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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 위에서 주를 뵙다 (신 1: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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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주를 뵙다 (신 1:29-33)


[그 때에 내가 당신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을 무서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시오. 당신들 앞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시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들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신 것과 같이, 이제도 당신들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오. 또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는 것과 같이, 당신들이 이곳에 이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당신들을 돌보아 주시는 것을, 광야에서 직접 보았소.’ 그런데도 당신들은 아직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진 칠 곳을 찾아 주시려고 당신들 앞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셨는데도, 그리고 당신들이 갈 길을 보여 주시려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는데도, 당신들은 아직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 순례자를 그리워하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직 본격적인 무더위는 찾아오지 않았는데 벌써 내일이면 입추立秋입니다. 음력 7월을 맹추孟秋라고 합니다. ‘뭐든 잘 잊어버리는 흐리멍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초가을이라는 뜻입니다.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이제 초가을이 시작되는 겁니다. 며칠 전 한 지인으로부터 책 몇 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제가 늘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의 책들이었는데, 그중에 스페인 북부에 있는 순례길 ‘산티아고’를 걸은 어느 사진작가의 기행문도 한 권 있었습니다. 

하루에 20-30km씩 근 40여 일을 걸으며 저자가 거듭해서 묻는 질문은 ‘나는 왜 걷는가?’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며 끝내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성취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길은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만나는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한 일상의 세계를 떠나 터벅터벅 걷는 동안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 자기 속에 있는 약함과 추함과 모호함을 보게 되면, 저절로 기도하는 심정이 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Solviture ambulando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읽으니까 좀 있어 보이는데 그 뜻은 단순합니다. ‘걸으면 해결된다’. 그가 터득한 삶의 지혜일 겁니다. 어떤 문제가 여러분을 괴롭힐 때 한번 걸어보십시오. 장시간 걷다보면 몸과 마음의 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그 문제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조금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문제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가 순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참된 지혜를 찾아다니는 불교의 ‘만행卍行’이나, 무슬림들의 메카 순례인 ‘하즈hajj’가 그러합니다. 하즈는 이슬람 신자들이 평생에 한 번은 해야 할 의무입니다. 이슬람력으로 12월에 시작되는 이 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흰 옷을 입습니다. 그옷은 나중에 수의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신성한 돌’이라 믿는 ‘카바’ 앞에 이르면 순례자들은 카바 주위를 시계반대 방향으로 돕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 살면서 몸과 마음에 쌓인 죄를 풀어내는 의식입니다.

순례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의 강물에 떠밀려 가던 우리 삶을 추슬러 시간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하나님께로 삶을 돌이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기도, 찬양, 예배, 헌신 등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순례를 위해 구별된 시간은 특별합니다. 잡다한 일상의 흐름을 끊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자기의 욕구와 기대를 내려놓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두가 순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순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이라는 중심을 향한 순례가 되기를 소망하고 또 늘 그렇게 살면 됩니다. 어떤 경우이든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 믿고 맡기라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40년의 광야 생활 끝에 요단 강 동쪽 모압 땅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가 그 백성들을 독려하며 들려준 교훈입니다. 이제 약속의 땅이 눈앞입니다. 문지방을 넘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정찰대가 돌아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 좋다’고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인도하신 주님을 원망하면서 그 땅에 들어가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판단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정탐꾼들을 통해 가나안 사람들이 기골이 장대하고, 성읍 또한 난공불락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두려움이라는 전염병이 빠르게 퍼졌고 이구동성으로 ‘무모하다’는 말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상대는 커 보이게 하고 자신은 왜소해 보이게 만듭니다. 그들은 두려움의 거미줄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는 다양합니다. 그 상황에서 달아나거나 얼어붙거나 누군가를 탓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돌아서는 순간 두려움은 증폭됩니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눈을 똑바로 뜨고 응시해야 합니다. 모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그들을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말은 그저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는 백성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엘리사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시리아 왕이 보낸 군대가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성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시리아 대군을 본 엘리사의 시종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태연합니다. 엘리사가 종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자 그의 눈이 열렸고, 그는 불 말과 불 수레가 자기들을 보호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왕하6:8-19).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새번역)
“삶의 근본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 믿음이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하는 든든한 기초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단서입니다.”(메시지)

