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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암 8: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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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암 8:9-13)

아모스 선지자는 다섯 가지 환상을 보았습니다. 황충, 불, 다림줄의 환상에 이어 아모스 8장에는 네 번째 “여름 실과 한 광주리”의 환상이 나옵니다.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암 8:1-2) 

여름 실과 한 광주리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끝이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여름 실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케이츠입니다. 그리고 끝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케츠입니다. 중간에 요드라는 알파벳 하나만 차이가 나는데 결국 “네가 여름 실과(케이츠)를 보느냐? 끝(케츠)이 올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언어의 유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름 실과는 1년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추수하는 것입니다.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여주시면서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심판을 집행할 때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Ⅰ. 심판의 두 가지 형태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인간을 향한 이유가 있고 둘째, 하나님을 향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절대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것을 지켜 행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참으시지만 결국 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단히 사악하고 무자비하며 부정직했습니다.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암 8:4-5) 

아모스서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약한 사람들을 향해 무자비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자비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자비하게 약자를 누르고 핍박하며 착취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주 악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부정직했습니다. 에바라는 곡식을 담아 파는 그릇이 있었는데 이것은 작게 만들고 돈을 받을 때 쓰는 단위인 세겔은 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쌀 한 되에 1원이면 쌀을 담는 그릇은 작게 만들고 돈은 1원 20전으로 더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을 속일 뿐만 아니라 질도 속입니다. 밀을 팔면 순수 밀만 넣어서 팔아야 되는데 거기다 껍데기도 집어넣고 불순물도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런 밀을 잿밀이라고 합니다.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암 8:6) 은을 얼마 빚졌다고 그 사람을 노예로 삼는 등 무자비하며 부정직한 것을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가 저울로 금의 무게를 속여서 판 사실을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시지만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을 속여 더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주목해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고약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죄입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암 8:5) 월삭은 매월 첫째 날을 말합니다. 매월 첫째 날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지난달의 지은 죄를 용서받고 또 앞으로 올 달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를 드리고 그날은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고 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을 기념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일주일에 하루는 쉬는 날입니다. 그날은 쉬어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먹을 양식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월삭과 안식일을 복된 날로 여기지 않고 노동을 못해서 돈 못 버는 날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제사를 드리면서도 “안식일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 것인가?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야 밀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안식일을 귀찮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곡식을 팔아 돈을 벌려고 하는 비즈니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도 얼른 드리고 장사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무슨 액땜하듯이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일예배를 빼먹고 놀러가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한 것입니다. 장사하기 위해서 월삭과 안식일을 싫어했습니다. 
 
물론 비즈니스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존재 목적은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되느냐고 물어보시는 분은 아직 신앙이 성장하지 않았거나 구원을 못 받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로 영혼 속에 느껴질 때 그 사람은 구원받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나는 비즈니스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것은 종이 주인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가만있겠습니까? 주인이 종을 혼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암 8:7)

하나님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서 맹세합니다. 야곱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으니까 믿을 수 없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걸고 저희의 모든 소위 즉, 그들이 행한 짓 모두를 잊지 않고 심판하시겠다고 맹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이 있고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인간은 슬픔(human grief)에 빠지게 됩니다.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암 8:10) 

즐거워야 될 날이 애통하는 날이 되고 기뻐해야 될 날이 슬퍼하는 날이 되며 즐거운 노래가 슬픔의 노래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 시대에 불렀던 노래는 대체로 어둡고 슬픈 단조노래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전부 밝고 빠릅니다. 요즘 아이들은 70년대에 고생하며 슬픔 가운데 불렀던 노래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심판이 와서 힘들고 어려우면 노래가 모두 애가가 되고 슬픔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슬픔이 오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침묵(divine silence)이 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암 8:11-13) 

사람이 빵을 먹고 배가 불러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하면 영혼이 공허해지고 만족감이 없으며 말씀의 기근이 오게 됩니다. 육신적으로 아무리 강하고 아름다워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인간의 영혼은 방황하게 되어있습니다. 방황하고 왜 사는지도 모르니까 술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말씀을 주시지 않는 것도 큰 심판입니다. 


Ⅱ. 말씀의 기근이 오는 형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 신학교도 많으며 말씀을 배울 수 있는 책도 많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녀보면 설교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나라도 많고 교회를 찾아볼 수 없는 이슬람 국가들도 많습니다. 자유롭게 말씀을 듣고 읽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 속에서도 말씀의 기근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말씀의 기근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이 조각조각 편집해 놓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고등비평입니다. 이 고등비평에 관하여 미국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원의 J.J.Reeve 교수가 글을 썼습니다. 

