려나무들이 있고 종려나무가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물이 있습니다. 이런 사막에 깊이 들어가니, 비옥하고 물도 많은 애굽의 고센 땅을 떠나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평과 고생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징계도 받고, 신앙을 바로 세워 가면서, 오직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에 의지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한 40년의 세월!!!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또 한번의 광야 체험은 이스라엘로 들어와 유대 광야를 탐사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지프를 타고 유대 광야 한 복판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도 광야인데 시내 광야와는 좀 달랐습니다. 시내 광야가 모래 사막이라면, 이곳은 곳곳에 더러 얇은 흙이 덮혀 있는 바위산 사막입니다. 도저히 차가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돌짝밭 길을 4륜구동 지프를 타고 달렸습니다. 오르락 내리락 사막의 뜨거운 열기 속을 무섭게 흔들거리며 달렸습니다. 그러면서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아사셀 염소를 버린 곳이라는 몬타르산, 아간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훔쳤다가 형벌을 받은 아골 골짜기 (수7:25-26)를 보았습니다. 

광야,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 메마르고 거친 곳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죽음의 땅은 아닙니다. 광야에도 식물이 살고, 동물이 살고, 그리고 사람도 삽니다. 불편하고 위험한 곳이기는 하지만... 그런 광야에 엘리야가 쉼터를 구했던 로뎀나무, 법궤를 만들었던 조각목 즉, 싯딤나무도 있고, 놀랍게도 달걀 만한 야생 수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물로는 전갈, 뱀, 쥐, 도마뱀, 여우, 하이에나, 자칼, 표범, 늑대, 독수리, 매 등이 산다고 합니다. (안내인은 말했습니다. “사막의 돌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 그 밑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도 살고 있는데, 바로 베두인족 유목민입니다. 이들은 현대 문명을 알면서도 일부러 옛날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풀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양을 치며 삽니다. 그들의 살림살이는 간단합니다. 염소털로 만든 텐트, 간단한 취사도구, 그리고 양들과 당나귀, 낙타 등입니다. (아무리 현대문명과 등지고 산다고 해도 양털을 깍아서 팔거나 양을 길러서 팔고, 곡식이나 생필품 구입을 위해 거래를 해야하기 때문에 핸드폰은 있더군요!) 욕심 없는 삶의 모습, 집착 없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문화는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커피와 차를 즐겨 마십니다. 식사는 저녁에 한끼 먹는다는데, 아침 점심은 차만 마신답니다. 그래서 커피 볶는 팬, 커피 절구, 차 끓이는 셋트 등은 꼭 가지고 다닙니다. 

광야... 광야는 구약 신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모세가 연단 받은 곳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광야의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광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신앙을 가지도록 연단 받은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그 당시 어른인 세대가 다 죽기까지 38년 동안 가데스바네아와 세렛 시내 사이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하루 하루 만나에 의지하여 살면서 신앙의 훈련을 받고 강인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광야는 구약 백성과 신앙의 고향입니다. 

광야... 광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간 금식하시고 기도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눈 곳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역시 신약 백성, 우리의 신앙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한 세례요한이 사역한 곳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을 그냥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 막1장 5절을 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방식으로 말하면, 교통도 불편하고, 건물도 없고, 주차장도 없고, 아무 편의시설도 없이 저 시골 어디 맨 땅에 천막치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마을에 들어가시기도 하셨지만, 빈들이나 산, 혹은 바닷가에서 그를 찾아 나온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광야나 빈들로 나아 왔을까요? 광야에서 외치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소리, 진실의 외침,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로마 제국의 억압과 권력자들의 횡포 아래서 생명과 희망의 소리를 찾아서... 진실과 은혜의 자리를 찾아서... 그들은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광야에 나와서 들은 소리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세례요한에게 들은 말은 “회개하라”는 꾸짖음이었습니다. 

눅3:7-9에 보면 그는 무섭게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고, 마음에 공감했고 찔림을 받았고, 그에게서 진실의 목소리, 용기 있는 생명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추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들의 준비된 마음은 주님을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어쩌면 현대 한국 교회에도 필요한 말씀일 것입니다. 

광야는 사람을 낮아지게 만듭니다. 광야는 사람의 본바닥이 드러나게 만듭니다. 이 메마르고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광야에서는 가식으로 꾸미고 살기 어렵습니다. 하루하루 위험하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광야, 광야는 도움이 될만한 것이 별로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오직 하늘 밖에 쳐다볼 곳이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을 때, 그들은 변변한 무기도 없었고, 단 이틀치의 군량미도 비축하지 못한, 형편없어 보이는 군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를 무너뜨린 최강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과 용기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고대 초기 기독교 수도원들은 광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거기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번 성지 순례단이 유대광야에 다니다가 방문한 곳은 마르사바 대수도원이었습니다. 이곳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약 1600년 전에 세운 수도원인데,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수도원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라고 합니다. 