믿는 사람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사과 씨 한 알에서 과수원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보는 자’ 모세, ‘믿는 자’ 모세는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당신들 앞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시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들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신 것과 같이, 이제도 당신들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오.”(30)

예속에서 자유로 가는 투쟁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그 싸움을 마무리하실 분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대신하여 지금도 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택하신 백성들을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는 것같이 돌보아 주십니다. 이 확신을 품고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사람은 결코 무너질 수 없습니다.

• 길을 만들고 계신 하나님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릴 뿐,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품에 뛰어들지 못합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렇게 많은 체험을 했건만 그들은 여전히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입니다. 모세의 말은 격정적으로 변합니다. 

“당신들이 진 칠 곳을 찾아 주시려고 당신들 앞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셨는데도, 그리고 당신들이 갈 길을 보여 주시려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는데도, 당신들은 아직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33) 

이 대목을 읽다가 어떤 새삼스런 깨달음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돌이켜 보면 참 신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난감한 처지에 빠질 때마다 도울 사람들을 보내주셨고, 갈등하던 사람과 어떻게 화해해야 할지 몰라 당황할 때 벌써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시어 화해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닫힌 문 앞에서 당황할 때마다 새로운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광야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만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받고 삽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오후 덕수궁 대한문 앞을 지나는데, 한편에 우비를 입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가슴에 걸린 패찰에는 각각 ‘English'와 ‘Japanese’라는 단어가 적혀있었습니다. 순간 그들이 외국인 관광객들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에 나선 도우미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세찬 비가 내리고 있는 데도 그들은 그 자리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기다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우리가 선 자리가 어디든,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군가의 길로 삼으시기도 하십니다. 이 또한 가슴 벅찬 소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누웠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뵙고는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창28:16)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자리입니다.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나 주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함께 머물고 있다.”(민35:34)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함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무고한 자의 피가 흐르고, 억눌린 이들의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는 땅은 더럽혀진 땅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바로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계십니다. 

• 걷는 사람 예수 

우리의 삶의 자리야말로 하나님 현존의 장소임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계셨던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저 하늘’을 가리키며 현실의 고단함을 잊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고담준론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복잡한 신학 이론을 설파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그저 덥썩 부둥켜안으실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삶에 모셔들이는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우리 곁에 오신다면 주님은 결코 ‘좋은 차’를 타고 다니지 않으실 것입니다. 좋은 차를 타면 남루한 자리에 가기 어려운 법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기꺼이 그들 곁으로 걸어가실 것입니다. 조지 폭스(George Fox)는 “즐겁게 지상을 걸어라. 그리고 모든 사람 속에 계신 하나님께 응답하라”고 말했습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근처에 있는 몬세라토 수도원에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늙수그레한 일단의 사람들이 수도원 마당에 퍼질러 앉아 어떤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윷놀이 비슷한 것이었는데 주사위를 굴려서 나온 숫자만큼 자기 말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윷판에 해당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도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옮겨가는 곳은 예수님이 머무셨던 장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펼쳐들고는 예수님의 행적을 더듬으며 즐거워했습니다.

물끄러미 놀이를 지켜보다가 저는 예수님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병자가 낫고,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해지고, 낙심했던 사람이 살맛을 되찾았고, 불화했던 사람이 화해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나르는 사람(life-bearer)이었고, 희망을 나르는 사람(hope-bearer)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데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 우리 삶 가운데 계신 분임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걷고 또 걸어 길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길을 우리도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기에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길은 한사코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불편함이 싫고, 위험을 만나게 될까 두렵고, 낯선 이들과의 만남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벗어나서는 주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가나안, 즉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의 몫을 누릴 뿐만 아니라, 모두가 존엄한 존재로 존중받는 세상이 바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세상의 문은 두려움을 떨치고 들어가려는 이들에게만 열립니다.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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