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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금식할 때에 (마 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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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할 때에 (마 6:16-18)

지난 주 중에 보험공단에서 하라는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화요일과 금요일 이틀로 나누어서 받았습니다. 그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 이유는 한꺼번에 이어서 받기에 무리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두 번이나 금식을 할 수 있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금식을 두 번 하는 것을 원한 것은 점점 불어나는 체중을 그렇게라도 제동을 걸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탁월한 입맛을 주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입맛이 떨어져서 음식이 먹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경험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군에 입대한 첫 날, 첫 끼니는 다른 장병들은 거의 먹지 못하는데, 나는 뛰어난 입맛 덕분에 너무나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또한 선교지를 방문하면서 느낀 것인데, 하나님은 나에게 입맛은 선교사적인 입맛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이상한 향신료가 들어간 것도 나름대로 다 맛있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탁월한 입맛 덕분에 저는 음식을 금한다든지, 절제하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여러분, 음식은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한 활동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입니다. 그런데 왜 때로 사람들은 일정 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을 하는 것입니까? 사람마다 금식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질병 치유의 한 가지 방법으로, 또는 미용상의 이유로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 같이 많이 먹어서 살이 찌는 사람들에게 금식보다 더 좋은 살빼기 방법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농성과 투쟁의 한 수단으로 금식을 택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웃 사랑의 한 방법으로 금식을 하여 상징적으로 비용을 정하고 만들어 배고픈 사람을 돕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건 생활에 대해 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중, 구제와 기도에 이어서 금식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대목입니다.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17절) “너는 금식할 때에”, (18절) “이는 금식하는 자로”, ...

제가 첫 목회를 할 때, 같은 지방에 연세가 지긋하신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40일 금식을 몇 번 하시고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금식을 하실 때에는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있으셨을텐데, 금식한 후에 보호식을 잘 못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든 생각.  ‘나는 평생 목회하면서 40일 금식 같은 것은 안 하겠다’) 

그리고 신학대학 후배 가운데, 40일 금식하다가 이틀을 남겨두고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40일 금식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40일을 금식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금식의 뜻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아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과 육적 생활에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금식이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당연히 배가 고픕니다. 40일을 금식한 어떤 사람에게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금식의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무슨 환상을 보았다’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이제야 배고픈 자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귀한 깨달음입니까? 아주 실제적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금식하면 배가 고프고 기운이 없고 일을 잘 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금식을 해본 분들은 다 느끼셨겠지만 금식을 하면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좋은 옷을 입는 것, 화장하는 것, 화려한 사치품을 갖는 것,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 등이 다 의미가 없고 시시해집니다. 다만 자기가 배가 고픈 만큼 왜 기도를 하는가에 대해 집중하게 되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금식은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놀라운 방법입니다. 또한 금식을 하면 우리가 얼마나 먹는 일에 노예가 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금식을 하면 하루 24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하루 3번 먹는 것에 얼마나 투자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집에서 주부들이 아침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 하고, 조금 쉬었다가 점심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하고, 또 조금 쉬었다가 저녁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메뉴를 짜고 반찬 걱정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어찌 보면 온통 먹는 것이 우리 인생의 주제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먹는 데서부터 자유한다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 생기며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식은 어떤 의미일까요? 금식은 어떤 때, 무엇을 위해 해야 할까요? 


1. 금식은 죄에 대해 애통하고 회개할 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금식에 대해 살펴보면 구약에서는 죄를 슬퍼하고 회개할 때 반드시 금식을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금식에 대한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만,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금식하라고 직접 명령하신 날은 단 하루입니다. 1년 365일 가운데 단 하루가 바로 금식일이었는데 그날은 바로 대속죄일이었습니다. 

속죄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금식은 바로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금식이 단순히 건강상의, 미용상의 이유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목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 행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곧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애통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바라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함으로써 오직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고 하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타종교에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슬람의 ‘라마단 금식기간’을 들 수 있습니다.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은 음력으로 그믐에 초생달이 시작되는 기간에서 한 달을 지내는데, 올해는 8월 1일부터 30일까지입니다. 무슬림들은 이 라마단 기간에 한 달 동안, 매일 동이 트는 아침부터 해가 지는 저녁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습니다. 음식, 물, 술이나 다른 음료, 등 일체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일 5번 예배를 드리고, 라마단 마지막 기간에는 전 신도가 회개와 참회의 시간을 가집니다. 이 정도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에 음식을 못 먹으니 힘들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슬람 국가에서 일 년의 음식 소비량의 30%를 이 라마단 기간에 소비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라마단 기간에 해가 떨어지면 바로 예배를 드리고는 저녁 만찬을 아주 성대하고 푸짐하게 차리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열고 실컷 먹습니다. 그리고는 자정 쯤, 야참으로 또 맘껏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또 새벽에 동트기 전에 예배를 드리고 하루 종일 굶을 것을 생각하여 실컷 먹습니다. 결국 3끼를 다 먹습니다. 밤 중에... 그것도 양은 더 많이... 그런 내용들을 모르면 ‘와, 그들은 대단하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의 금식 전통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겸허히 금식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금식의 축복이 지금도 많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특별히 회개해야 되는 줄 알면서도 회개가 되지 않을 때, 나쁜 것을 고쳐야 되는 줄 알면서도 못 고칠 때, 마음이 강퍅해질 때 금식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문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사람의 죄를 자기의 죄로 알고 대신 회개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때 회개하고 금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일 것입니다. 

