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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시련 (느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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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련 (느 6:1-9)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가 쓴 오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라에 오리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주일날 오리들은 뒤뚱거리며 교회로 나갔습니다. 
오리 성가대가 들어오고, 오리 목사가 들어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오리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날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날개로 날 수 있습니다! 독수리만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날개를 주신 것은 날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어떤 울타리도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날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들은 오리들은 흥분해서 소리쳤습니다. 
“아멘!” 
그리고는 하나씩 둘씩 뒤뚱거리며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리가 날기 위해서는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아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높은 언덕에 올라가 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뒤뚱거리고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비상한 각오로 뒷동산에 올라가 하나씩 뛰어내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더러는 다치고, 부러지고, 다시는 날지 않겠다고 울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도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날고는 싶지만 편한 길을 택하여 또 다시 뒤뚱거리며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우화입니다. 

의미 있는 변화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전통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해온 일이 옳다고 믿는 가치 체계입니다. 
그런데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붙잡았던 가치가 이 시대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부정입니다.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변화에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그냥 잘되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그의 책에서 개혁이 쉽지 않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양쪽에서 저항을 받기 때문이다. 현재의 제도와 시스템으로 혜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잃을까봐 저항하고, 개혁을 마음으로 찬성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것이 가져올 혜택에 대한 불확실성과 모호성 때문에 저항한다. 결국 어떤 개혁이든 두 가지 적을 갖는다. 강력한 전통의 적과 미온적인 동지의 적이다.”

우리는 4장에서 느헤미야의 건축을 방해하는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의 집요한 반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4장이 지나자 안도의 숨을 쉬면서 방해꾼들의 반대가 끝나고 이제는 모든 시련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6장으로 오자 4장에서 방해했던 산발랏 일당이 다시 방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 방해는 4장과는 다릅니다. 
4장보다 훨씬 더 계략적이고 더 위협적입니다. 

시련이 찾아올 때
먼저 언제 시련이 다시 찾아왔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1절을 보십시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이제 다 끝났습니다. 
문짝만 달면 됩니다. 
이제 할 일은 문짝 달고 백성들이 모여 테이프를 끊고 축제만 하면 됩니다. 
바로 그때 예상치 않은 또 하나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2절에 보십시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언제나 시련은 일이 잘될 때 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 시련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긴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넘어질까 늘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시련을 만날 때
시련을 만날 때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영적 분별력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의 제안을 받을 때 즉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당연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산발랏이 왜 갑자기 저를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합니까?” 
그때 그가 깨달은 것이 ‘아, 그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2절 하반절을 다시 보십시오. 
“.......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이것을 깨닫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아주 중요한 신앙적 능력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0-11절,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영 분별’, 헬라어로 ‘디아크리세이스 프뉴마톤’, 영어로 discernment입니다. 
이것은 성도 안에 계신 성령님이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신 거룩한 판단력입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속과 겉, 명분과 실질, 이단과 정통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입니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땅을 판 돈 중 일부를 감추었을 때 베드로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아나니아가 땅값 감춘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말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기도하다가 성령이 주신 감동으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시련이 올 때 해야 할 두 번째 일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산발랏의 간계를 영적으로 분별한 느헤미야는 그의 초청을 단호히 거절했을 뿐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시련을 만날 때 시련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은 맞대응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에 침묵이 더 효과적일 때가 많습니다.

한 형제가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이웃의 형제가 찾아와 세상의 헛된 공론을 전하고 나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전하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해야 합니까?” 
수도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는 않소.” 
형제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입니까?” 
수도사가 대답했습니다. 
“계속 침묵할 수만 있다면 우리와 이웃을 위해 가장 좋을 일이오.”
때로 침묵은 웅변보다 큰 말입니다. 

