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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놋뱀을 보는 자 (민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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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뱀을 보는 자 (민 21:4-9)

날씨가 많이 무덥습니다. 휴가철은 다 끝나가는데 여름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습니다. 무더위에 건강조심하시고 무더위에 지친다고 신앙생활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더욱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많은 동물들이 서로 얽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생물학적으로 동물로 분류되는 사람도 있고, 전혀 동물처럼 보이지 않아서 식물인줄 오해받기도 하는 산호초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십만 종의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동물이 있는데 그것은 뱀입니다. 특히 여성분들은 더 심하죠. 징그럽고, 무섭고.. 물론 후천적으로 뱀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뱀을 가지고 묘기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고, 뱀으로 담근 술이 몸에 좋다고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혹시 드셔보셨습니까? 저도 군에 있을 때 뱀고기를 몇 번 먹어봤는데 맛은 있는지 모르겠고 느낌은 정말 별로였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뱀이란 동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하고는 친할 수가 없어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선악과 사건 때문이죠.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된 원인 제공자가 바로 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뱀은 모든 인류의 기피대상이 되었고 특히나 여성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생각보다 뱀이 나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선악과 사건, 모세의 손에서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 신약에서는 바울의 손을 깨물었던 독사와 계시록의 옛 뱀까지 뱀이 종종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뱀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짐승으로 묘사됩니다. 유대인들이 뱀을 지혜로운 동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뱀은 하나님의 징벌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변함없이 그들의 길을 인도해 주었고, 세상 누구도 맛보지 못한 하늘의 음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는 매일 매일 공급되었습니다. 추격해오는 바로의 군대를 두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고, 그 물에 바로의 군대가 몰살당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쓴물이 단물이 되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여정은 기적과 함께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물론 그 기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일으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에 두고 바란광야의 가데스에서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고 그 보고를 들은 사람들은 낙심했습니다. 

결국 가나안 정탐꾼들의 믿음 없는 과장된 보고와 이에 마음이 흔들려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졌습니다. 그 벌로 출애굽한 불순종의 세대들이 다 죽기까지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오늘의 장면을 당하게 됩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 불평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감정적으로 행동했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들은 광야 여행 속에서 많은 기적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거친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전멸하지 않고 그 광야를 이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행으로 백성들의 마음은 지쳐갔습니다. 자신들의 불순종과 범죄 때문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들의 마음에슨 불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인 에돔 왕이 친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스라엘민족이 자신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잘 닦여진 에돔의 대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빙 둘러서 길을 가야했는데 정비되지 않은 그 길은 더욱 고달팠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그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여기서 상했다는 표현은 히브리원어를 보면 ‘니쉬바르’인데 ‘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릇이나 컵이 깨어졌을 때 쓰는 표현과 같습니다. 히브리어 중에 재미있는 표현인데 깨뜨리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를 ‘사바르’라고 읽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외울 때 사발을 깨뜨리다라고 외웠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내다 보면 가끔 마음이 상했다는 표현을 하는 성도님들이 있는데 바로 마음이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깨어진 이스라엘 민족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깨어진 그릇에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깨어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40년 광야생활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주신 하나님, 세상의 누구도 맛보지 못한 하늘의 만나를 내려주셔서 먹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깨어진 마음의 틈새로 흘러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지킬 것을 말씀합니다. 

잠언서 4장 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이 깨어지고 상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려고 해도 은혜가 담겨지지 않습니다. 깨어진 틈새로 은혜가 세어 나가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상처받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람들의 말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은혜가 되는데 꼭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말을 의식하다보니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 원하신다면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사람들의 말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지 않도록 잘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가 없으니 감사가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해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할 바이지만 실제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 가운데 은혜라도 있으면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텐데, 깨어진 마음의 틈새로 은혜가 모두 세어 나가버린 백성들에게 감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이 지나고 있는 길은 물도 찾기 힘들고, 나무 그늘도 없는 그런 광야의 돌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향해서 불평을 합니다. 

5절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무슨 말입니까?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왜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해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 여기는 먹을 식물도, 물도 없다. 우리를 죽일 작정이냐?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으로 광야를 방황하게 하신 이유가 불신앙적인 태도와 아직까지도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잊지 못하는 출애굽 세대의 진멸을 위해서였는데, 과거를 회상하면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아직도 출애굽 세대들이 다 죽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감사할 조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유와 해방,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기둥과 불기둥, 반석의 샘물과 십계명 돌판, 하나님과 맺은 언약까지 감사할 조건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특히나 그들이 먹었던 만나는 그 누구도 먹어보지 못한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맛 또한 기가 막히는 고급 영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나를 향해서 한다는 소리가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입니다.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가고 없고, 현실의 어려움만이 남아 그들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불평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주 단호한 조치를 취하십니다. 불평하고 반역하려는 세력들의 중심이 출애굽세대의 마지막 생존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시고자 함이었는지, 아니면 이제 가나안을 앞두고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두려움과 신앙을 심어주시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뱀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이 불뱀은 사막에 사는 독사들입니다. 제대로 된 해독제도 없는 상황에서 그 뱀에 물린 사람들은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죽어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모세에게 매달립니다. 하나님께 얻어터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이럴 때를 빗대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있을 때 잘해라’. 우리는 하나님께 맞지 않고서도 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에게 달려와서 잘못했다고 빌며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며 모세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원망한 백성들이지만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7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그는 진정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렇게나 속 썩이고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백성들이지만 눈물 흘리면서 자신에게 달려와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모세와 같은 그런 마음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려주신 해법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아날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다 살았다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놋뱀을 쳐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돌아올 것은 죽음 뿐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어리석다라고, 그리고 장대를 쳐다보지 않고 죽은 사람들은 정말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라면 죽어도 싸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좀 많이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장대를 쳐다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그런데 20대가 되어서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였습니다. 목숨이 걸린 중요한 문제 앞에서 왜 그들은 사는 것을 포기하였을까? 놋뱀을 쳐다보는 게 무어 그리 힘든 일이라고 목숨을 걸었을까? 그만큼 그들은 믿음이 없는 악한 사람들이었을까? 왜 하나님은 겨우 놋뱀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그들을 살려주셨을까? 어찌보면 너무나 단순한 해결책이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속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깨달은 것은 제가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을 살릴 수 있었던 놋뱀은 그까짓 놋뱀이 아니었습니다. 그까짓 거 대~충 쳐다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높이 달았습니다. 그 장대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당연히 텐트촌의 중심부근에 세워졌을 겁니다. 텐트촌의 중심에는 성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막 근처의 어디쯤에 장대는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장대는 얼마나 높았을까요? 한 1,2십 미터 정도 높이였을까요? 아마 그보다 낮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텐트촌들이 있는 곳에서 그 장대위에 걸린 놋뱀을 보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 거기에 모든 해답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뱀에 물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고통이 극에 달한 가운데 모세의 외침이 들립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죽게 될 것이다. 모두 나와서 놋뱀을 쳐다보라.’