그 옛날, 사바 라는 사람이 이곳 광야 동굴에서 기도하며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배당과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의 명성이 알려져서 한 때는 500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그 광야 골짜기로 몰려 들었었다고 합니다. 그 수천명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다른 것 다 그만두고 그 광야 한 복판으로 달려갔을까요? 그렇게 광야는 신비한 곳입니다. 위험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바로 거기에서 놀라운 영감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수도원들은 세파에 흔들려 없어지고, 회교도들의 침공으로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이 수도원은 살아 남았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고작 10여명이 살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정신이고요. 사람없는 대 수도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이 살아 남아야 합니다. 

(이 문단은 상황에 따라 생략할 수 있음) 

여러분,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들, 거대한 석상들과 오벨리스크들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그 문명을 일구었던 사람들은 지금 이집트인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 이집트를 지배하는 민족은 아랍계인들로 그 땅을 정복해서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대 문화 유적에 대한 자부심이나 긍지가 없습니다. 옛날 그 문명을 일구었던 민족은 알렉산더 대왕 때 헬라인들의 침공에 밀리고, 그 다음엔 로마인들의 침공에 또 밀리고, 그 다음은 페르시아, 그 다음은 아랍인들에 밀려 점점 변방으로 밀려났고, 지금은 소수 민족으로 전락해 거의 사라져가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정신이 깨어 있고, 사람이 살아 남아야 합니다. 

기독교 교회는 초기 한 300년간은 지상에 이렇다할 예배당 건물 하나 없이 지하 무덤 속으로, 가정집의 비밀 집회소로 숨어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로마제국을 뿌리채 흔들고 변화시킬 만큼의 영적인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는 제국 정부의 공인을 받았고, 지상에 올라와 예배당들을 지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화려하고 웅장한 것들을 지었습니다. 

지금 성지에서 발굴해 내는 옛 예배당들은 대개 비잔틴 제국 시대의 예배당들입니이다. 그러나 그 예배당들도 지금은 대부분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회교도들이 침공해 와서 다 파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때 십자군들이 성지를 탈환하고 무너진 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무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요. 기독교인들은 일부는 순교하고 일부는 피난가고, 그리고 일부는 회교로 개종하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의 정신이요, 사람의 신앙입니다. 사람이 있으면 건물도 영광을 보존하고 그들의 신앙도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정신, 깨어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사라지면 다 사라집니다. 광야에서도 살아 남는 그런 강인한 신앙, 그렇게 원초적이고 야성적이고 강인한 신앙이 아니면, 결국 다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오늘의 교회는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사람의 정신, 사람의 신앙을 바른 길로 깨우쳐야 합니다. 세상에서 부자되고 출세하기만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적 신앙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교회 규모만 키우면 된다는 식의 물량주의적 성장 정책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정신 차려서 본래의 복음적 신앙으로 돌아가야 살아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가 내세운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 프로젝트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관심과 열정과 기도가 모여져야 합니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지금 광야와 같은 형편에 처해 있는 분이 있습니까? 메마르고 거친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무도 도와주지 못할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광야는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죽을 곳은 아닙니다. 지금 이곳이 하나님을 만날 때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입니다. 믿음과 용기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실 것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말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여러분, 지금 풍요와 평안 가운데 있습니까? 일부러 라도 시간과 공간을 잘라 내어 모든 집착을 버리고 홀로 하나님을 만나는 작은 광야를 만드십시오. 새벽기도를 통해서든, QT를 통해서든, 금식기도를 통해서든, 기도원엘 가든.... 그런데 사람들이 기도원에 가고, 금식기도를 하는 모습은 욕심과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당한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기복주의적으로 자기가 애타게 간구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일 때가 많습니다.

제가 군목시절에 보니, 장교 가족들이 매년 진급 발표할 때가 되면 새벽기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가, 발표가 나고 나면 휙 줄어드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복을 구하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럴 때만 하나님께 간구하고, 신앙생활의 중심이 그런 것을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의 중심은 주님과 교제하며 생명을 얻고, 탐욕과 교만과 거짓에 물든 나를 돌아보고, 은혜를 받아서 변화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내 개인과 사회 속에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광야의 신앙을 위해 꼭 광야로 나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도시 속에 나만의 광야 같은 공간과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영적인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것이 타락하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길입니다. 그것이 나를 엄습해 오는 세속의 탐욕과 집착과 거짓, 부와 권력과 명예에 대한 탐욕과 집착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것이 충만한 참된 영적 능력을 얻는 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혹시 광야와 같은 고난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들에게 삶은 광야와 같이 거칠고 메마르고, 아무런 도움도 바랄 데가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삶을 나누고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들의 광야를 우리의 광야로 여겨, 짐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그들에게 다가가실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를 영적 고향으로 삼는 이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 교회가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이라는 주제를 내 걸고 하고자 하는 일도 바로 그런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성경 말씀대로 광야에 샘이 흘러 넘치고, 광야에 꽃이 피고 향기가 날리는 그런 세상, 바로 천국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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