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브엘세바로 올라가자 (창 26:23-33)

첨부 1


브엘세바로 올라가자 (창 26:23-33)          


I. 브엘세바

지난 시간 창세기 26장 전반부를 통해 「여호와께서 그 해에 이삭이 실수했던 그 해에 - 그 땅에서 - 실패했던 그 땅에서 백배의 복을 주셨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일은 우리에게 공로가 있고 자격이 있고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은혜의 사건입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약속의 땅에도 흉년은 듭니다. 예수 믿어도 고난은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기근은 찾아옵니다. 

그때 아브라함도 이삭도 애굽을 찾아갑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달리 이삭이 블레셋땅 수도 그랄에 도착할 무렵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애굽으로 가지 마라.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나안으로 돌아갈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랄땅에 엉거주춤 머물고 있다가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고 큰 봉변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몽둥이를 들고 찾아오셔서 이놈 네 죄를 알렸다. 몽둥이 100대. 그래도 모자랄텐데 하나님께서 그 해에 그 땅에서 백배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이 복 받아 잘 살았다. 아무런 고난도 없이 평안히 잘 살았다. 이렇게 되길 기대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습니다. 또 갈등이 찾아오고 고난이 찾아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면 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의 우물은 바싹바싹 말라갑니다. 이 일로 블레셋 사람과 이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이삭은 우물을 양보하고 도망갑니다. 또 양보합니다. 

드디어 오늘 본문 23절 문이 열려집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이 우물 사건을 통하여 본문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26장 전반부에서 이삭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임마누엘-함께하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 함께 하시는 구체적 사건이 바로 우물사건입니다. 
이삭이 늘 당하는 것 같은데 실제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양보했는데 그때마다 더 큰 우물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면 이런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삭은 자기를 해치고 공격하고 빼앗아가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삭이라고 왜 불만이 없었겠어요? 불평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인간은 상대에 대해 항상 불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는 이삭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신앙, 인격이 성숙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이삭은 양보하고 갔는데 도망가는 줄 알았는데 이삭이 도망가는 그 지점을 추적해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점점 그 발걸음은 가나안 땅, 약속의 땅, 하나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 드디어 브엘세바까지 올라갔습니다. 

브엘세바는 창세기 22장 19절에 나오는 장소입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위대한 경험을 하는 장소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이삭 대신 하나님이 보내준 양을 잡아 번제를 드리고 내려와 거한 장소가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위대한 예배가 있었던 곳, 하나님을 만났던 곳, 하나님과 동행했던 바로 그 땅, 약속의 땅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요, 신앙의 자세요 복입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던 이삭. 애굽 나일강변으로 가서 양식을 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는 이삭에게 나타나 애굽으로 가지 말라. 블레셋땅 그랄에 엉거주춤 머물게 됩니다. 그랄 지방 사람들과 갈등을 느끼게 되지요. 이때 이삭은 어떤 길을 선택했는가?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날마다 겪을 수 있는 갈등상황입니다. 
신앙적인 방법으로 살자니 손해가 너무 큽니다. 완전히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자니 신앙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회색지대에서 엉거주춤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일이 제대로 되는 것도 없습니다. 

세상적인 주판알을 굴려보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합리적, 이성적입니다.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은 그랄왕 아비멜렉을 찾아가 타협해 봅니다. 흉년이 끝날때까지만 이라도 머물게 해 달라고 애원해 봅니다. 

애라 모르겠다. 죽어도 가나안 땅에 가서 죽자. 마음 편한게 최고다.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가면 흉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 갈등과 위기 상황속에서 이삭은 어떤 길을 선택했는가? 

합리적 방법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비굴하게 아비멜렉에게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그랄땅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란 약속을 붙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해에 백배의 수확을 경험합니다. 나는 손해보고 양보했는데 가는 곳마다 우물샘이 터집니다. 

