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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의 회복탄력성(1) : 두려움의 극복 (시 4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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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회복탄력성(1) : 두려움의 극복 (시 46:1-11)

이번 주 신문에서 앞날이 창창했던 대조적인 두 젊은이의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한 젊은이는 이번 해병대 총기 사건의 공범으로 구속된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선교사를 꿈꾸고 신학대학에 진학한 학생이었습니다. 중동 시리아에 선교활동을 갈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서 뜻하지 않는 역경을 만났습니다. 그의 선임병은 "병장은 하나님과 동급"이라며 성경책에 불을 붙였다고 합니다. 신체 특정 부위를 훼손하겠다면서 전투복 지퍼 부위에 '에프킬러'를 잔뜩 뿌린 뒤 불을 붙이기도 했답니다. 자신의 목과 얼굴에 '안티푸라민'을 바르고는 씻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뜻하지 않는 위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는 가혹행위를 끝내 견디지 못해 총기 사고를 일으킨 상병에게 "휴가 때 사고치고 탈영하자"는 대화를 나눴고 사건 당일 소주 1병을 마신 김 상병과 함께 범행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 젊은이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2008년 국제요리경연대회 금메달, 2009년 세계요리전시대회 금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대학에 다니던 그녀 역시 뜻하지 않은 역경을 만난 것입니다. 외동딸인 자신을 끔찍이 아끼던 아빠가 급성 간경화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24시간 안에 간을 이식받지 못하면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답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아버지에게 자기 간의 70%를 드렸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수술비를 대느라 7000만원의 빚을 졌답니다. 용접 일을 하며 가족을 어렵게 부양해 온 아빠 대신 그녀가 가장이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등록금을 돌려받아 어렵사리 180만원을 마련해 16년 된 0.5t 트럭을 샀답니다. 폐차 직전 트럭으로 '이동식 커피점'을 시작한 것입니다. '커피 노점상'이라 구청 단속 직원들에게도 쫓겨 다녔답니다. 그런데 그녀의 사연이 '싸이월드'를 통해 네티즌들에게 퍼졌고 네티즌들이 건물 임대료와 설비비를 지원해 줘 카페점을 만들어 하루 수익 10만원을 올리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입니다. 역경을 만났습니다. 뜻하지 않은 위기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차이일까요? 뭐가 이들을 이렇게 역경에 대하여 다른 태도를 나타내게 했을까요? 이런 경우 에미 워너 교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의 문제라고 진단하였습니다. 

회복탄력성란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일컫는 말로, 심리학에서는 주로 시련이나 고난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을 의미하는 말로 쓰입니다. 어떤 문제가 다가와도 포기하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일어서는 회복 탄력성이 있어야 인생은 성공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복탄력성 지수(RQ)가 높을수록 역경을 잘 이겨낸다고 합니다. 

이 회복탄력성이 높으려면 자기 조절능력(감정조절력 충동 통제력 원인분석력), 대인관계 능력(소통능력 공감능력 자아확장력), 긍정성(자아 낙관성 생활만족도 감사하기)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 자기 조절 능력은 감정 조절력, 충동통제력, 원인 분석력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당할 때 자기 조절 능력이 없으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회피해 버리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는 위기 앞에서 자기 조절 능력을 상실하고 두려워하며 인생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한 젊은이는 위기 앞에서 자기 조절 능력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당당하게 극복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두려움 앞에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회복한 히스기야 왕 때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나라가 잘 되어가던 어느날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18만 5천명이라는 아주 큰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 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잔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환란을 만난 것입니다.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역경을 만난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2-3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진다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솟아나 뛰논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쓰나미가 다가 온 것입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위기 앞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두려움 앞에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성에 있는 은과 금을 다 주고 그것도 모자라 여호와의 성전의 문의 금과 기둥의 금도 벗겨 바쳤습니다. 히스기야가 두려움에 빠지니까 그렇게 담대하던 사람이 겁쟁이가 된 것입니다. 성전의 금까지 뇌물로 바치는 비겁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그것도 거절을 당했습니다. 나이 25세에 왕이 되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모든 산당을 제거해 버리고, 아무도 없애지 못했던 놋뱀까지 담배하게 깨뜨려 버린 용감한 왕입니다(왕하18장). 

아버지 아하스 왕의 악한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버렸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치했던 왕이 무려 42명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은 다윗과 히스기야 밖에는 없었습니다. 담대한 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성경은 소개할 정도로 신앙이 좋은 왕이었습니다. 