내일이 광복절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일이 있다고 할 때에 회개하고 금식하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로부터 금식은 죄에 대해 애통하고 회개할 때 하는 것이었습니다. 


2. 금식은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요구할 때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자기가 음식을 굶으면서 얼마나 그것을 잘 견디느냐를 보여 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의무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금식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보다 하나의 당연한 의무 규정과 같았고, 또 이것을 실천하며 종교적인 교만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금식을 하지 않는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들이 더욱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들은 금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목말라 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수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금식은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요구할 때 합니다. 금식이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진 문제가 너무나 심각해서 밥을 먹을 수가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태도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동행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동안 그는 전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동안 세상적인 것과 같이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오직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고 있었을 뿐입니다. 

왕후 에스더는 자기 조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 자기 민족이 모두 학살을 당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위기 앞에서 모르드개에게 말했습니다. 

(에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여러분, 특별한 일을 위해서 금식할 때 하나님께서 참 빨리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 문제인데 자식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금식하십시오. 부부관계에 위기가 왔을 때, 금식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보십시오.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기다리며 금식하며 기도해 보십시오. 

우리가 금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바꾸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도 바꾸어 주십니다. 금식은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겸손의 태도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금식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우리 자신을 연단시키는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적절한 금식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무적이거나 과도한 금식은 해롭습니다. 금식은 자기의 영적 유익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겸손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기가 쓰는 신앙의 도구로나 의의 도구로 써서는 안됩니다.  

(시35:13)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여기서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금식은 자기의 육체와 영혼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금식을 하면 다른 사람의 배고픔과 고통, 연약함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너무 편안하면 신앙생활을 잘 못합니다. 무엇인가 좀 불편해야 더욱 영적인 상태가 됩니다. 금식은 자기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면 인간의 본능적인 죄인 탐욕, 곧 남보다 더 잘 살고 싶고, 더 성공하고 싶고, 무엇이든지 더 잘하고 싶은 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먹기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 참 때는 ‘나는 목사가 아니라 먹사다’라고 스스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몰라도 금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2004년에 심각한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도 중에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새롭게 결심한 몇 가지의 내용 중에 금식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매년 새롭게 해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기 위해서, 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특별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기 위해서, 12월 30, 31, 1월 1일, 삼일 동안 금식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을 ‘원단금식’이라고 하고 실천해 왔습니다. 중곡교회 시절, 부목사님과 전도사님들, 그리고 교회의 관리 권사, 사무원, 등 스텝들과 그리고 장로님들도 금식에 동참하자고 해서 금식을 함께 했었습니다. 

장로님들 중, 여자 장로님 한 분은 저와 똑같이 삼일을 금식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함께 하다가 저에게 양해를 구하고 금식 끼니를 줄이기도 했습니다. 이 3일의 원단금식은 지금까지 계속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제가 그냥 알리고 금식을 했는데, 함께 금식을 하자고 적극적으로는 안 했습니다. 부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에게도 함께 하자고 적극적으로 이야기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원단금식을 시작한 후 몇 개월이 지난 2005년 중반 쯤에 나 개인적으로 매달 1일에 하루 금식하는 것을 또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의미는 내 삶에서 절제를 훈련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한 달을 주님만 바라보겠다는 의미로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철저히 하지 못하고 소홀히 한 적이 많았는데, 제대로 해야겠다고 다시 굳게 마음을 먹습니다. -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도 절제의 열매가 있는데, 내 삶에서 스스로 자신에게 훈련을 시켜서 세상적 욕구를 떨치고 절제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7~18절)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러분, 금식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는 것입니다. 이런 금식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겸비함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금식은 ‘하나님 없이 저는 살 수 없습니다’, ‘저의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라는 고백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금식은 하나님에 대한 겸손의 표현이며, 사랑의 표현이고, 또한 기도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금식은 자기 절제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찬송 94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무엇과 바꿀 수 없네”, 

여러분, 금식은 곧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고,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라고 하는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요 사랑 고백의 한 표현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축복된 금식 생활을 향유하셔서 하나님과 이웃, 나 자신을 향한 거룩한 창이 열리는 경건한 삶이 우리 속에 부각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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