이삭은 이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나님은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는구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말씀대로 살아보자. 세상에 다른 모든 것 손해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일, 예배 드리는 일 만큼은 손해 보고 살지 말자. 제3의 길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자포자기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찾아갑니다. 말씀을 붙들고 찾아갑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축복은 무엇이고 승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줄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이요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II. 그 밤에 주신 약속

이삭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돌아온 그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4절 25절입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26:24-25) 

이삭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하나님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반겨 맞아 주시며 소중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당황스러울때 교회로 돌아가라. 기도의 줄을 다시 붙들어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때 주신 첫 번째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굶어죽지 않는다. 내가 너와 함께 하면 결코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 살다가 두려운 경우가 없었습니까? 
대학시절 홀어머니께만 등록금을 의지할수 없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밀집 모자를 쓰고 리어카 한 대를 구해 수박장사를 했습니다. 팔리기는 팔리는데 남는게 없더라구요. 이러다 내가 대학이라도 졸업할수 있나. 싶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매 순간순간 색다른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마두동 예배당 건축이 끝나자 IMF가 터졌습니다. 교인들이 눈물로 헌금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자칫 잘못된 것 아닌가?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흉년보다 크셨습니다. 내 위기보다 크셨습니다. 문제보다 크셨습니다. 하나님이 안보이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면 그때마다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내가 너를 지키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삭에게 주신 두 번째 말씀은 지금까지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던 그 하나님이 이제 이삭을 통해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추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역사하는 분이고 성경책에 있는 분이시고 목사님의 설교속에 나오는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퇴근한 남편이 배가고파 부엌으로 갔습니다. 식탁위에 아내가 쓴 메모 한 장이 있습니다. 여보 나 목욕탕에 있어요. 당신 저녁 식사 준비해 드릴께요. 요리책 20쪽에 나오는대로 해서 잡수세요.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

요리책에 있는 것은 음식이 아니지요. 성경책에 있다고 해서 그게 내 것입니까? 좋은 설교 들었다고 내가 좋은 신앙인이 되던가요? 내가 만난 하나님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있어야 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너무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너무 크게 보였습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절망감이 찾아옵니다. 못내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좌절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즉 위대한 믿음의 아버지가 위대했던 것은 그 존재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나 - 하나님 여호와가 그와 함께 했기 때문이니라. 네가 약하지만 위대한 내가 너와 함께 하면 너도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부교역자 시절에는 담임목사가 너무 크게 보입니다. 나도 저렇게 성인이 되면 저렇게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교역자들 가운데 저보다 훨씬 위대한 목사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내 부모의 신앙이 너무 커 보여 좌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녀들이여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 여러분의 부모보다 더 위대한 신앙인이 여러분도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에게 준 복이 자손들에게 대를 이어 흘러 갈 것이다. 

한국교회 선진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이 크고 위대하지만 그 믿음의 능력이 더욱 커지고 우리 후손들에게 이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받은 아브라함의 복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이어질 것을 성경은 약속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브엘세바로 올라가기만 하면. 

이삭이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두팔 벌려 이삭을 반겨맞아 주시고 약속의 말씀으로 이삭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삭에게 한 가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25절입니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 안으로 돌아간 영광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래전 얘기입니다. 

서울에도 제대로 한번 못가본 시골교회 목사님이 생전 처음 미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달쯤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는 그때부터 설교시간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에” “내가 미국에 있을 때에” 계속 미국 얘기만 합니다. 특별히 강사로 가면 3박 4일을 미국 얘기만 하십니다. 
노회 어떤 행사에서 이분을 설교를 시켜야 하는데 또 미국 얘기를 할까봐 축도를 부탁했습니다. 설교가 다 끝나고 축도를 하러 올라오시더니 “지금은 내가 미국에 있을 때에 함께 하셨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미국에 있을 때에 함께 하셨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폭소가 터졌습니다. 
미국에 한번 간 것이 이토록 큰 자랑스러운데 우리 하나님 안에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 것이 있을까요? 

