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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말라 (롬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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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말라 (롬 2:1-8)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 ‘나는 다르다’는 오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광복 66주년이 곧 분단 66주년이 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던 평화 통일의 길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새로운 긴장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참 슬픈 현실입니다.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을 가슴 아프게 되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평화의 길, 화해의 길, 상생의 길은 예수를 길이라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마땅히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일체의 장벽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죄인과 의인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사셨습니다. 에베소서의 저자는 이것을 장엄하고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5-16)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십자가를 꼭 붙들 때 너와 나를 가르는 장벽은 무너집니다. 우리 속에 여전히 차별심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님의 참 제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가장 심각한 분열은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의 자부심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멸시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까닭은 복의 매개자로 살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특권으로 이해하고 사유화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나는 다르다’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건강한 관계맺음을 가로막는 질병입니다. 그런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다른 이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한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급기야 자기의 경건생활, 즉 금식과 십일조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이어집니다. 자의식이 넘치는 기도입니다. 아니,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노골적인 자랑질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눅18:11-13) 외적 종교의 척도로 보면 바리새파 사람이 칭찬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허물과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 무지가 낳는 폭력

본문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적시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유대계 기독교인’임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은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방계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시선과 말투에 담긴 우월의식을 보면서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계 기독교인들의 허위의식을 가차 없이 폭로합니다. 그들의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앎과 분리될 수 없지만,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앎은 허위의식이 되거나 교만이 되게 마련입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보면 마치 상처 입은 초식 동물을 공격하는 맹수처럼 구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그들을 믿음 없는 사람으로, 파렴치한 사람으로, 비겁한 사람으로, 의리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제가 가장 경계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사람을 어떤 이미지 속에 가두는 일입니다. 자기가 잠시 경험했던 그 사람의 이미지가 마치 그 사람 자체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마치 유럽에 일주일 다녀온 후에 유럽 문화에 대한 책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일면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일면이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에 다른 면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면만 보는 것이 편견입니다. 그런 이들은 눈이 한쪽에 몰린 ‘광어족’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불쾌한 것은 남에 의해 규정 당하는 것입니다. 규정되는 순간 나의 다른 가능성들은 부정됩니다. ‘나쁜 사람’으로 규정되면 나는 선한 일을 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그를 마치 납으로 만든 상자 속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만나보면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무척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사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사정을 듣고 나면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본래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 혹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사람만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지금 세계는 참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미국 발 경제위기에 세계가 들끓고 있고, 영국에서 벌어진 폭동은 지금의 세계 체제가 활화산 위에 세워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불만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폭발 직전입니다. 사람들이 참 사나워졌습니다. 지금 자기들의 삶이 어려운 것은 외부에서 유입된 어떤 사람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탓하는 마음은 폭력으로 번지기 일쑤입니다. 노르웨이 학살극을 벌였던 브레이비크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변화되어가는 유럽을 정화하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은 위험하고 더럽다는 생각 속에 이미 테러와 공포가 담겨 있습니다. 무한 경쟁에 돌입한 세계는 유토피아(utopia)가 아니라 디스토피아(dystopia, 암울한 세상)가 되었습니다.

‘너’를 인정하고 준중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야말로 지옥을 짓는 마음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금과옥조로 여겨야 할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남을 심판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린다’고 말합니다. 

• 회개의 기회

그런데 언제 그런다는 것이지요? 현실이 암담할수록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남을 모욕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순간 입술이 붓는다거나, 남을 멸시하는 눈빛을 보일 때면 즉시 다래끼가 난다든지, 남을 때리려는 사람의 손이 뺨에 가서 달라붙는다든지, 악의를 품는 순간 가슴에 통증을 느낀다든지…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가끔 이런 상상을 하면서 웃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발걸음은 너무 느립니다. 심판은 언제나 유보되는 것 같습니다. 악인이 번성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복제 인간 문제를 다룬 영화 <아일랜드>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미래 세계에서 사람들은 질병에 대비하기 위해 자기와 유전자가 똑같은 복제인간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유사시에는 그들의 장기를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복제인간들은 자기가 복제인간인 줄을 모르고, 환경재앙으로 지구가 멸망한 후에 자기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정체를 알게 된 링컨-6-에코는 맥코드라는 사내의 도움을 받아 갇혀 지내던 곳에서 탈출합니다. 그는 나중에 맥코드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요?” 잠시 망설이던 맥코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 그건 말이지…. 인간이 뭔가 간절히 바라는 걸 비는 대상인데 말이야…. 문제는 빌 때마다 그가 사람의 뒤통수를 친다는 것이지.” 공감하시는 분이 많으신 것 같군요.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심판을 즉각적으로 수행하시지 않는 까닭은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유예의 시간,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하나님의 분노의 손을 막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너그러우심, 오래 참으심을 하나님의 무능 혹은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좋을 대로 삽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일본을 떠올렸습니다. 얼마 전 일본 우익 인사들이 독도를 방문하겠다면서 김포공항에 와서 쇼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한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는 지역이 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가깝지만 참 먼 나라입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지사는 교과서에 종군 위안부의 존재를 기술하는 일을 반대한다면서, 위안부들 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창부가 된 여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면 위안부를 불쌍한 피해자라는 관점뿐만 아니라 그 여성들의 비천한 본성 부분도 기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1994년에는 자민당 내에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이 만들어졌는데 그들의 활동 방침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일방적인 단죄와 자학적인 역사인식을 재검토하고, 공정한 사실의 검증에 입각해 역사의 흐름을 해명하고 일본 및 일본인의 명예와 긍지의 회복을 기해야 한다.” 그들은 진정한 명예와 긍지의 회복은 국가적 차원에서 참회하고 사죄하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1일 일본 법원은 일제에 동원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자신의 이름 혹은 가족의 이름을 명부에서 빼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불쾌하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정도의 인격권을 침해당한 것은 아니니 참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부러뜨려 놓고 불편하겠지만 잇몸으로 밥을 먹으라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저런 상황들을 보면서 ‘진노를 쌓는다’는 말이 자꾸만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인간의 오만을 무엇보다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심판은 반드시 옵니다. 

• 발돋움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한 말이나 생각에 따라 갚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에 따라 갚아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남에게 보이려고 금식하고 또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어쩌다 선한 일을 하면 감사의 인사를 기대합니다. 바라는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선을 행할 마음과 능력을 달라고도 기도해야 하지만, 선을 행하고는 그 일을 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도 마음이 더 옹색해지거나 어두워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옆 동네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이것과 통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불교를 받아들여 수많은 절을 짓고 불서를 간행한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달마대사를 초대한 자리에서 물었다고 합니다. “내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마는 ‘무無’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내가 굉장한 일을 했지 하는 자부심은 오히려 영혼에 독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선한 일을 하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복을 강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그게 좋아서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자리에까지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사욕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십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신 것처럼 살아갑니다. 혹시 ‘업신여기다’라는 단어가 하나님(神)이 없다고 여기는 데서 유래된 말은 아니겠지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벗이 되어 살아가는 평화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평화 통일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나라의 꿈을 우리 속에 심어주시면서, 그 꿈을 이루는 일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남북의 교류와 협력이 늘어나고, 군사적 적대 행위가 중단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분단 의식을 내몰고 평화를 만드는 자로서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상함도 해함도 없는 나라에 대한 주님의 꿈이 우리 마음속에서 그리고 분쟁의 땅인 한반도에서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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