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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지키는가? (시 4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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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키는가? (시 48:1-14)
 

1.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하는 것은 어떤 것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경자’라는 분은 인터넷을 통해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다음 몇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직장’입니다. ‘직장은 이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직장을 잘 지켜야 나도 가정도 동료도 나아가 이 사회도 안정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건강’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가정’, 혹은 ‘가족’입니다. 가정을 지키지 않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몇 가지를 더 말했는데요. 사람이 살면서 네 번째로 지켜야 할 것은 ‘보험’, 그리고 다섯 번째는 ‘노후준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분의 직업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십니까?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분이 “나이 들수록 지켜야할 일곱 가지”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아마 연세가 지긋하신 분으로 보이는데요, 그 분이 살면서 지켜야 할 것으로 말한 것과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나이 들수록 집과 환경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주변을 정리정돈하고 필요 없는 물건은 과감히 치워야 합니다. 둘째, 항상 용모를 단정히 하여 초라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젊었을 때는 어떤 옷이든 편하게 입었을지라도, 나이가 들면 나이에 맞는 단정한 옷을 입어서 초라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셋째,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많이 해야 합니다. 넷째, 집에만 있으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해롭기 때문에 회의나 모임에 최대한 많이 참석하면 좋습니다. 다섯째, 언제나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섯째, 자기 몫에 대해서는 자신이 지불하여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서는 안 됩니다. 일곱째, 포기할 것은 미련을 두지 말고 포기 하십시오.” 이 글에 대해 친구 분들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자신을 “농부”라고 하신 분, “1번 사항을 우리 집 냉장고에 적용해야 될 텐데,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니 우리 집에 와서 마누라 교육 좀 시켜주시게.” “아천”이라는 분, “마디마디 가슴에 와 닿는 말인데, 실행하기는 어렵겠어.” “칙칙폭폭”이라는 분, “난 3번이 제일 어려워. 아마도 우리 아버지를 닮아 가는가보네. (아마 말이 많은 분인 모양입니다).” “길손”이라는 분은 1, 2, 3번에 대해 댓글을 달았습니다. “1. 우리 집은 이미 전체가 창고화 되었으므로 적용불가 2. 키가 줄어서 끌리는 바지는 이제부터 걷고 다니겠습니다. 3. 듣기만하고 대꾸를 안 하면 불만 있냐고 마누라가 때립니다.” 

웃으면서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드린 말씀입니다만,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어쩌면 이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이 앞서 소개해드린 분들의 말이 다 맞을 것입니다. 직장, 건강, 가정과 가족, 국가, 그리고 교회 등이 저나 여러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지킨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 뜻대로, 우리가 바라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건강관리를 잘 한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생기는 병이나 사고를 어떻게 막습니까? 아무리 자녀들을 잘 키운다고 해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는 자녀는 많지 않습니다. 직장도 이 사회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이런 것들을 잘 지키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2.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이

1) 본문의 배경

시편 48편은 시온, 즉 예루살렘을 노래하는 시편입니다. 예루살렘은 세상이 볼 때는 보잘 것 없는 곳입니다. 경치가 아름답다거나 어떤 특징을 지녀 매력을 가진 도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장 귀한 곳인데, 그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이 이렇게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는데요. 학자들은 그 배경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합니다. 

