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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되라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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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되라 (마 25:31-46) 

1.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기 3일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만큼 절박한 마음으로 인생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3일 후면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최악의 십자가 형틀에 죽으시지만, 그 후 사흘이 지나면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빌2:9-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 그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시고 보좌에 앉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는” 심판을 시행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지칭하는 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백부장처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겠지만, 유대인이라도 그러한 믿음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 즉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마8:10-12)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간단합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처럼” 간단합니다. 여기서 양과 염소는 낮에 풀을 뜯을 때는 무리에 구분없이 섞여 지냅니다. 그러나 특히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기후인 팔레스틴에서는 잠을 잘 때에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합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소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도록 했습니다. 또 낮에도 서로 구분되기는 하는데 왜냐하면 팔레스틴 염소들은 대부분 검은 계통인데 반해 양들은 흰색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성격이 판이(判異)하게 다른 짐승이기 때문에 양은 양들끼리, 염소는 염소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이처럼 목자는 언제든지 양과 염소를 쉽고 간단하게 분별합니다. 이렇게 양과 염소를 분별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했습니다. 심판 때에는 그 심판의 기준이 ‘양과 염소’일뿐입니다. 양이냐 염소냐를 분별할 뿐입니다. 

그리고 분별할 자리는 오른편이냐 왼편이냐 일뿐입니다. 양은 오른편, 염소는 왼편일 뿐입니다. 제 3의 자리가 없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고, 왼편에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자들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지옥불에 들어가 영원히 형벌을 받을 자들입니다. ‘오른편’은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입니다.

(출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그리고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힘을 잃은 자리입니다. 그래서 지혜서 전도서10:2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10: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심판의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이 되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영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말합니다. 


2. 그러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로 불리우는 오른편 자리의 양, 영생을 누리게 될 의인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저주를 받아 영원히 꺼지지 않은 지옥 불에 들어갈 왼편 자리의 염소는 누구이겠습니까? 

1) 먼저, 오른편 자리의 양, 의인은 누구인가를 보겠습니다. 본문 35-36절입니다.

(마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복 받을 자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은 무엇보다 ‘믿음으로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사람’인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며, 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돌보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 바로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에게 “(마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고 말씀하시자 그 의인들이 의아해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마25:37-39)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의인들”의 이같은 반문에 예수께서 “(마25:4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즉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며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등에게 베푸는 행위가 바로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이며,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행한 것, 다시 말해 그러한 행위가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의인”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며,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며, 헐벗은 자에게 옷 입히며,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아 준 낮고 천한데 거한 사람들이 바로 “의인들”입니다. 

링컨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옛날 백악관 곁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가끔 울타리까지 나와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소년을 놀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몹시 허름한 차림이었는데 아빠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엄마는 청소부였습니다. 구두를 닦아 반질반질하게 해서 신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구두가 너무나 낡아 닦을 수도 없어 놀림감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겨우 아홉 살 난 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존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존의 새 옷과 새 구두, 여동생의 새 옷과 새 구두, 그리고 많은 식료품과 땔감(석탄)을 링컨 대통령이 보냈던 것입니다. 존은 새 구두를 신고 자랑스럽게 등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학생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대통령이 존의 교실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다면서 칠판에 다음의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두고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차별없는 사랑을 베푸는 자가 하나님 오른편, 영광스럽고 복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을 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양이며 의인들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왜 높이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철학, 신학, 음악, 의학 등의 네 부분의 박사 학위를 가졌기 때문입니까? 박사 학위를 네 개나 가진 사람이 아프리카 원시림에서 흑인들 속에 묻혀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이때 슈바이처는 “나를 동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수 십 만의 지극히 작은 자들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섬기는 행위가 없다면 헛된 믿음입니다.

(약2:20-26)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예수님은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그 생활에 있어서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이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의인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했습니까?’라고 반문했던 것처럼 남을 섬길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은밀하게 베푸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예수께서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바로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외받고 궁핍하며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을 섬기는 사람의 종으로(성육신,聖肉身),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하신 것입니다.(빌2:6-8).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63: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정녕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당하는 자의 표상이자, 그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는 그들의 친구였습니다
(히 4:15).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있게 고난받는 자와 ‘하나’라고 선언하실 수 있었으며 고난받는 자의 위안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고난받는 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히 13:2)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믿음으로 섬기는 의인들이 되시어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를 넉넉히 상속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왼편에 처할 염소, 저주받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영원히 형벌받을 악인들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정반대 편에 있는 자들로 의인들과 정반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본문42-43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25:42-43)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믿음으로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생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작은 자 하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행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면서 섬기며 베푸는 생활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같이 ‘믿음으로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생활이 없었던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는 자들을 두고 일찍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기적을 나타내었다 해도 ‘믿음으로 작은 자 하나’에게 베풀며 섬기는 삶이 없다면 “내게서 떠나가라”, 즉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은 저주받은 사람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분과 영영히 관계가 단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단절이 곧 저주의 심판인 것입니다.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이 정죄받은 이유는, 그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베풀며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남에게 비록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 하나’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여 섬겨야만 합니다. 

