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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마 18: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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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마 18:5-14)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현시대를 가리켜 ‘가치관의 혼돈 시대’ 혹은 ‘가치관이 전도된 시대’ 또는 ‘가치관을 상실한 시대’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변화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부터 하늘나라의 가치관, 주님의 가치관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은 후에도 가치관의 변화가 전혀 없는 성도는, 결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수난 예고를 두 번씩이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에만 사로잡혀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군인이며 정치인으로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미국 역사상 최고의 군대 지도자 출신으로, 선거인의 절대 다수의 지지를 얻어 당선한 미국 역사상 유일한 대통령입니다. 어느 여름날 홍수가 범람하자 군대에서 제대한 워싱턴은 민간인 신분이므로 민간인 복장을 하고 냇가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육군중령의 계급장을 단 군인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노인, 미안합니다만 제가 군화를 벗기가 어려워서 그런데요. 저를 좀 업어서 냇물을 건너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워싱턴은 “뭐, 그렇게 하시구려!” 하고서, 그를 등에 업고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등에 업힌 중령이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께서는 군대에 다녀오셨나요?” “네, 다녀왔지요.” “사병이셨습니까?” “장교였습니다.” “그러면 위관급(尉官級)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지요.” “아니 그러면 소령이었나 보네요.” “조금 더 위였지요.” “그럼 중령이셨군요.” “조금 더 위였지요.” “아니 대령이셨단 말씀이십니까?” 중령의 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위였지요.” “아니 그럼 장군이셨네요.” 그러면서 절망적인 소리로 “노인어른, 저를 여기서 내려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이 말했습니다. “냇물을 건너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소. 조금 더 업혀 있어요. 내가 건네 드리리다.” 체념한 듯 중령이 말했습니다. “노인께서는 그럼 준장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지요.” “혹시 중장이셨나요?” “조금 더 위였지요.” “그럼 최고의 계급인 대장이셨단 말씀이신가요?” “조금 더 위였지요.” 드디어 냇가를 다 건너게 되자, 워싱턴이 중령을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혼비백산한 그는 자신을 업어 준 그 텁수룩한 노인이, 미합중국의 유일한 오성장군(五星將軍)인 ‘조지 워싱턴’임을 그제야 알아보고는, 땅에 주저앉아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워싱턴 대통령이 대단히 겸손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얼마만큼 자신을 낮추셨는지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고, 마침내는 무덤에까지 내려가신 것은, 가히 겸손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 가장 비천하고 낮아지게 되신 주님을 가리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교만하지 말 것이며,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좇아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크신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5절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란 문자 그대로 나이가 어린아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특별히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이 마음에 깊이 새겨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 직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더욱 충성하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뉴 호프 커뮤니티 교회의 데일 갤러웨이 목사님의 간증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항상 왕따를 당하는 주일학생 ‘테디 스톨라드’가 있었습니다. 멍한 얼굴에 가까이 가면 심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테디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여교사 톰슨 선생님은 테디의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테디의 생활기록부를 찾아보았습니다. 1학년 당시 기록은 이러했습니다. “착한 아이입니다. 미래가 보입니다. 

그러나 가정환경이 불우한 편입니다.” 2학년 때 기록은 “조용한 아이입니다. 조금 폐쇄적입니다. 어머니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3학년 때의 기록을 보니 “학업 성취도가 떨어집니다. 금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4학년 테디에 대한 기록입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가출했고 현재 이모님이 양육하고 있습니다. 학대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톰슨 선생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마치 한 생명이 자신을 비롯한 교육자들의 방관과 유기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듯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톰슨 선생님은 테디에게 교사로서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톰슨 선생님은 방과 후에 개인적으로 테디의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성탄절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은 일일이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았습니다. 테디 차례가 되어 테디의 선물을 열었더니, 그 안에는 가짜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손때가 묻은 쓰다 만 싸구려 향수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테디의 선물을 보고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그때 톰슨 선생님은 많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 목걸이를 직접 목에 걸면서 “예쁘지 않니? 나는 이런 목걸이가 제일 좋더라.” 그리고 향수를 뿌리면서 “나는 이 향수를 가장 좋아해. 테디, 고마워. 최고의 성탄절 선물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어느 새 비웃음이 사라졌습니다. 테디는 톰슨 선생님의 품에 안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 목걸이는 생전에 엄마가 하시던 목걸이예요. 향수도 엄마가 뿌리던 향수예요. 그 향수를 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한테 엄마 냄새가 나서 좋아요.” 