➀ 첫째는 이 시편이 여호사밧 왕 때에 쓰여졌다는 주장입니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후, 남 왕국 유다의 네 번째 왕이 된 사람입니다(주전 873~849). 그는 왕이 된 후 汎國家的으로 기도 운동, 예배 운동, 말씀 운동을 펼쳤습니다. 금식을 겸한 회개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했고, 레위인과 제사장이 없는 변방 지역에까지 레위인들을 순회케 하여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적극 권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지위를 높여 그들이 소신껏 사역할 수 있도록 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 그리고 외교 분야의 발전에도 최선을 다해 그 성과가 대단히 컸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20장을 보면, 이 여호사밧 왕 때 한차례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것은 모압, 암몬, 마온, 그리고 아람의 여러 부족들이 연합해서 유다를 공격해 온 일입니다. 그들은 여호사밧 하의 유다가 세력을 뻗어나가면서 주변정세와 국제 무역의 주도권을 쥐게 되자 그것을 끊기 위하여, 그리고 최근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연합군이 아람을 공격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유다를 先制攻擊한 것입니다. 그렇게 공격해 온 모압-암몬-마온-아람 연합군의 숫자는 정말 엄청났습니다. 아무리 유다가 나라 안팎으로 안정되고 힘을 키운 상태라도 감당하기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것을 안 여호사밧 왕은 온 유다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여 ‘이방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유다를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해 유다를 구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호사밧은 바로 그 다음 날 레위 사람로 구성된 찬양대를 불러 그들에게 예복을 입힌 다음 군대 앞에 세워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이 시작될 때 모압-암몬-마온-아람 연합군의 진영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自中之亂이 일어나 자기들끼리 전투를 벌여 결국 모두가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 이 일을 겪으면서 여호사밧과 유다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여호사밧 왕으로 인하여 나라가 신앙이나 정치나 경제나 외교 국방 등 모든 분야에 안정을 얻었을지라도 그것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와 그 백성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➁ 이 시의 두 번째 배경으로 여겨지는 사건은 히스기야 왕 때의 전쟁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남 유다의 13대 왕으로서 주전 730년에 25세의 나이로 왕이 되어 29년을 다스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山堂을 제거하였고, 주상을 깨뜨렸으며, 아세라 우상을 찍어버렸습니다. 또 히스기야 왕은 개인적으로 여호와를 가까이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계명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은 사회와 정치 등 내적인 분야뿐 아니라 외적인 분야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하여 한때 國權이 기울었던 유다가 다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그 어떤 왕들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충성했던 히스기야 왕을 기뻐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만드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북쪽의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공격했습니다. 앗수르는 3년에 걸쳐 끈질기게 사마리아를 공격했고, 결국 이스라엘은 호세아 왕을 마지막으로 망하고 말았으며,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이방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망한 지 8년이 지난 후, 히스기야가 남 유다의 왕이 된지 14년째 되는 해에, 앗수르는 드디어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당시 앗수르 왕은 산헤립이라는 사람이었는데요. 그가 유다를 공격한 표면적인 이유는 히스기야가 反 앗수르 정책을 펼쳤을 뿐 아니라, 유다가 앗수르의 동맹국 블레셋을 침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속내는 앗수르가 아프리카의 覇者인 애굽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그 길에 장애물처럼 버티고 있는 유다가 못마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다를 공격한 앗수르의 공세는 엄청났습니다. 삽시간에 유다의 46개나 되는 성읍을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급히 和親을 요청했습니다(왕하18). 그러면서 자신이 앗수르를 반역하고 블레셋을 공격한 것을 잘못이라 인정하면서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왕하18:14)”를 바치기로 하고, 성전과 왕궁의 보물창고를 다 털고,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혔던 금까지 벗겨내어 앗수르 왕에게 보냈습니다. 정말 굴욕적인 일이었지요. 그러나 앗수르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앗수르는 다시 유다를 공격했습니다(역대하 32장). 유다와 히스기야 왕은 이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 軍이 물을 얻지 못하도록 샘을 막아 버리고, 성을 고쳐 높이 쌓고, 무기를 준비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성을 수비케 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 왕 산헤립과 그의 막강한 군대를 막아낼 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유다를 그 대적의 손에서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천사를 앗수르 진영에 보내 용사들과 지휘관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도 전멸했는데, 그 숫자는 자그마치 18만 5천이나 되었습니다. 이 뜻하지 않은 패배로 산헤립은 앗수르로 물러갔고, 그는 고국에 돌아가자마자 자기 아들들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여호사밧 때와 히스기야 때에 일어난 전쟁의 결과가 똑 같지 않습니까? 여호사밧 때와 마찬가지로 히스기야 때 역시 유다 나라는 모든 면에서 안정되고 성장하고 힘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大軍을 맞아서는 衆寡不敵, 감당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 본문의 배경이 두 사건 중 어느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두 전쟁의 양상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힘이 있을 때였지만, 막상 적들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한 시인은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2) 누가 예루살렘을 지키는가? 