앗수르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을 점령했어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앗수르를 섬기지 않는 담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앗수르의 산헤립왕이 처들어와 포위하고 있으니 두려움에 질식되어 버렸습니다. 그 두려움으로 자기 조절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어려움이 다가 오자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평소에는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군에 가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자존심 상한 일을 당하니까 한 순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믿음 생활 잘 하던 사람같이 보였는데 사업에 어려움이 오고, 몸에 이상이 오고, 전혀 뜻하지 않는 고난을 당하니까 한 순간에 처절하게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회복탄력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인간적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온갖 꾀를 다 내어 보았습니다. 뇌물도 써보고, 신앙도 팔아먹고, 힘 있는 사람 의지해 보기도 하고 갖은 방법을 다 써보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죽지 않을까?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리지 않을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두려움입니다. 이 긍정적인 두려움은 우리의 삶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긍정적인 두려움은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 줍니다. 어두운 밤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럴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면 빨리 사람이 많은 곳으로 밝은 곳으로 피하여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을 추구하게 합니다. 

얇은 얼음 위를 걷기 두려워하는 것, 병과 사고를 두려워하여 의료보험을 드는 것은 믿음의 결핍이 아니라 미리 주의하게 하는 지혜를 줍니다. 위험한 동물을 만났을 때, 시험 볼 때, 연설하려 할 때 겪게 되는 정상적인 두려움은 사람을 좀 더 각성하거나 예민해지게 하여 직면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잘 해결해 나가도록 합니다. 합리적이며 유익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건전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자동차 사고를 두려워 할 줄 알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비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음식을 적당히 먹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됩니다.

둘째는 부정적인 두려움입니다. 앗수르왕 산헤립 앞에 처해 있는 히스기야왕 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입니다. 필연적으로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 전쟁에서 지면 생명을 빼앗길 뿐 아니라 재산 상의 손실은 물론 온 국민이 노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반드시 이겨야 사명이 주어져있습니다. 이겨야 행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싸우려고 하지 않고 벌벌 떨고만 있는 것입니다. 위기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게 합니다. 


이 부정적인 두려움은 네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첫째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두려움이란 괴물은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잠재력을 쓸 기회를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나폴레옹 힐은 "공포는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하고, 모든 상상을 파괴하며, 모든 자신감을 꺾어 버리고, 모든 열성을 지워버리며, 모든 의욕을 없애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과 불행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직 심리학 박사인 앨런 다운스는 [리더여, 두려움을 극복하라]라는 책에서 인생 성공의 핵심이 바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능을 개발하는데 가장 커다란 적이 바로 공포 즉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그 재능의 극대화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재능의 숨통을 죄고 있는 공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비난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피해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셋째는 우리의 행복을 방해합니다. 두려움은 대인 공포증, 광장공포증, 고소공포증, 질환공포증, 죽음공포증 등과 같은 심각한 만성 공포증 환자가 되어 버립니다. 워즈워드는 "두려움은 수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힌다." 라고 했습니다. 세네카라는 사람은「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행복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넷째는 우리의 성공을 방해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린다 새퍼딘은 "두려움이 나를 망친다"라는 책에서 두려움은 사람을 수동적이고 소심하게 하고, 늘 경계심을 품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자신이 없게 만들고, 매사에 비판적이게 하여 자신을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두려워하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였습니다.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세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왕하19:6-7)”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리 조롱하여도 조금도 겁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네 걱정을 내가 대신하겠다는 것입니다. 산헤립은 곧 고향으로 돌아가서 칼에 맞아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결국 이사야의 예언처럼 승리한 후 기록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위기와 역경을 당했을 때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인간관계를 파괴해 버리고,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성공을 방해하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회복 탄력성을 약화시키는 두려움을 어떻게 우리가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1절을 우리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밑줄을 그어 보시기 바랍니다. 7절 하반절에도 나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11절 하반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방점을 찍어 오늘 우리 성도님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위기를 당할 때 피할 곳이 없다고 단정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타지에서 험한 세월을 살며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어서 결국 바로 앞에 가 열두 아들을 통하여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어떤 위기와 역경을 만난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평소도 중요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평소에는 하나님이 피난처인 사실을 알았지만 위기를 당하자 피난처를 돈으로 삼습니다. 돈을 바치면 문제가 해결될 줄 알고 성전 기둥의 금까지 떼어 바쳤습니다. 인간을 피난처로 삼고 애굽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충고를 듣고 그들이 조롱하는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함으로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피난처라는 말은 대피소와 같은 것입니다. 적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견고한 요새 바위동굴, 안전한 은신처, 외부의 어떤 공격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소가 피난처입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피하는 도피성과 같은 곳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위기와 역경을 당한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업이 흔들려도, 건강이 위협이 찾아와도, 미래가 불투명해도, 앞날이 캄캄해도, 돈이 없어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재해가 다가온다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안전한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위르겐 횔러는 늑대를 만났을 때의 비유를 들어 '두려움의 상대성'을 설명하였습니다. 혼자 숲 속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100미터 앞에 굶주린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만약 이때 느낀 두려움의 정도를 1부터 10까지 중에서 책정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10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손에 칼이나 창이 있다면 9정도로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옆에 동행자가 있다면 두려움의 정도는 5나 6정도로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여섯 명이 똑같이 무장하고 있다면? 혹은 손에 창 대신에 총이 들려 있다면? 바로 옆에 나를 이런 위험에서 탈출하게 도와줄 오토바이나 자동차가 있다면?뭔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 많다면 두려움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방어 수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정도는 그에 비례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방어 수단을 주었습니까?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19:26)"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확신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2.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신 것을 믿고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피난처만 되신 것이 아닙니다. 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위기와 역경을 당하면 왜 두려워하며 주어진 일을 하지 못하고 포기해 버립니까? 자신에게 그 위기와 역경을 극복할 만한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위기와 역경을 당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혜로 힘을 삼았습니다. 그 지혜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애굽으로 역경을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사야의 충고를 듣고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가 힘이 되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의지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서 큰 도움을 주십니다. 