(마19:19)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실로 하찮게 보이는 소외된 자, 고난받는 자에게 대해 무관심한 자는 그들의 형제와 친구이신 예수를 무시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자인 것입니다. 


3.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는 경제대국 일본, 그것도 1,300만의 대도시 도쿄에서 일어났던 실제 이야기입니다. 1987년 가을, 도쿄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에 젊은 엄마 게이코와 네 아이들-아키라, 쿄코, 시게루, 유키-가 이사옵니다. 이 네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가 다른 남매들입니다. 

장남 아키라 외에 호적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은 여행가방 속에 담겨 운반되거나 거리에서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새로 이사 온 집으로 숨어들어갑니다. 게이코는 아이가 넷이나 된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게 되면 쫓겨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고 아이들에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말 것, 밖에 나가지 말 것 등 규칙을 지키도록 합니다. 엄마가 일하러 나가 없을 때는 12살짜리 장남 아키라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여 매일 시장을 보고 요리하며, 

둘째 쿄코는 세탁을 전담합니다. 아키라와 쿄코는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지만 밤늦도록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봐야 합니다. 게다가 엄마 게이코는 학교에 보내달라는 쿄코에게 “학교에 가면 아버지가 없다고 이지메(왕따)당한다.”는 구실로 학교에 보내지 않습니다. 

의젓한 장남 아키라, 착하고 야무진 쿄코, 장난꾸러기 시게루, 아직 천사같은 다섯 살 막내 유키와 그들의 엄마는 힘겹지만 평화로운 일상을 꾸려 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아키라에게 ‘동생들을 부탁한다.’는 쪽지와 약간의 돈을 남기고 멀리 떠나 버립니다.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오겠다던 엄마가 해를 넘겨서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아키라는 엄마가 보내온 편지 주소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걸지만, 엄마의 성이 바뀐 것을 알고는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엄마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것을 깨닫지만 동생들에게는 이 사실을 숨깁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자신도 행복해지고 싶다던 엄마에 대해 원망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네 아이들에게 생은 잔인한 현실로 다가옵니다. 

전기와 수도, 가스비가 연체되어 차례로 끊기자 아이들은 공원에서 몸을 씻고 빨래를 합니다. 아키라는 어찌 할 수 없어 동생들의 아빠들에게 전화하거나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며 거절합니다. 아키라는 편의점 직원의 도움으로 유통기한이 넘은 식료품을 얻어 동생들에게 먹이며 근근이 살아갑니다. 

어느 날 막내 유키가 혼자 의자 위로 올라가려다 떨어져 몸이 점점 식어갑니다. 결국 숨을 거두었지만 이 세 아이들은 차갑게 굳어버린 어린 유키 앞에서도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아키라는 처음 집으로 옮겨질 때 유키가 들어가 있었던 여행가방 속으로 유키를 집어넣습니다. 

아키라는 ‘비행기를 타고 아빠를 보러가고 싶었던’ 유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매일 비행기가 뜨는 곳 다리 밑에 작은 시신을 묻습니다. 처음 유키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작은 시신이 세상 밑으로 사라지는 때에도 여전히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1,300만 도쿄 시민들이 붐비는 틈에 허름하고 배고픈 모습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공원에서 몸을 씻고 빨래를 해서 철봉대에 널어가며 눈물겨운 하루하루를 보내었건만, 그 공원 주변 수많은 아파트 주민들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날마다 보는 일이었지만 그들 네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Nobody knows!” “아무도 모른다.” 

네 아이들이 자신의 참혹한 일상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도심 길가에 버려진 화초들을 보듬어 씨를 가져다 심은, 베란다 밖 일회용 라면 그릇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꽃들은 아마도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제목처럼 버려진 아이들이나 혹은 노인들, 그리고 이웃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즉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웃에 누가 사는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처지가 이러 이러해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여유를 가지게 될 때, 내가 성공하고 난 다음에 주위를 돌아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차하고 장차 후회를 불러올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왼 편에 있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땅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 그들의 한숨과 고통과 눈물 속에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그늘진 곳, 가난과 소외의 눈물 젖은 곳에 지금도 육신을 입고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 성육신 하신 예수께서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예수 믿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 되려면, 이 땅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어도, 재능과 능력이 많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이’ 되도록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으로 베푸는 생활로 하나님 오른편 자리, 영광의 자리,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야고보서2:14-17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러므로 “(약2:22)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과 행위와 열매가 없는 신앙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믿음이 있는 자는 삶 속에 그 믿음의 행위와 열매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으면 우리의 행위와 삶이 믿는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결국 믿지 못하니까 믿음 없는 삶과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를 거의 짓지 아니하고 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믿음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왼편 자리,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행함으로 온전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오른편, 영광의 자리,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는 것입니다. 항상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설 그 때를 준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슬기로운 처녀처럼 깨어 믿음의 등잔을 준비하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위로 온전케 되어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 오른편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구원을 위해 쓰임받는 지혜롭고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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