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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 (마 19:3-9) -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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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 (마 19:3-9)

1. 오늘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려할만한 수준을 넘어 나라의 미래가 걱정스러워 말합니다. 최근 2030세대를 일컬어 ‘삼포세대’라고 합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젊은 층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들 세대의 특징은 돈 없으면 결혼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0세 이상 미혼남녀 34.3%가 ‘내가 삼포세대’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소셜 데이팅 업체 ‘이츄’ - 531명<남 279명, 여 25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성(41.7%)이 남성(27.6%)에 비해 스스로 ‘삼포세대’임을 인정하는 비율이 더 높았다.? ‘삼포세대’ 10명 중 6명이 ‘경제적인 기반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겠다.’(59.5%)라고 답한 것입니다.

특히 여성은 ‘경제력이 없으면 결혼을 포기하겠다.’는 냉담한 반응이 69.8%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이른 바 ‘삼포세대’를 극복하고 결혼에 성공했다 해도 하루 평균 350쌍, 결혼대비 50%가까이 이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부부의 이혼율은 5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보고서에 결혼대비 이혼율이 47.4%라고 밝혔습니다. 80년의 5.9%, 90년의 11.4%에 비해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조만간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국의 51%를 넘어서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혼의 주된 사유로는 성격차이가 1위(45.3%)이고, 경제문제가 2위(16.4%), 그리고 배우자의 부정, 즉 간통으로 인한 이혼율은 7.3%로 4위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급속히 보급되고 있는 인터넷 음란 사이트의 접속이 일상화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간통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혼증가율로 보면, 우리나라가 세계 1위입니다. ‘이혼공화국’이라 해도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배우자의 간통으로 이혼하는 비율이 가장 낮은데 그렇다면 배우자의 간통은 그만큼 적다는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2001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한국 여성의 41%가 간통 경험있는 것으로 보도한 바 있습니다. 유부녀 열명 중 4명이 간통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20~50대 부부를 천만 명으로 잡으면 40%라면 400만명이 간통해봤다는 얘기입니다. 

세계평균의 2배가 넘는 수치라고 합니다. 혹자의 표현대로 가히 ‘간통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쓸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400만명 이상이 간통을 하면서도 간통죄에 걸려 처벌을 받는 사람은 일년에 고작 74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간통죄 존폐여부를 물었더니 ‘폐지해서는 안된다.’, 간통죄를 존속시켜 간통 범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70%이고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23.6%라고 합니다. 

나는 간통을 하지만 내 배우자의 간통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다 추악한 불륜이지만 나는 애틋한 로맨스라는 얘기입니다. 요즈음은 아무리 이혼하지 말라고 강단에서 외치고 개인적으로 간곡하게 권면하는데도 도저히 못살겠다고 하면서 이혼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강단의 고민이라고 합니다. 

또 이혼을 경험한 사람들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다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재혼하겠다는데 목회자가 그것을 어떻게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으며, 또 안 된다고 한들 그것이 먹혀 들어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교회 안에서조차 ‘이혼하면 안 된다.’라고 설교하기가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2.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54:5-7입니다.

(사54:5-7)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젊어서 결혼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를 다시 맞이하듯 여호와께서 너를 다시 부르시고 말씀하시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사랑으로 다시 너를 맞이하겠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나는 네 남편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이스라엘이 남편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음란’, ‘간음’으로 묘사하여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에스겔6:9과 호세아4:12을 보겠습니다. 

(겔6:9) 너희 중 피한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로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호4:12)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대하21:11)

이렇게 음란 여인, 간음한 아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이를 “결혼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통하여 버림받은 아내일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크신 사랑으로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를 다시 맞이하듯 여호와께서 다시 부르십니다. 잠시 버렸으나 큰 사랑으로 다시 맞이하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한 번 결혼한 아내와 결코 이혼하지 않습니다. 아예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를 이사야50:1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 50:1) 나 여호와가 이 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롬8:37-39)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고 말씀하신 하나님 앞에 이혼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범하는 죄악입니다. 


3.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약 한 달 전 유대 지경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던 내용입니다. ‘시험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의 진위를 시험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는 교훈과 말씀, 그리고 행하신 여러 가지 기적 등에서 고소할 거리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말씀과 가르치심,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여러 기적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자 유대 최고 의회기관인 산헤드린이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자칫 기득권 유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까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에서 급히 진상조사단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파견해서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예수를 시험하고 비방하며 모함할 거리를 찾도록 했습니다. 