4절 보십시오. 시냇물이 흘러들어 옵니다. 포위되어 먹을 물이 없는 사람들에게 해갈의 기쁨을 줍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금이 막힌 사람들에게 자금 줄이 열리는 것입니다. 피가 막힌 사람들에게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막힌 사람들에게 관계의 터널이 뚫리는 것입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성전의 금까지 뜯어 조공하였는데 지존하신 하나님의 성소를 기쁘게 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의지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성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집에 계시매 우리 집이 위태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계시매 교회가 평안해집니다. 하나님이 내 사업터에 계시매 사업이 안정됩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시간입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들어오는 시간, 사람들이 잠자고 있는 시간 그 새벽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하던 날 그 밤에 여호와의 천사가 앗수르 군대의 진지 앞으로 내려와서 18만 5천명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왕하19:35).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통 사방에 시체로 가득찼습니다. 6절은 바로 그 상황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앗수르 같은 최강의 나라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힘 앞에 당시 패권국의 힘도 무기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 앞에 흔들리지 않고 버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힘 앞에 다 녹아 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힘 앞에 우리를 둘러싼 원수 마귀 사탄의 힘도 무기력한 것입니다. 실존주의 자들은 두려움은 "뒤탈-가능성"의 "뚜렷함"에 대한 기분이라고 말합니다. "뒤탈의 불가능성의 사실"이 뚜렷해진다면, 두려움은 사그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미리 예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예측 능력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 예측 능력으로 미리 실패할 것이라고 잘 못될 것이라고 예단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수술을 예약해 놓은 환자가 이 수술로 잘못될 것이고 생각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수술을 통하여 건강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수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단해 버리면 그 좋은 재능이 있다하여도 두려움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들은 강한 파도를 기다립니다. 연을 날리는 아이들은 바람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날 때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함으로 나아가려면 그 일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회로 주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여호와를 힘입고 담대하게 나가는 다윗을 보십시오. 왕도, 당대의 유명한 장군도 다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삼상 17:46)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7)” 

다윗이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나아가니까 짐승 쫓는 물매돌이 나라를 살리는 위대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능력 없다고 돈이 없다고 재능이 없다고 학력이 없다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이 되신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면 우리의 작은 돌맹이로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도망자 모세였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니까 그 막대기로 홍해를 가르고 바위에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도구가 문제가 아닙니다. 재능이 문제가 아닙니다. 실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것 평소에 간직한 것 하나님께 붙들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광야에서 양을 모는 지팡이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림 받으니까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나타냅니다. 물을 펑펑 쏟아 내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초기 낭만파를 대표하는 유대계인 독일의 작곡가 연주가로서 유명한 멘델스죤(Felix Mendelssohn, 1809-47)이 유럽에서 최상의 올갠의 하나를 가진 예배당을 방문한 일이 있었답니다. 그는 잠시 동안 올갠의 연주에 귀를 귀울이고 있다가, 올갠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올개니스트에게 자기에게도 한번 탈 수 있도록 부탁했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니까요. 어디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올갠을 타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대 음악가는 끈질기게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얻어 냈답니다. 멘델스죤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달리고, 발은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 때 예배당에는 올개니스트가 지금까지 들은 일이 없는 굉장한 멜로디로 가득 찼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올개니스트는 멘델스죤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음악의 거장은 조용히 대답했답니다. "멘델스죤입니다." 그때 그 올개니스트는 "멘델스죤! 멘델스죤에게 이 올갠을 타지 못하게 하려 하다니. 아, 이 늙은 나는 얼마나 멍청이인가?"라고 말했답니다. 재능이 없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필립 부룩스의 말처럼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능력에 맞는 일 구하지 않고 일에 맞는 능력 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힘을 체험한 다윗은 어떤 고백을 합니까?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 18:1)”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7절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분리되어 홀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을 연구한 미실딘 박사는 인간의 두려움은 영아기의 3대 기초적 두려움의 연장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떨어지는 두려움(Fear of falling) 둘째, 큰소리에 대한 두려움(Fear of loud noise) 셋째, 버려지는 두려움(Fear of being abandoned)이 영아기 3대 기초적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분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녁에 홀로 산 길을 걸어가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일찍 아이들을 홀로 잠자게 하지 않으면 초등학교 다니는데도 두려워 홀로 자지 못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분리의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처음 두려워한 것은 아담입니다. 죄짓고 두려워 도망간 아담이 하나님께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0)"라고 고백합니다. 

