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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일의 기쁨 (느 8:8-12, 행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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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의 기쁨 (느 8:8-12, 행 13:52)

로이 레신의 ‘오늘, 내 생애 최고의 날’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을 때 매일 매일이 최고의 날임을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오늘’에 숨겨진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풀어 주는 책입니다. ‘오늘’을 즐겁고 행복해지게 만드는 책입니다. 그 가 말하는 오늘은 최고의 날입니다. 그는 매일 매일을 최고의 날로 만듭니다. 
  
황영태목사님의 선친이신 황용석장로님은 참 훌륭한 장로님이셨습니다. 고아의 아버지셨고 자신의 친자녀들을 고아들과 함께 고아원에서 한 방에 살게 한 분입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따님인 황영태목사님의 누님이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다’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매일 아침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다’를 복창하게 하였습니다. 매일 매일을 생애 최고의 날로 만들었습니다. 매일 매일을 확실하게 좋은 날로 만들며 사신 분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기쁜 날은 어떤 날입니까? 10대 청소년들에게 가장 기쁜 날은 용돈 받는 날이라고 합니다. 젊은 부모에게 가장 기쁜 날은 첫 아기 태어난 날입니다. 젊은 부부에게 가장 기쁜 날은 결혼한 날입니다. 연예인들이 결혼할 때에 인터뷰한 것을 보면 거의 “내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합니다. 

야구선수는 끝내기 홈런 친 날을 가장 기쁜 날이라고 합니다. 김연아선수는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날을 가장 기쁜 날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장 기쁜 날은 생일이라고 합니다. 학생들은 가장 기쁜 날은 졸업식 날이라고 합니다. 또 학생들에게는 좋은 학교에 합격한 날이 가장 기쁜 날이라고 할 것입니다. 로또 당첨된 사람은 그 날이 가장 기쁜 날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새집 이사한 날도 기쁜 날입니다. 각자가 기억하는 생애 최고의 날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장 기쁜 날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에 가장 기쁜 날은 언제일까요? 신앙인에게 가장 기쁜 날은 구원받은 날입니다. 거듭난 날입니다. 세례 받은 날일 것입니다. 그리스인에게는 두 생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태어난 날입니다. 둘째는 세례를 받고 새 이름을 받은 날(named day)입니다. 그런데 그리스인에게 정말 기쁜 날은 세례를 받고 새 이름을 받은 날이라고 합니다. 
  
천국에 가서 베드로에게 어느 날이 가장 기쁜 날이었냐고 물어보세요. 생일이라고 할까요?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난 날이라고 할까요? 확실하게 아닐 것입니다. 제가 확언하건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라고 할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바울에게 어느 날이 가장 기쁜 날이었냐고 물어보세요. 생일이라고 할까요? 가말리엘의 문하에 들어간 날이라고 할까요? 첫 순교자 스데반의 옷을 지키며 돌에 맞는 것을 목격한 날일까요? 확실히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날이라고 할 것이 확실합니다. 
  
유대인에게 유월절이나 초막절 같은 절기는 그들에게 기쁜 날입니다. 그들의 성전에 올라가던 날은 행복한 날입니다. 안식일은 기쁘고 복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성일은 주의 날입니다.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그 날은 주님의 부활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대신 지금의 주일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의 날입니다. 예배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이전에는 주일을 ‘작은 부활절’이라 불렀습니다. 이 날이야 말로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기쁜 날은 성일입니다. 
  
