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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성공, 인생성공 (느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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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성공, 인생성공 (느 8:1-12)
  

들어가는 말 

백지연 MBC 전 앵커가 국내외의 많은 유명 인사들과 인터뷰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 알마. 2011)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책의 핵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 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능력과 무능력의 차이, 또는 가능과 불가능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크리티컬 매스’를 통과하느냐 통과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이다.”

도대체 크리티컬 매스가 무엇이기에 그것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갈라지는 것입니까?
크리티컬 매스란 물리학에서 나온 개념으로 ‘임계질량’이라고도 합니다.
한마디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충분한 수나 양’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물을 끓이기 위해 필요한 온도는 100도입니다.
99.9도일지라도 물은 끓지 않습니다.
이 100도를 크리티컬 매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이 크리티컬 매스를 통과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크리티컬 매스는 단지 인생의 성공과 실패만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도 크리티컬 매스가 있습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성도는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여전히 가슴이 냉랭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전심으로 마음을 쏟아놓지 못합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락날락합니다.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말씀을 빨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꾸만 자신의 지식으로, 경험으로 선포된 말씀을 깨뜨립니다.
죄 된 마음을 찢어 상한 마음을 드리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배를 드릴 때 크리티컬 매스를 통과하십시오.
그래서 오늘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잠기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느6:15절에서 보았지요?
변화의 하드웨어는 끝났고, 이제 소프트웨어가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변화의 소프트웨어가 무엇입니까? 
영적 재건입니다.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영적재건이 있어야 진정한 축복을 받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스라입니다. 
그러면 에스라가 누구입니까? 
에스라 7장 10절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는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 겸 학사였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깊이 연구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갈급함

영적 재건을 위해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기갈을 느끼는지 아십니까? 
왜 우리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사는 재미를 못 느끼고, 살아갈 힘이 없는지 아십니까? 
마실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먹을 양식이 없어서 기근이 아닙니다. 
하늘의 생수가 고갈되어 기갈이요, 하늘의 양식이 결핍되어 기근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어디에 모였습니까?
“수문 앞 광장에서”
‘수문’은 지금 예루살렘 감람산 옆, 협착한 기드론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문은 물이 나오는 문입니다. 
이 수문은 히스기야가 외적의 침입을 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성 밖에 있던 물을 지하로 터널을 파서 성 안으로 끌어들인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기드론 골짜기에 가면 히스기야 터널이 있습니다. 
지하로 터널을 파 588미터가 굽이굽이 흐릅니다. 
그 물이 빠져나오는 부분에 실로암 연못이 있습니다. 
수문 앞 광장은 그렇게 넓지도 편하지도 않습니다. 
돌과 바위로 덮여 있습니다. 
그곳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언제 모였습니까?
“새벽부터 정오까지”입니다. 
새벽을 6시로 친다면 정오까지 무려 여섯 시간이나 모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였습니까?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입니다. 
남자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여자도 모였습니다. 
여자만 모임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모였습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다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갈급함 때문입니다.

말씀의 능력

사람이 역사를 바꿉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두 마디도 필요 없습니다. 
한 마디만 부딪히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다시 3절을 보십시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여기서 중요한 말은 ‘귀를 기울였다’는 말입니다. 
‘귀를 기울였다’는 이 말을 ‘헤루트’라고 하는데 이 말은 나무에 정교하게 조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32장 16절에 이 단어가 나옵니다.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하나님이 십계명을 돌에 ‘새긴다’ 할 때 ‘새긴다’는 말이 '귀를 기울인다.'는 말입니다. 
마치 조각가가 글자를 새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받을 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가 토머스 목사입니다. 
영국 웨일스 출신인 그는 일찍이 중국에 머물며 선교하다가 아내가 풍토병으로 죽습니다. 절망에 잠겨 있던 그가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들은 것이 그의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선교하기로 결심하고 마침 평양으로 가는 상선 제너럴 셔먼 호에 승선한 것은 1866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원군 시대는 서양 사람을 양이, 즉 서양 오랑캐라 부르며 적대시하고 있었습니다.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 변에 도착하자 조선은 마치 큰일이나 난 것처럼 대포를 쏘며 격렬하게 공격했습니다. 
순식간에 배는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토머스 목사는 성경을 들고 강물에 뛰어들어 육지로 헤엄쳤습니다. 

그가 한문 성경 두 권을 들고 육지에 오르자 한 군인이 그를 막아섰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이 사람은 백정 출신의 박춘권이란 사람이었습니다.
박춘권은 토머스에게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습니다.