그 소리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던 이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장대위의 놋뱀을 보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천막 밖으로 나왔던 겁니다. 다른 천막들에 가려져서 놋뱀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장대가 보이는 곳까지 기어가야 했습니다. 텐트촌의 외곽에 있던 사람들은 더욱 먼 거리를 힘겹게 기어가야 했습니다. 

장정만 60만, 약 200만 명이 친 텐트촌의 규모를 상상해 보십시오.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다들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와줄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오히려 필사적인 그들의 걸음에서 서로 먼저가려는 경쟁심만 뿜어져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믿고, 장대위의 놋뱀을 쳐다보았던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아파 죽겠는데, 움직이지도 못하겠는데, 당장 죽겠는데 겨우 그거 쳐다본다고 살아나나? 그들은 포기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진 삶의 길, 구원의 길을 그들은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를 통해서 선포되어지는 구원의 말씀을 믿지 않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앙이 아니라 불순종인데 놋뱀을 쳐다보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은 불순종한 믿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아마도 출애굽 세대의 마지막 생존자들,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이 되었던 불평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구원의 길을 발견하고 믿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아났습니다. 9절에서 뭐라고 기록합니까? ‘뱀에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놋뱀을 믿음으로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한사람의 열외도 없이, 쳐다보기만 하면 된다는 조건을 만족시킨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기 때문에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살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놋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장대 끝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자신의 믿음과 의지와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 바로 장대위의 놋뱀을 쳐다보는 일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믿음으로 결단하고, 고통 속에 의지를 드려서 놋뱀을 향해 나아갔던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믿음과 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그들은 살아날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의 결단과, 그 결단을 실천하는 의지가 있었기에 그들은 살아났습니다. 

반대로 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고통 중에서 그렇게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이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해서 쓸쓸하게 광야의 주검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인생은 시작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가장 중요합니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합니다. 평생을 범죄자로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낙원으로 간 한편 강도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고 죄책감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룟유다를 보면서 우리는 마지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노년에 접어드신 어르신들도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살아 갈 길이 먼 청장년들은 더욱 깨어서 언제 나에게 마지막 순간이 오더라도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주님 앞에 설수 있도록 믿음의 경주에 더욱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장대위에 달린 놋뱀과 같이 나무에 달리신 분이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저주받았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그분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지시고 저주받은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서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장대 끝에 달렸던 놋뱀처럼 그분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신 약속의 증표입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렸지만 장대 끝에 달린 놋뱀을 보는 모든 사람이 살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의 증표입니다. 그 약속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저주와 수치의 십자가 위에서 죽어주셨습니다.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과 부활의 확신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 은혜를 체험하지는 못합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결단과 순종입니다. 살아나기 위해서 놋뱀을 보려고 고통 속에서 결단과 순종의 힘든 걸음을 했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단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에 대한 결단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결단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배당을 찾아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을 새삼스럽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 일이 결코 당연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즐기며 산으로 바다로 계곡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또한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지 않는 가족, 친구, 애인, 공부, 취미생활, 여러 가지 모임들, 텔레비전, 잠까지, 특히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더욱 그 방해가 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우리는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아픈 몸을 끌고 어떻게든 놋뱀을 보기위해 애를 썼던 그 사람들처럼 우리는 믿음과 결단과 순종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과 결단을 기뻐하시고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불평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라도 하소연하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마음속에 있는 것을 토해내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안정이 되고 편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하소연이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서 상한 마음을 내려놓는 하소연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해결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 아빠께 상황과 환경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깨어졌을 때, 그 깨어진 부분을 다시 봉합하고 고쳐주시도록 하소연해야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그 깨어진 부분을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마음에는 은혜가 담길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나를, 우리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깨어진 마음을 순간접착제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가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고쳐진 우리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둘 수 있게 됩니다. 혹시나 마음이 상했다고 생각 드시는 분이 있다면 유일한 치료자이신 하나님께 깨어진 마음의 조각들을 내어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소연을 넘어서 그것이 원망과 불평이 되면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망치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을 싫어하십니다. 원망과 불평은 불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원망과 불평보다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소망과 위로와 나음을 얻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날마다 믿음의 결단을 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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