대적이 시도 때도 없이 방해할 때, 경쟁자가 있는 말 없는 말 퍼뜨리고 다닐 때, 나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말이 떠돌 때 우리는 따지고 싶고, 항변하고 싶고, 진실을 가리고 싶지만, 그때 침묵할 수 있다면 최고의 영적인 삶입니다. 
내가 침묵하면 하나님이 옥석을 가리십니다. 
침묵은 다만 ‘말 없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내가 침묵하면 하나님이 친히 원수를 갚아 주십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원수 갚으시기 전에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면 좋은 일입니다. 
침묵은 상대방에게 회개할 기회를 줍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비판을 받고 시련을 당할 때 우리가 할 일은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중상모략

이렇게 느헤미야가 산발랏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산발랏은 조금 더 비열한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그것이 중상모략입니다. 
느헤미야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네 번이나 집요하게 초청한 산발랏은 그것이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6절, 7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느헤미야에 대한 악의에 찬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산발랏의 두 번째 작전은 악의에 찬 루머를 퍼뜨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성벽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기 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는 말로, 가스무가 하는 말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스무’는 산발랏의 추종자 아라비아 사람 ‘게셈’입니다. 
산발랏은 사실이 아닌 말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나마 남의 말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열합니까?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느헤미야는 대역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를 말 한 마디로 죽일 수 있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보다 헛소문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상모략은 총 없는 총알입니다. 
근거 없는 말, 사실이 아닌 말, 상대방을 죽이려고 하는 악의에 찬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야고보가 말합니다. 
“........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5-6). 

중상모략은 태우는 불입니다. 
작은 불이 큰 산을 태우듯이 작은 중상모략이 한 사람을 죽이고 태웁니다. 
절대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의 말을 하거나 들을 때 미국 청교도들은 이런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무슨 말을 들을 때 바로 믿지 말고,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무슨 말을 들을 때 직접 당사자에게 확인했는지 물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설령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그 말이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지 물으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남의 말을 자주 하고 들으십니까? 
소위 ‘카더라’식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남의 말은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않는 것을 아예 신앙의 철칙으로 삼으십시오.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이러한 중상모략에도 느헤미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이 되려고 성벽을 건설한다는 중상모략에 “그렇지 않다”고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을 삼자대면하자고 흥분하지도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라고 왜 힘들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9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대신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산발랏으로부터 비열한 중상모략을 당할 때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노는 물이 다릅니다. 
불신자는 세상에서 놀고 성도는 하나님과 놉니다. 
하나님과 노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말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 합심기도입니다.

일본 동경대학원 공학연구과 하타무라 요타로 교수가 <실패를 감추는 사람, 실패를 살리는 사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요타로 교수는 철사의 힘을 통해 합심기도의 위력을 설명합니다. 
철사는 아무리 굵은 것이라도 계속 구부리면 끊어지고 맙니다. 
그 이유는 금속 피로증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금속이 10의 힘을 받으면 100만 번의 움직임을 견디어 냅니다. 
그런데 20의 힘을 받으면 50만 번의 움직임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불과 100번밖에 견디지 못한다고 합니다. 

가해진 힘이 산술적으로가 아닌 기하급수적으로 차이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합심기도의 위력입니다. 
혼자 기도하면 100번 기도하면 될 일을 두 사람이 기도하면 50번 기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섯 번만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의 시너지 때문입니다.
혼자 기도하면 10년 걸릴 것이 둘이 기도하면 5년 걸리는 게 아니라 1년만 기도하면 됩니다. 
합심기도의 시너지 때문입니다. 
합심기도는 위력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1만 시간 기도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도운동의 위력을 가슴 설렘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승리

문제는 그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끝내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 6장 15절을 보십시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언젠가 끝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언젠가 끝납니다. 
언젠가 우리는 승리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끝내 승리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영적 싸움을 계속하겠지만 언젠가 승리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끝내 이긴 것은 기도하는 느헤미야였습니다. 
느헤미야를 괴롭힌 사람들은 그들의 부끄러운 이름만 성경에 남겨 놓았을 뿐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그래서 땅에 사는 성도가 목숨 걸고 믿을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에 승리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최후 승리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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