제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글을 다 읽었는데 “My Personal Experience with Higher Criticism”(고등비평과의 개인적인 만남)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고등비평의 전제는 진화론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들고 있는 성경은 완성되지 않은 덜떨어진 책이고 앞으로 더 좋은 말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덜떨어진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그들의 영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신격화해서 인간의 이성과 맞지 않는 것은 성경에서 빼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절대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J.J.Reeve 교수가 말하기를 고등비평은 인간의 지적인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진화과정 중에 있는 덜떨어진 말씀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말씀을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설교하면 교회가 부흥이 안 되고 목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신뢰성을 공격하는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하와를 유혹할 때도 그 배후에 사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고등비평은 아주 매력적인 방법인 것 같지만 거기에 빠져서 유럽과 영국 교회들이 무너졌습니다. 미국과 한국 교회도 점차 그런 방식으로 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성경 66권 모두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고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의식주의나 미신에 이끌리면 말씀의 기근을 겪게 됩니다. 의식주의란 예배를 드리는데 종을 울리거나 향을 피우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을 입으며 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뿌리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염주를 돌리는 것도 혈액순환을 위해서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지만 종교적인 목적으로 하면 의식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식주의와 미신이 언제, 어떻게 들어왔느냐? 이것은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넘어가면서 대제사장들이 행하던 의식이 교회에 잘못 유입된 영향도 있지만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하면서 이방종교의 의식들이 대거 들어오게 됩니다. 의식주의나 미신이 들어와서 자리 잡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변두리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교회들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계적이고 성실한 강해를 하지 않으면 말씀의 기근을 겪게 됩니다. 20세기에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급박한 것처럼 사람을 몰아붙여 현실도피적인 망상에 빠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빚을 진 사람들도 예수님만 오시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되니까 예수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 복음주의 교회들이 엔터테인먼트화 되어갑니다. 목사님들이 가끔 웃기는 이야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조는 분들이 계시니까 다시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그것이 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꾸 웃기는 이야기만 하면 설교의 제목과 본문도 기억 못하고 웃기는 이야기만 기억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배가 엔터테인먼트화 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해가 주변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말씀의 기갈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한창 말씀이 풍성했던 곳은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입니다. 소아시아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터툴리안이나 키프리안과 같은 위대한 교부들을 낳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보면 그 자리에 돌무더기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Ⅲ. 말씀의 기근이 온 증세들 

그렇다면 교회가 말씀의 기근을 겪으면 어떤 증세들이 나타나고 우리 영혼이 말씀의 기근을 겪으면 어떤 증세들이 나타납니까? 
 
먼저 교회가 말씀의 기근을 겪으면 예배 중에 하나님의 임재감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힘을 다해 설교해도 성령의 권능이 동행하질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모여 주의 만찬을 시행해도 안으로는 아무런 반성이 없습니다. 
 
성도의 영혼이 말씀의 기근을 겪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나 배고픔이 없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아도 오랫동안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마음의 진지한 반응이 없어집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던 그런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건 목사님이 설교를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설교를 해도 어떤 사람은 가슴이 막 뜨거워지는데 어떤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뜨거운 감동도 사라지고 예배를 빼먹어도 영적으로 손해 보는 느낌이 없어집니다. 예배를 빼먹으면 오히려 수지맞았다고 생각하지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제가 이명박 대통령의 전기를 읽었는데 시골에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해서 고려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매일 데모만 하니까 자기가 학생회장이 되어서 데모를 단기간 내 집중적으로 하고 나머지는 공부를 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고 데모를 하다가 그만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면회를 오셨는데 그때가 어머니를 본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두 가지를 물어보셨는데 첫째, 감옥 속에서도 성경을 읽고 있는가? 둘째, 감옥 속에서도 기도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두 가지를 물어보시더니 어젯밤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너를 큰 인물로 쓰시겠다고 하셨다는 말씀을 하시고는 가셨다는 것입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혔으니 얼마나 절망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어머니께서 전해주신 너는 이 나라의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니까 용기가 나고 힘이 났다고 합니다. 결국 감옥에서 나와 대통령이 되지 않았습니까?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20) 사람이 위경에 빠져도 하나님께서 말씀 하나만 보내시면 건짐을 받습니다. 사람이 사업이 망하고 죽을 위기에 처해도 기도하다 하나님께 말씀 하나만 받으면 일어서게 됩니다. 제가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와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하나님께서 제 꿈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받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말씀대로 다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신다는 것은 우리 삶 가운데 위대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려도 너는 정녕 살고 죽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보내시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보내셔서 위경에서 건져달라는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왜 나는 기도해도 말씀을 보내주시지 않느냐?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인간에게 무자비하고 부정직하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주일이 되면 왜 이렇게 주일이 빨리 돌아 오냐며 불평하고 교회에 와서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 보시고 말씀을 보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위경에서 건지시는 위대한 말씀의 능력을 체험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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