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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게으름이라는 죄악 (삼상 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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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이라는 죄악 (삼상 3:10-14)

뉴질랜드에는<키위>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부리가 길어서 앞을 보지도 못하고 날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새가 날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살고 있는 곳이 화산지대여서 뱀이나 파충류 따위의 천적이 없고 먹이가 풍부해서 굳이 날아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다 보니 날개와 눈의 기능이 퇴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날 수가 없는 처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육체도 사용하지 않으면 근육이 퇴화되고, 재능도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맙니다.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밥 먹는 근육과 수다 떨고 잔소리하는 근육만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능을 사용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사용해야 오래도록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달리지 않는 자전거는 넘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달려가지 않는 인생은 넘어지고 맙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실해야합니다. 어디에서나 부지런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지 휘필드]라는 사람이 정말 귀한 말을 했습니다.“하나님의 사람은 녹이 슬어 없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닳아 없어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정말 멋진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용하실 때 기쁨으로 나를 드리고 그래서 성실함 속에 내 재능이 더욱 빛을 발하도록 살아야 합니다.

[벤쟈민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그는 최초의 미국인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최초의 미국 대사였습니다. 그는 하모니카를 발명했습니다. 그는 또한 가로등을 발명했습니다. 그는 최초의 정치 만화가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수영 선수였습니다. 그는 걸프 해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피뢰침을 발명했습니다. 그는 썸머타임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4번이나 역임했습니다. 이러한 업적들로 말미암아 이 사람을 소개할 때 특별하게 말하는 사항이“그는 진실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굳이 그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가 남긴 여러 가지 업적들이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부지런하지 않았고 만약에 게을렀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업적들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 이제 게으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사람이 게으를 수도 있다.’라고 안일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신앙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면 게으름이라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초대교회 그리고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교회는 일곱 가지 대표적인 큰 죄악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일곱 가지 죄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교만입니다. 두 번째는 질투, 세 번째는 분노, 네 번째는 탐심, 다섯 번째는 탐식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가 게으름이고, 일곱 번째는 정욕입니다. 이 가운데 오늘 생각하는 게으름이 있습니다. 

원래 게으름이라는 단어의 뜻은“돌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무엇에도 관여할 의사가 없습니다. 어떻게 되든 관심도, 상관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다르게“무책임하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게으름의 또 다른 의미는“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게으른 사람은 잘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감격하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로 게으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국 게으름이란 무엇인가를 정리하자면“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곧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게으른 자요, 그 게으름은 곧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유명한 한 제사장을 만납니다. 엘리제사장입니다. 그야말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하지 못하여 게으른 사람의 전형적인 실례가 된 것이 유감스럽지만 그를 살펴보면 우리의 신앙에도 많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게으른 자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바로 자녀에 대한 교육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불러서 엘리 집안의 죄악 된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13절입니다.“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엘리제사장이 아들들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을 보고도 말리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게으름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사무엘을 통해서 직접 죄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해서 잘 대해 준다는 게 필요한 것이지만 이런 함정이 있는 겁니다. 자칫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마저 하지 못하는 게으름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곧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잘못되는 것에 대한 책임이 부모에게도 한편 있는 것입니다.

이 게으름이 습관이 되면 이게 문제입니다. 게으름은 아주 안 좋은 습관이요, 불행한 습관입니다. 어쩌다 한번 게으름을 피울 수는 있지만 그 게으름이 습관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엘리의 게으름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시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습관이었습니다. 
자, 엘리의 삶의 모습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우선 삼상1:9절을 봅니다.“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엘리가 뭐하고 있습니까?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앉아 있다는 것을 가지고 정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곤하면 앉아서 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계속 보면 문제가 좀 있습니다. 한나가 마음의 괴로움을 가지고 성전에 와서 통곡하고 울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엘리가 한나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14절입니다.“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합니다. 

지금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단 말입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시간만 보내는 가운데 분별력이 없어졌습니다. 판단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목적이 있는 잠깐의 휴식이 아니라 정신마저 내려놓고 목적 없는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습관화된 게으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의자에 앉아서 멍한 세월을 보내던 게으른 자의 모습이 그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삼상 4장을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고 맙니다. 사람이 달려와서 그 사실을 알리려고 할 때 엘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삼상4:13절의 말씀입니다.“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그랬습니다. 여기서도 엘리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고 전합니다. 물론 나이가 많아서 눈도 어두워졌고 여러 가지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고 볼 수 있겠지만“자기의 의자”라는 말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거의 매일을 앉아 지내던 의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에게 법궤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 엘리가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떨면서도 습관처럼 의자가 마냥 앉아 있어야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떨기만 하면 뭐합니까? 책임을 통감하고 일어나서 뭐라

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여전히 앉아 있습니다. 그러다가 엘리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최후의 모습이 결정적인데요. 

삼상4:18절입니다.“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

그랬습니다. 그의 최후가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몸이 비대했다고 합니다. 살이 쪄서 뚱뚱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평소에 얼마나 의자에 앉아 게으름을 피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끝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다가 죽어 갑니다. 결국 게으름이 이 사람을 파멸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미 그것이 나에게 게으름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했다면 반드시 감당해 나갈 수 있어야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올바른 응답을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유명한[단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불러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사실에 대해서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에 얼마나 응답하며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하지 못하고 있다면 혹시 지나친 게으름은 아닙니까? 

기도해야할 때 기도하지 못하고, 예배 드려야할 때 예배드리지 못하고, 봉사해야할 때 봉사하지 못하고, 전도해야할 때 전도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그만 습관적인 게으름이 되어서 죄악의 열매가 되어버린다면 이 슬픔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게으름이 얼마나 큰 죄악으로 이어지는지를 봅니다.  엘리는 자식들을 향한 사랑마저도 포기한 사람입니다. 아니, 어쩌면 사랑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한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행하지 못한 것이 엘리의 게으름입니다. 그 게으름은 곧 죄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게으름도 충분히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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