요나도 죄를 짓고 도망가 두려워합니다. 베드로도 죄짓고 도망하여 두려워합니다. 분리 공포입니다. 떨어지는 두려움, 버려지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받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경우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역경을 당하고 위기를 당하면 떠나 버립니다. 친구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심지어는 아내도 버립니다. 욥이 위기를 당하니까 아내까지 욥을 버립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아들에게 배신당하고 위기를 당하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다윗을 외면합니다.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렸습니다(삼하16:13). 

바울이 노년에 감옥에 갇혀 어려움을 당하자 바울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잘 믿고 의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위기를 당하자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성전의 기둥의 금까지 떼어 조공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애굽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기보다는 인간적 방법으로 협상을 하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듯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떠나지 않습니다. 끝까지 히스기야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히스기야와 함께 하셔서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입니다. 땅을 황무하게 하였다는 것은 시적인 표현으로 깜짝 놀랄 일, 놀라운 일을 베풀었는데 그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산헤립을 죽게 하고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같은 그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9절 보십시오. 전쟁을 끝내 버린 것입니다. 확을 꺾어 버리고, 창을 끊어버리고 수레를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것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고 말씀합니다. 뭇 나라 중에 높임을 받으실 분이시고, 세계 중에 높임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조롱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통해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도 두려움으로 낙심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결국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건강할 때도, 질병에 걸려 있을 때도, 부도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수술을 받을 때도, 성공했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는 야곱에게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말씀합니다. 야곱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쫓기며 두려워하시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가 죽고 모세 대신 민족을 인도하여 가난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라고 말씀합니다. 

주어진 큰 과업을 놓고 두려워 망설이는 분이 있습니까? 여호수아의 하나님의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는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보장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확실한 목표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다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신 31:8)"

광야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말씀합니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신 1:33)"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바로 왕에게서 나왔을 때 바로가 마음 바꾸어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애굽의 모든 전차를 동원하고 군인들을 거느리고 추격합니다.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습니다. 백성들을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움과 공포에 쌓여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의 입술을 통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홍해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움의 늪에 갇혀 절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앞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모세의 앞길을, 여호수아의 앞길을, 야곱의 앞길을, 요셉의 앞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만족할 수 있도록 인도할 줄 믿습니다. 

1955년부터 에미 워너와 루쓰 스미쓰 교수팀은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하기 그지없는 하와이의 어느 한 섬인 카우아이에서 그 해에 태어난 아이 833명 모두를 30년 넘게 추적 조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이 가정불화, 이혼, 알코올 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시달렸답니다. 3분의 2 가량의 아이들이 이러한 열악한 환경의 희생자가 되어 일찍부터 학습부진에 시달렸으며, 약물중독에 빠지거나 정신질환을 앓았고, 범죄에 빠지거나 사회부적응자가 되었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에는 많은 아이들이 전과자나 미혼모가 되었답니다. 

심리학자 에미 워너 교수는 그중에서도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201명을 추려 성장 과정을 분석했답니다. ‘고위험군’이라고 불린 아이들 중 3분의 1인 72명이 밝고 건강한 청년으로 문제없이 성장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밝고 긍정적이고 건강한 청년으로 자란 것입니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떤 요인들이 아이들을 지켜주는가를 알기 위해 그 후 10년을 더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제대로 성장해 나가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에게는 예외 없이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주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한 명이 어머니나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고모, 삼촌, 학교 선생님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고 가까이서 지켜봐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며 기댈 언덕이 되어줄 어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었던 아이들은 역경을 이기는 내면의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높더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도 홀로가 아닙니다. 홀로라고 생각하며 두려움의 늪에 갇혀서는 안됩니다. 문제 앞에 두려워 떨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승리하여야 하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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