마땅히 고소할 거리를 찾지 못하면 군중들을 충동질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사역을 훼방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고소할 거리를 찾게 되면 로마 당국에 고소할 술책이었고, 율법적으로 고소할 거리를 찾게 되면 산헤드린 당국에 고소해서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처형하려고 획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고자 할 때마다, ‘예’, ‘아니오’ 또는 ‘가’, ‘불가’를 묻는 방법으로 시험했습니다. ‘예’라고 대답해도, 그리고 ‘아니오’라고 대답해도, 다시 말해 어떻게 대답할지라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애매모호한 문제를 가지고 시험했습니다. 양자택일의 흑백논리의 오류에 쉽게 빠져들도록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으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답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의 시험은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들고 나선 문제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이 말은 ‘무엇이든 이유가 닿기만 하면, 아내와 이혼해도 됩니까?’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당시 유대 사회에 크게 대립되는 두 학파가 있었습니다. ‘힐렐’과 ‘샴마이’였습니다. ‘힐렐’은 율법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는 자유주의자들이었고, ‘샴마이’는 율법을 극단적이며 엄격하게 적용하는 학파였습니다. 그래서 ‘샴마이’학파는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이라는 말씀을 ‘아내의 순결 문제와 같이 남편에게 큰 충격이 되는 일’로 국한 시켰습니다. 그러나 ‘힐렐’학파는 실제 죄이든, 상상속의 범죄이든 모든 종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실제 간음이든 상상속의 음란은 물론, ‘지극히 사소한 잘못’까지도 포함된 일입니다. 

예를 들면, 음식이 상한 일이라든지, 더 이상 애정이 생기지 않는 것, 남편이 자기 아내보다 더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다든지, 실로 남편이 아내와 더 이상 살기 싫어서 꼬투리 잡게 되면 무엇이든 얼마든지 아내는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고자 이혼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힐렐’학파의 주장에 대해 ‘예’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도덕적으로 자유주의자, 성에 대한 개방주의자로 공박할 것이고, 그 반대로 ‘샴마이’파를 지지한다면 ‘죄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행위를 위선’이라고 몰아세워 선전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두 학파의 견해를 모두 따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이혼을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혼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4-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마19:4-6)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신명기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라는 말씀을 이혼의 합법적 근거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創造)하신 것은 그 둘이 한 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상기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자,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라.’는 말씀으로 결혼의 신성함과 영원성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혼은 절대 안된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로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과 생명의 풍성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혼은 축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한 몸이 되게 하시는 제도입니다. 창세기 1:27-28을 보겠습니다. 

(창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달리 말하면, 결혼을 위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결혼을 위해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갈빗대 두 개로 두 여자를 만드신 것이 아닌 것처럼 일부일처제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결혼의 순결성을 담고 여자를 만드셔서 가정을 이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악입니다. 

(말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셔서 아담에게 데려오자 아담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그러므로 남편은 이혼을 생각하기 전에 아내를 두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이 될지라.’는 말씀은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라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데 있어 어떠한 장애 요인도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결혼은 부모 자식과의 관계보다 더 높은 관계로 부르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합하여 한 몸이 될지라.’는 것은 부부란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결합체가 아니라, 영원히 그 무엇으로도 나뉠 수 없는 완전한 합일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결합은 마음(정신)과 영혼, 그리고 육체의 하나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천생연분’, ‘천생배필’입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맺어졌든지, 성격이 어떻게 다르던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는 둘이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람(남자)과 아내를 한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결혼으로 맺어진 신성한 관계를 해치는 이혼은 이유 불문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거역하는 죄악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이혼 불가를 분명히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신명기 24:1 말씀을 들어 다시 한 번 예수께 공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율법주의자에게 있어서 모세는 그들의 최고 가치기준이며, 최고 권위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모세가 말한 것’이라고 하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그 말에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세가 말한 것’을 “옛 사람에게 말한 바”(마5:21-48)로 표현하시므로 ‘모세가 말한 것’이 최고의 가치기준이 되거나 최고의 권위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씀으로 모세에 대해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하며 율법 정신을 왜곡하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러 세상에 오신 분께서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담은 온전한 정신을 깨우치고자 하셨지만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됨을 부정하고 예수를 고소할 거리를 찾고자 한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율법의 온전한 뜻과 그 정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깨우치신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에서 모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시험해서 고소할 함정을 찾고자 해서 모세를 들먹거린 것입니다. 