나이 26세, 머나먼 웨일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23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떠나 거기서 아내는 죽고 혼자 된 그, 이제 그 자신도 죽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이제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천국 문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기가 피 흘려 죽게 된 조선 땅을 위해 기도한 후 크게 외쳤습니다. 
“예수, 예수!”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두 권의 성경을 박춘권에게 내밀었습니다. 
그가 세 번째 “예수”를 외치는 순간 그의 목은 베어졌고, 대동강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토머스가 죽은 후 박춘권에게 이상한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서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죽어가면서 나에게 준 책은 무슨 책일까?’ 
온갖 궁금증에 사로잡힌 박춘권은 밤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대동강으로 가서 팽개쳐진 성경 두 권을 주워 왔습니다. 
읽어 보니 정부에서 금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한 권은 몰래 숨겨 놓고, 한 권은 혹시 발각될 경우를 대비하여 당시 평양의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박영식은 성경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폈습니다.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읽을 수는 있으나 금서이기 때문에 읽지는 않고 대신 종이가 좋아 집안 전체를 도배질했습니다.
여러분, 벽과 천장까지 온통 성경으로 도배한 집을 상상해보십시오. 
성경으로 도배를 했으니 눈만 뜨면 성경이 보입니다. 
어느 날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는데 말씀이 들어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뭐, 사망과 영생, 죽는 것과 사는 것, 그것이 무슨 말이지?’ 생각하며 또 쳐다보는데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이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놀라운 것은 박영식이 벽에 붙여진 성경을 읽다가 교인이 되었고, 그 집이 훗날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 곧 장대현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바로 1907년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 교회입니다. 
토머스를 목 베어 죽인 박춘권은 그 성경을 읽고, 훗날 영주교회 영수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위대하지 않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보십시오. 
6절입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이 놀라운 광경을 보십니까?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그때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어떤 사람들은 땅에 얼굴을 대고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엎드리는 것

여러분은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을 예배하는 요한계시록의 천상예배를 보십니까? 
요한계시록 4장 10-11절을 보십시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서 엎드려’

예배는 엎드리는 것입니다. 
엎드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말로 가장 많이 쓰인 말이 ‘샤카’입니다. 
이 말이 구약에서 17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냥 몸을 숙이는 겉모습만이 아니라 경외하고 복종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면류관일 것입니다. 
그 면류관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배는 두 가지입니다. 
엎드리고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할 때마다 어떻게 엎드리고 무엇을 드립니까? 
예배를 통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예배의 결과일 뿐이지 예배의 목적은 아닙니다. 
예배의 목적은 내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드려야 받고, 포기해야 얻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는 사람은 아예 입장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드리지 않은 사람에게 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물, 변화의 시작

그러면 그렇게 드리는 예배는 어떤 축복을 가져옵니까? 
느헤미야 8장 8-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진정한 예배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 변화의 징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눈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다가 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예배를 드리면서 우는 분이 많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 의사 이병욱 장로님이 <울어야 합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암 전문가인 이 장로님은 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는 사람은 산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병은 대개 울지 않아서 생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울면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영국은 물론 전 세계가 슬픔에 빠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눈물을 흘렸고,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은 전 영국이 흐느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영국의 심리상담소로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이 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인데 왜 다이애나의 죽음 이후 심리적 육체적 질병들이 줄어든 것일까요? 
학자들은 다이애나 왕세자비로 인해 흘린 눈물이 그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두고 심리학자들은 ‘다이애나 이펙트’(Diana Effect), ‘다이애나 신드롬’(Diana Syndrome)이라고 말합니다. 
다이애나 때문에 흘린 눈물이 나의 상처를 치유한 것입니다.
인간 다이애나 때문에 울다가 병을 치료받았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고 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 느헤미야 8장 9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우리 생의 최고의 순간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염없이 흐르는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그 눈물이 흐르는 순간입니다.
우리 생의 최고의 예배는 눈물로 드리고 예배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최고의 기도는 눈물의 기도이며,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양은 눈물의 찬양입니다.

느헤미야 8장 12절이 마지막입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하나님 앞에서 울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집니다. 
그래서 홈스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웃음과 눈물은 수레의 두 바퀴다. 웃음은 바람의 힘이요 눈물은 물의 힘이다.”
예배를 통해 운 사람들은 진정한 즐거움을 맛보았고, 즐거움을 맛본 사람들은 세상에 가서 나누며 살았습니다. 

세상의 변화가 곧 예배의 능력에서 나왔습니다. 
예배를 통해 울고 치유 받으면 세상에 나가 웃고, 세상을 살립니다. 
모든 것이 예배에 달려 있습니다. 
예배성공, 인생성공!
예배 성공이면 인생성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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