성일은 거룩한 날입니다. 거룩한 날은 구별된 날입니다. 나머지 엿새와는 구별된 다른 날입니다. 카렌 마인즈는 ‘주일을 특별하게’라는 책에서 안식일은 한 주의 정점이며, 사흘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로서 신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사흘은 안식일을 기억하면서 보내어 결혼의 기쁨을 만끽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매일이 주님을 만나는 기쁨의 날이기를 바랍니다. 특히 오늘 같은 성일은 구별된 날이며, 주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주의 날에 성일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의 성일에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9절에는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성일이라고 합니다. 성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분하여 드리는 날입니다. 성일이 하나님의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사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120편에서 134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올라가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하며 흥분과 기쁨과 기대 가운데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특히 122:1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큰 기쁨으로 성전에 올라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133:1에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합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함께 올라가는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슬퍼하면서 이런 노래가 나오겠습니까? 여호와의 성일에, 여호와의 절기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올라갈 때마다 흥분 상태에로 모리아 언덕에 있는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청교도들은 안식일인 주일을 ‘영혼의 장날’이라 불렀습니다. 이 날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유독 더 많은 시간을 내는 특별한 날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교제를 하면서 슬퍼할 수 있습니까? 생각만 해도 그 날은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시간 자체가 기쁜 시간일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십계명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십계명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20:8)고 합니다. 신명기의 십계명에는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신5:12)고 합니다. 랍비들은 ‘기억하다’와 ‘지키다’의 차이점을 강조합니다. 구약적 안식일은 토요일이므로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에는 지나간 안식일을 기억하고 멋진 쉼을 통하여 하루를 돌아보고 기쁨을 누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에는 즐거운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 안식일을 지킬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날이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켜야 할 기쁘고 즐거운 날이 되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성일이란 거룩한 날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구별된 날입니다. 다른 엿새 날과는 달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날과 구별된 의미가 있어야 안식일답습니다. 
  
율법으로는 안식일에 금하신 특정행위가 39가지나 됩니다. 안식일의 금지 조항의 이면에 있는 동기는 경축(celebration)과 관계(relationship)의 여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고, 하나님과 사람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더 기뻐하기 위해서, 더 깊은 관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더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참된 거룩의 뿌리는 규범이나 원칙이나 기준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참되고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열정입니다. 거룩은 율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거룩의 의미입니다. 거룩한 날 즉 성일의 의미가 이런 열정과 기쁨을 가지고 살게 하시는 날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일의 의미는 공간보다는 시간을 누리는데 있다. 우리는 일주일 중 6일 동안 공간에 얽힌 일의 횡포 아래 생활하다가 안식일에는 시간의 거룩함에 적응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일은 시간을 거룩하게 드리는 것이 중요한 의미입니다. 성일이라는 날은 그 자체가 거룩한 날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 자체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성일의 기쁨을 초등학교 때부터 늘 느껴왔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침잠이 적은 저는 주일 아침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는 주일학교 새벽기도회는 주일 아침 6시에 드렸는데 새벽에 동네에 다니면서 친구들을 다 깨워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주일 새벽에 아이들을 깨우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일만 기다려졌습니다. 그 날이, 그 날 새벽이 얼마나 기쁜 시간인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의 관리집사님은 재주꾼입니다. 교회의 구석구석을 잘 고치고 깨끗하게 할 뿐만 아니라 손 솜씨가 있어서 조각을 배우지 않았지만 비누로 조각을 해서 작고 예쁜 조각으로 예수님, 마리아 등을 만들어 교회 곳곳에 전시하기도 합니다. 그 분은 토요일 한 밤중에 교회 청소를 합니다. 

한 번은 목사님이 자정 즈음에 갑자기 교회에 볼 일이 있어 갔더니 집사님이 그 시간에 교회 계단을 물청소를 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왜 이 늦은 시간에 청소를 하느냐고 물어보니 토요일 밤에 모든 교인들이 다 돌아간 다음에 아무도 없을 때에 계단을 깨끗이 물로 청소하고 주일 아침에 교인들이 와서 그 계단을 밟고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자신의 즐거움이고 보람이라고 하더랍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가 느끼는 성일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일을 맞는 즐거움이 충만한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주 오래 전 미국에 있을 때 경험입니다. 여름에 전교인 수련회를 위하여 산 중턱에 있는 수양관에 갔습니다. 수양회 기간 중에 아이들과 함께 수영장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메가폰을 든 남자분이 광고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침례 예식을 하니 잠시만 수영장 밖으로 나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수영장 밖으로 나오고 몇 사람은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5사람을 세례를 베푸는데 한 사람씩 신앙고백을 하고 물속에서 일으키며 “세례를 주노라”라고 하니 온 교우가 함께 “이날은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이 날은 이날은 주의 날일세”라는 찬양을 부릅니다. 교인이 세례를 받는 날이 기쁜 날이라고 함께 찬양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의 성일이 이런 기쁜 날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과 같은 성일에 슬퍼하지 말고 모두 함께 기뻐합시다. 

  
둘째, 여호와의 성일에는 읽어 들려준 말 때문에 기뻐하는 날입니다. 