그 일이 있은 후 6-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한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테디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사랑하는 톰슨 선생님, 고등학교 졸업 소식을 선생님께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어요. 저,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습니다.” 다시 4년 뒤 또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사랑하는 톰슨 선생님, 저 학과 수석으로 대학 졸업했습니다.” 다시 4년 뒤 또 한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톰슨 선생님, 제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멋지죠? 그리고 이제 결혼합니다. 제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아시죠? 결혼식 때 선생님께서 제 어머니 자리에 앉아주세요. 선생님은 저에게 어머니이십니다.” 사려 깊고 따뜻한 선생님의 배려가, 한 어린이의 운명을 이처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란 문자 그대로 나이가 어린아이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나이와 관계없이 가난하고 병든 자, 고아와 과부, 장애인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6절에서 ‘어린아이’ 대신 ‘작은 자’라고 말씀한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기를 원하시며,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와 같은 자들을 돕고 따듯한 마음으로 보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거지 나사로를 가리켜,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날마다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라고 의미 깊은 말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작은 자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실족하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이는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연자 맷돌’은 나귀에게 매어 돌리는 큰 맷돌을 말합니다. 큰 맷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은, 고대 사형법의 하나로 아버지를 죽인 원수, 공공의 안녕을 파괴한 자를 죽일 때 이러한 형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여기 ‘실족하게 하는 일’ 이란 말을 새 번역에서는 ‘죄를 짓게 하는 일’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란, 세상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미약한 자들과, 아직 어린 신앙을 가진 성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소위 신앙의 선배임을 자처하는 먼저 믿은 자들로 인해, 이런 사람들이 믿음에 상처를 입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떠나는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믿음에 상처를 입으면 교회를 떠나게 되기 쉽고, 이는 곧 그 영혼으로 하여금 망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성도가 그런 죄를 지을 바에야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영원한 지옥 형벌로 떨어지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유로도 연약한 성도의 믿음에 상처를 주어, 교회를 떠나게 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8-9절에서도 주님께서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가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역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의 지체가 우리로 범죄 하게 하면 ‘찍어 내버리라’ ‘빼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손과 두 발 또는 두 눈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우리가 범죄 하면 손과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그렇게 하면, 지체가 성한 사람이 없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목숨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손과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버리는 결단으로, 작은 자 곧 미약한 성도를 실족하게 하는 범죄를 포함한 모든 범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끊어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서 다시 한 번 지옥의 실재성과, 지옥의 형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안식교 같은 이단에서는 지옥 같은 건 없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곳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신자들이나 악한 자의 영혼은 죽을 때 완전히 사멸해버린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멸절되지 않으며,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진 심판과 저주의 삶이냐, 아니면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기쁨과 참 생명의 영원한 삶이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교도들의 주장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한 인본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안식교도들보다는 예수님이 더 사랑이 많으신 분이요, 또한 예수님께서 지옥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 중의 작은 자, 곧 아무리 미약하고 미미한 신자라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이유를 10절에서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우리가 다른 연약한 성도를 무시하고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수호천사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면서 그들을 수종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도 각 개인에게 다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호천사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지만,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성도 각 개인에게 수호천사가 있어서, 그들을 보호하며 수종들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히 1:14절에도 보면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성도는 세상에 대해 담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천사들이 지켜주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한, 세상이 어찌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함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성도 특히 사회적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멸시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호천사를 보내어 성도 각 개인을 보호하시며 또한 수종들게 하셨다는 것은, 성도 개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위하시는지 잘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회적으로 미약하고 미미하다고 하여 멸시하고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런 성도를 멸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그를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작은 자 곧 미미하고 연약한 신자라도, 멸시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한 영혼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양 백 마리 중의 한 마리는, 아흔아홉 마리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에게는 한 마리 양도 소중하였듯이, 우리 주님께는 아무리 주목받지 못하는 작고 미미한 자라도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즉 이 비유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버려진 작은 자 하나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를 위해서 노력하는 법입니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영혼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우리의 고백은 진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관심, 성도의 관심은 여기에 있어야만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열심을 다하는 살아 있는 교회, 생명을 살리고 건져내는 교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1904년 영국의 왕 에드워드 7세가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뿌드를 버킹엄 궁전으로 초대했습니다.30년간이나 박해받았던 윌리엄 뿌드는 왕으로부터 칭송을 들었습니다. “뿌드 장군, 당신은 정말 훌륭한 일을 했소. 위대하오. 수 십 년의 박해와 고난을 극복한 장군께 경의를 표하오.” 왕은 뿌드에게 방명록을 쓰게 했습니다. 그러자 75세 된 노인은 펜을 들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폐하, 어떤 이의 야망은 예술, 어떤 이의 야망은 명성, 어떤 이의 야망은 돈, 저의 야망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다음은 어느 전도자의 기도입니다. <한때 나는 장엄한 예배당에서/위엄 있는 모습의 멋있는/설교자이고 싶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한 영혼을 사랑하여/눈물로 외치는 거리의 전도자이고 싶습니다./한때 나는 풍성한 헌금으로/구제와 선교에 힘쓰는/덕망 있는 목사이고 싶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한 영혼을 사랑하여/저들을 찾아가는 세상속의 목사이고 싶습니다./한때 나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쌓여/존경받는 모습으로/좋은 목회자이고 싶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한 영혼을 사랑하여/말없이 썩어지는 섬김의 종이고 싶습니다./

그 어느 날/내 끓는 피가 식어가고 뛰던 심장이 멈추는 날/“한 영혼 때문에 울고, 한 영혼 때문에 거리를 헤매고, 한 영혼 때문에 외치던 거리의 전도자 아무개 천국 입성하다.” 그런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영혼입니다. 예수를 전해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바라옵기는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 모두의 관심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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