3. 그래서 예수께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완악하다’는 말은 ‘마음이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결혼법을 지킬만큼 순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심히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살다가 더 젊고 예쁜 여자가 눈에 띄면, 아내를 내쫓기 위해 심하게 학대(虐待)하거나, 살해할 의사까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모세는 그러한 ‘큰 죄악’을 범하면서 남녀가 함께 사느니 차라리 갈라서는 ‘작은 악’을 허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모세는 이혼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묵인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모세가 말한 것’을 결혼과 이혼에 관한 최고의 권위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공박하여 고소할 거리를 찾고자 한 것입니다. 

모세는 결코 이혼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완악하여 부정과 불륜 가운데 타락하여 가는 것을 막아보려는 의도에서 이혼이라는 ‘작은 악’을 잠시 허용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반드시 이혼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닙니다. 이혼은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분명한 죄악입니다. 

따라서 이혼이 성립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기본 입장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이혼은 모세에 의해서 허용된 것이 아니라, 이혼 자체가 이미 사람의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혼은 본래의 하나님의 창조질서(創造秩序),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상태를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혼에 대한 모세의 본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라는 말은 무분별하고 방종하며 집요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문란한 성생활의 지속을 의미합니다. 단 한 번의 잘못된 부정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입니다. 때문에 계속되는 아내의 간통행위는 분명한 이혼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간음 행위를 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신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결혼한 여자가 ‘음행’을 저지른 경우에 받던 죽음의 형벌은 사실상 폐지된 것이고, 이제부터는 이혼함으로써 부부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율법은 결국 이혼은 돌로 쳐죽일만큼 심각한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음행’하는 자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떠한 연고에 의해서도 이혼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찬성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10:11-12을 보겠습니다. 

(막10:11-12)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당시 이혼이란 재혼을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혼을 재혼과 간음으로 연결시켜 다같은 죄악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가기 위해 이혼하는 것이나 여자 다른 남자에게 가기 위해 남편과 이혼하는 것 모두가 다 죄악입니다. 재혼을 위해 이혼하는 것은 그래서 분명한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결혼이 몸과 마음, 영혼의 온전한 결합이라는 면에서 ‘음행’은 분명히 이 결합을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4.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합니다.” 결혼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기 때문에 결혼을 ‘거룩함’(히브리어,‘키두신,kiddushin)으로 말합니다. 이는 결혼을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관계’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의 한 귀부인이 랍비 요세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귀부인은 자기 집에 많은 하인과 하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천지창조는 분명 하나님의 큰 일인데 하나님은 그 다음 무얼하고 계셨는가?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너무 오래 침묵하시거나 일하지 않고 어디 숨어 계시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랍비 요세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커플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바쁘게 일하십니다.’ ‘아니 커플을 만들어 내셨다구요? 그 일은 나도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은 내 밑에 있는 하인들과 하녀들에게 시키면 되는 일이예요’ 그리고 그 다음날 남녀 하인들을 두 줄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람끼리 짝을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은 짝을 지었고, 그때부터 그들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못살겠다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인 마님, 도저히 저 여자하고 못살겠어요. 바꿔주세요.’ ‘주인님, 저 남자하고는 도무지 맞지 않아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 때문에 부인은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귀부인이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그렇구나! 중매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구나. 하나님이나 하시는 일이야!’ 

그래서 탈무드는 말합니다. ‘중매는 하나님에게 홍해를 가르는 일보다 힘들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힘드니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중매쟁이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사람, 아담과 하와를 맺어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일단 사람을 만나게 하면 그들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하늘에 속한 거룩한 일이며 중매는 하나님의 고유한 일입니다. ‘모든 결혼한 부부는 아담과 하와의 결합(結合)의 재현입니다.’(맥네일,A.H. McNeile)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든지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한 가정의 남편과 아내로 부름받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가정, 최상의 커플 가정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여러분 가정에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거룩한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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