12절에는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고 합니다. 성일이 기쁜 까닭은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이 기쁨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닿으면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는 말씀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복원합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은 4,600명이었습니다(렘 52:30).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본토에 남아 있던 백성은 약 300만 명가량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300만 명이 본토에 있어도 하지 못하던 일을 아주 적은 무리가 와서 복원합니다. 사람이 많다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의 무리가 이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중심한 한 편은 성전을 복원하고, 에스라를 중심한 다른 한 편은 성벽을 복원하였습니다. 에스라가 율법 책을 낭독하였을 때에 백성들이 깨닫고 울었습니다. 그 때 에스라는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합니다.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성일, 안식일은 먹지 않는 날이 아니라 먹는 날입니다. 말씀을 먼저 먹고 회개한 후에 함께 음식을 먹는 날입니다. 먹고 마실 수 없는 사람에게도 나누어 함께 즐거워하게 하는 날이 성일입니다. 거룩한 날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금식하고 슬퍼하고 웃지 않는 날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참된 거룩과 참된 경건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이란 정적이고 고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참된 경건은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조심하는 것이며,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약 1:26-27). “거룩함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독특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거룩함과 동격으로 비유할 만한 개념이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룩함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북미주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주일 오전 11시에 예배를 위한 모임을 갖습니다. 원래 이 시간은 소젖을 짜는데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정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의 구성원들 중 소를 가진 사람이 더 이상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11시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편견, 선입견, 고집은 참 거룩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 좋지 않은 것을 주시겠습니까? 선과 인자가 기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선과 인자는 기쁨 그 자체입니다. ‘힘’이란 히브리어로 ‘마우제크’인데 산꼭대기 혹은 방파제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든든한 방파제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 일본 홋카이도에 가서 오타루의 어느 호텔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창에서 내려다본 바다의 풍경은 절경이었습니다. 호텔 아래는 요트 주차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방파제가 두 겹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파도가 제법 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파도가 쳐도 요트들이 꿈적도 안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파제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요동치지 않고 잔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의 풍랑을 향해 ‘잔잔하라’ 한마디만 하시면 고요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시며, 산성이시며, 요새이시며 힘이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1번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제1 교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좋지 않은 말씀이 없습니다. 성일에 들려지는 그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혁주의 예배는 말씀이 중심입니다. 성일에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예배에 말씀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말씀 때문에 예배가 예배다운 것입니다. 
  
에드워드 투르나이젠이라는 독일의 신정통주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칼 바르트와 절친한 친구였는데 실천신학자입니다. 그는 목회란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에게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는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사람을 치유하는 상담도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예배는 말씀을 중시하다보니 설교만 들으면 된다는 오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도 설교 전에 들어오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설교만 듣고 나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성일에는 말씀을 들어야 하며 주일예배는 말씀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 안에 성찬이 있고, 말씀 안에 기적이 있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말씀 안에는 온갖 풍성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44에는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라고 합니다. 성일에 모인 것은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되어진 일을 통하여, 52절에는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합니다. 안식일에 되어진 일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성일에 말씀을 듣고 기쁨이 있었다는 등식입니다. 성일에 말씀을 들으면 기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등식입니다. 
  
미국의 걸출한 목회자요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첫째부터 넷째까지 자녀가 주일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기들은 임신 된 요일에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에드워즈를 놀려댔다고 합니다. 거룩하지 못하다고 얼마나 놀림감이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해도 있었지만 거룩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말씀을 받은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찬송가에는 너무 좋은 가사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성일의 말씀 받은 기쁨이 잘 표현된 가사입니다. 

  
결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라는 소설은 영국의 젊은 작가 바질이 아버지의 유산인 광산을 물려받기 위하여 크레타로 가는 길에 희랍인 조르바를 만납니다. 조르바는 기행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질은 조르바를 어떻게 하든지 믿습니다. 조르바는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바질이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함께 춤을 추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춤은 인생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인류 역사에 가장 오래 된 도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춤추는 것을 배워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있는 천사는 너에게서 아무런 기쁨도 찾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일은 구별된 날입니다. 즐겁게 춤을 추는 날입니다. 슬퍼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날입니다. 말씀 가운데 기쁨이 충만한 날입니다. 이 기쁨의 성일을 맞이하여 성일의 기쁨이 충만한 우리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매 주일마다 우리에게 기쁨의 춤이 있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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