III. 너는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 비해 작아보입니다. 심지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들 야곱같은 꾀도 없습니다. 에서같은 용기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무력하고 소심한 이삭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니 이삭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욱 적극적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도 똑부형 - 똑똑하고 강하고 부지런한 형입니다. 피곤한 유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줄 필요도 없을만큼 자칭 똑똑이나 강한 사람은 신학적으로 좀 곤란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줄 길이 없습니다. 때론 알고도 속아주고 손해 볼 줄도 알고 양보할 줄도 알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변사람들도 이런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잘난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복을 받는 이삭을 보고 이방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두려워합니다. 감동을 받습니다. 왕의 친구들과 참모들을 대동하고 이삭을 찾아옵니다. 아비멜렉이 영웅인 이유가 있습니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순간 아브라함과 이삭이 받았던 복을 이방인 아비멜렉이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26절입니다. 
「아비멜렉이 ... 이삭에게로 온지라」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말이 대단히 평범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에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일반적으로 동사가 문장 머리에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아비멜렉이란 이방 왕의 이름이 제일 앞에 등장합니다. 이 파격적인 한 문장을 통해서 아비멜렉이란 왕이 일개 촌노 이삭을 찾아온 사건이 대단히 파격적인 일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사건을 통하여 파격적인 결단을 통하여 아비멜렉이 받을 수 없는 파격적인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다른 특이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방인들이 神을 부를때 “엘로힘”- 하나님, 신이란 단어를 씁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고유명사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이삭 -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함을 우리가 보았다. 
이스라엘 언약의 神 여호와란 이름을 이방인 왕이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문장, 이런 단어를 등장시켜 창세기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께 받을 수 없는 특이한 복을 받더니,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아본 아비멜렉도 특이한 복을 받았다. 누릴 수 없는 복을 받았다. 갈 수 없는 자리에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29절입니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방인의 입을 통해 고백된 이 말씀 -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이 놀라운 사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찬송가 425장 4절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임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사람임을, 
주님과 함께 동거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시고 그를 지키고 복 주시는 모습을 이방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삭 한명을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인간인데 하나님이 저를 지키는구나. 저를 해치는 자를 가만두지 않는구나. 저를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복 주시는구나. 
요셉이 고난을 당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구나. 이방인들이 지켜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이방인들이 지켜보게 하는 것. 나는 가진 것 없으나 나는 약한 존재이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구나. 이방인이 보게 하는 것.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경외감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대하게 하는 것. 이게 신앙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입니다. 

IV. 브엘세바로 올라가자

이삭은 자신을 찾아와 동맹계약을 맺자고 요청한 아비멜렉 일행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고 평안히 보내 줍니다. 그후 다시 우물을 팠더니 메말랐던 우물에서 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우물과 그리고 그 성읍 이름을 세바라 다시 브엘세바로 불렀더라는 말씀으로 오늘 본문은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삭은 우물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다닌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이사를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이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입니다. 
운이 좋아서 우물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메마른 땅에 물줄기를 주신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가는 곳마다 사막에 강이 납니다. 꽃이 핍니다. 샘이 터집니다. 강이 흐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제2자유로를 통해서 오산리기도원에 설교하러 가다가 우리교회 앞에 잠깐 섰습니다. 류목사, 당신 교회 나 섰어. 제2자유로 통해서 오산리기도원에 가는데 기가막히네. 다 알고 비전채플 땅 샀지. 당신 안테나가 높은가 봐. 난 아무것도 모르고 샀는데. 안테나가 높기는 높지. 하늘에 닿아 있으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은 브엘세바로 시작하여 브엘세바로 끝이 납니다. 
23절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33절 그 성읍 이름이 브엘세바더라.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장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특이한 포인트가 또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갔다”고 표현합니다. 
브엘세바는 사실 이삭이 머물던 블레셋 그랄땅 “르호봇”보다 150m나 낮은 지대에 있는 성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올라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브엘세바는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장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만나 주셨던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언어가 표현되어 집니다. 

예루살렘과 가까워지는 것은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것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교회와 가까워지는 것은 올라가는 삶입니다. 
교회와 마음이 멀어지고 몸이 멀어지는 것은 내려가는 삶입니다. 
신앙생활과 멀어지고 장관이 되고 총장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여러분의 삶은 지금 내려가는 것입니다. 

말씀과 가까워지면 올라가는 것입니다. 
말씀과 멀어지면 내려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가까워지면 올라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멀어지면 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에게로 가까워지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로부터 멀어지면 내려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영적 아버지, 영적리더와 주의 종들과 가까워지면 올라가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리더들과 갈등이 생기고 멀어지면 신앙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이 여기에 있습니다. 
브엘세바로 올라가자. 올라가면 산다. 
브엘세바로 올라가자. 죽지 않는다. 
브엘세바로 올라가면 하나님 두팔 벌려 나를 반겨 맞아 주실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이 새로워지게 될 것이다. 
거기에 역사가 있고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 해에 그 땅에서 이삭을 백배나 복을 주시고 브엘세바로 이동시켰던 것처럼 주님께서 여러분을 브엘세바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