➀ 시인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1).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다고 노래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 5절, “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그리고 6절 7절,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무슨 말입니까? 왕들이 모여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는 것, 그들의 원래 목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애굽이라는 더 큰 나라였다는 것, 그래서 유다는 단지 지나가는 대상일 뿐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보고서는 “놀라고 두려워하여 빨리” 지나갔으며,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도 같은 고통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예루살렘을 “우리 하나님의 성”이라, “거룩한 산”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터가 높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큰 왕의 성”, 즉 위대하신 왕의 성이라,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요새”, 즉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고 노래합니다. 여러분, 시인이 이렇게 예루살렘을 노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제로 예루살렘이 難攻不落의 요새처럼 가장 안전한 성읍이기 때문입니까? 예루살렘이 自然景觀이 秀麗한 곳이기 때문입니까? 예루살렘이 봉우리가 높이 솟은 산 위에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도 정답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인이 예루살렘에 대해 7 가지의 이름을 붙여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과 언약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사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을 그렇게 여기셔서 자신이 거하시는 성을 공격하는 대적들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거하시는 성을 멸시하는 대적들을 직접 치심으로 그곳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임을 모두에게 알리신 것이죠.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 성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장차 이곳을 통해서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실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사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은 유다 사람들 뿐 아니라 온 세계의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피난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➁ 그래서 시인은 12,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시인이 이렇게 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성벽을 따라 돌면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망대의 수를 세어보라고 하시는 것은 적들의 그 막강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의 망대 하나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임을 알라는 뜻입니다. 또한 성벽과 궁전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권하는 이유는 나라의 핵심인 궁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외벽까지 그 어떤 손상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자세히 살펴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성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의미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지켜야 하는 것들은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그것을 제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하나님께서 계셨기에, 사람만 아니라 건축물이나 성벽 하나까지도 안전했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지키실 때 그 어떤 것도 손상을 입지 않고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시면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가족과 직장과 이 땅을 지키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라.”는 이 말씀 속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숨어있습니다. “시온”, 즉 예루살렘 성과 “그 망대들”과 “그의 성벽”과 “그의 궁전”은 사실 그 규모가 작고, 견고하기도 별로라는 사실을 확인하라는 의미가 그 속에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현재 남아있는 예루살렘 성을 보고 계십니다.

“평화의 땅”이라는 뜻의 “예루살렘”은 모세 때에도 존재했던 아주 오래 된 도시입니다. 주전 1천년 경, 다윗이 原住民인 여부스 족을 몰아내고 이 성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한 이후, 무려 36번이나 전쟁에 함락되었고, 점령자의 이름이 바뀌었으며, 열 차례나 무너졌던 아픔이 많은 성이 예루살렘 성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이후, 솔로몬이 성전 산까지 성을 확장하였고, 히스기야 왕 때는 더 큰 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에 의해 성이 무너진 후, 주전 443년경,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再建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재건한 예루살렘 성은 10개의 문과 4개의 망대가 성벽으로 연결된 구조로서 히스기야 왕 때보다 훨씬 축소된 아주 작은 성에 지나지 않았다고 考古學者들은 전합니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城砦, 즉 예루살렘의 舊 市街地(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성문은 1537년 터키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재건된 것입니다. 성벽 둘레의 길이는 약 4km에서 길게는 6km 정도이며, 성벽을 따라 8개의 성문과 성 위에 34개의 탑과 24개의 망루가 있습니다. 이 성을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30분 정도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예루살렘 성과 그 규모를 보여드리고 설명하는 이유는 이 성이 결코 크지도 않고 견고하지도 않은 성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참고로 가까운 부산 금정산성의 규모는 길이가 17km, 성벽의 높이는 낮은 데가 1.5m 높은 데가 3m에 이르며, 남한산성의 경우 둘레가 9km이며 성곽의 높이는 낮게는 3mdo서 높은 데는 7m에 이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주님의 말씀을 받들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허약하고 보잘 것 없는 예루살렘 성벽이 그 막강한 적들의 공격 앞에서 하나도 상하지 않고 그대로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지키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 성을 돌면서 너희가 거하는 이 성이 너희를 결코 안전하게 지켜줄만한 견고한 성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이 땅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 만큼이나 허술하고 약하고 작습니다. 대적들이 겁을 먹을 만한 규모나 강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이 지금까지 그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어떠함을 아시기 바라며, 그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이 땅을 지키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들은 성경 말씀과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지켜 주셨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도 자신을 지키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예루살렘 성을 7가지로 묘사했습니다(1~3).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  “터가 높고” “아름다운” 곳, “큰 왕의 성”, “북방에 있는 시온 산”, 그리고 “요새”, 즉 가장 안전한 피난처! 그러나 예루살렘은 36번이나 함락될 만큼 결코 안전한 성읍이 아니었습니다. 自然景觀이 秀麗한 곳도 아닙니다. 높이 솟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도 아닙니다. 도리어 작고 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시인이 예루살렘을 이렇게 노래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계시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들과 함께 하시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직장에도 계시기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과 직장 역시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 “터가 높고” “아름다운” 곳, “큰 왕의 성”, “북방에 있는 시온 산”, 그리고 “요새”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을 이렇게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어떤 대적의 공격도 막아주실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자신이 거하시는 곳을 스스로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은 시인의 입을 빌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14). 즉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고, 따라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곳도 안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에 여러분과 여러분이 거하는 모든 곳은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피난처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안심하시고, 시인처럼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기보다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여러분을 지키시고 복주시는 여호와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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