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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의 영광을! (벧전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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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영광을! (벧전 5:7-11)


영국 옥스퍼드 의과대학 연구팀은 어린아이와 어른의 웃음에 대해 연구하다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어린아이는 하루에 400∼5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년이 되면 이 웃음은 하루 15∼20번으로 감소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기쁨과 웃음 속에서 태어나고 점점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며 끝난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 기쁨 속에 잘 웃던 사람이 삶을 살아가며 기쁨을 상실한 채 웃음을 잃어가는 이유는 삶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오는 불안과 염려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고민하고 염려하는 일들 가운데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란 글에서 한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걱정 중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진짜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결국 사람들은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절대 염려해서는 안 되는 날이 매주 적어도 이틀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 이틀은 모든 염려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날입니다.
그 이틀 중 하루는 어제입니다. 어제의 실수나 염려, 어제 저지른 큰 실책이나 잘못, 어제의 아픔과 고통 등, 어제는 우리 관할 밖의 일인데 무엇하러 어제에 대해 염려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해시계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실 수 있으며 시간을 거꾸로 돌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미 영원 속으로 흘러가 버린 과거의 어느 날 저지른 실수들에 대해 염려해 보았자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거기서는 아무런 복이나 유익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돈을 다 갖다 준다 해도 어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미 저지른 행위나 내뱉은 말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요 이미 기록한 글을 지워버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염려해서는 안 되는 날이 하루 더 있는데 그것은 내일입니다. 내일의 역경, 내일의 짐, 내일에 있게 될 더 큰 문제들, 내일이 안고 있는 위험 등. 내일 일어날지도 모를 일들 중에서 그 대부분은 우리가 즉시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기정사실입니다. 내일의 태양은 내일 떠오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찬란한 태양이든 구름 뒤에 숨은 태양이든 아무튼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 내일이 올 때까지 우리는 사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오직 한 날만 남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이라는 날입니다. 누구든지 한 날의 전쟁은 거뜬히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너져 내리는 이유는 우리가 오늘이라는 하루에다 그 무거운 영원한 시간인 어제와 내일이라는 날들을 더 얹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 중압감이 우리를 짓누르기 때문에 우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치는 이유는 오늘 생긴 일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제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해 후회하거나 비통해 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일 일어날지도 모를 어떤 일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세상 염려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아더 랭크라는 영국의 실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항상 불안했습니다.
‘자금 사정이 안 좋은데 이러다가 부도라도 내면 어떻게 하나?’ ‘매출액이 줄어드는데 어떻게 해야 늘릴 수 있을까?’

이렇듯 많은 염려 가운데 살던 그는 ‘염려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는 매주 수요일을 염려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걱정거리가 생긴 날짜와 내용들을 적어 상자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날 그 쪽지들을 꺼내 보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수요일 날, 그는 상자 속의 메모지를 살펴보다가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자에 넣을 당시만 해도 큰 문젯거리였던 그것이 훗날 다시 읽을 즈음에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상자를 계속 활용하면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이 살면서 크게 고민하며 염려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염려의 무가치성에 대해서 이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과 염려는 다릅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해결 방안을 찾되, 전전긍긍하며 염려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려와 걱정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밀려오는 염려와 걱정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염려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우리의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염려는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염려가 밀려올 때는 “하나님, 염려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줄 알면서도 자꾸 염려하게 됩니다. 제 생각을 주님께서 주장해 주시고 저의 염려의 목록들을 조목조목 아뢰오니 맡아 해결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내어 맡기면, 주님께서 그 염려들을 명쾌한 응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우리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 사도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권면합니다. 바울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염려에 계속해서 매여 있지 말라고 한 반면, 베드로 사도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삶에 때때로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염려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염려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염려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부족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전능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만사형통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내가 그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근심, 걱정, 불안, 공포 등등 염려를 뜻하는 많은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에 나가면 많은 배가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때면 흔히 배를 타고 나가서 낚시를 하기도 하고 모터보트를 타고 질주를 하기도 하지만 조금 파도가 치면 어떻습니까? 얼른 육지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바다 한 가운데서 그런 풍랑을 만난다면 당장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하지만 수만 톤 수십만 톤의 커다란 배라고 하면 웬만한 파도에는 끄덕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태풍이 불어온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태풍을 피해서 항구로 들어가죠. 미련스럽게 태풍 속으로 들어갈 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데 불가피하게 그 태풍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태풍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파도를 옆으로가 아닌 정면으로 마주보고 나가면 파도에 배가 앞뒤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며 흔들리기는 해도 무사히 그 파도를 타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요 태풍 한 가운데는 태풍의 눈이라고 해서 고요한 그런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염려라는 것은 내가 부족한 존재라는 깨닫는 데서부터 생겨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내 부족한 부분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어떻게 메울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해결 방안에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한 마디로 모자라면 채우면 됩니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을 매울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냥 손만 놓고 울고만 있을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나 혼자서 안 되는 것도 옆에서 거들어주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혼자서 들 수 없는 짐도 함께 들면 가뿐하게 들 수 있습니다. 아니 여럿이 매달려서도 쩔쩔매는 그런 짐도 이삿짐센터 분들 보면 혼자서도 가뿐히 지고 옮깁니다. 그러면 그런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부분은 더 큰 것을 옮길 수 있는 그런 장치를 사용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염려하고 있기보다는 해결방안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염려가 되니까 큰 탈났다고 동동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그 방도를 찾아나가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엔 꼭 엄마나 아빠를 찾습니다. 무서워도 엄마, 배고파도 엄마, 졸려도 엄마, 잔뜩 어질러 놓고도 엄마 그러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그냥 울어버립니다. 그러면 야단을 칠망정 어찌됐든 엄마가 해결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알잖아요. 나는 못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이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자동차를 고치는 카센터라든지 정비공장으로 연락해서 수리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전에는 바퀴에 펑크라도 났다 하면 내가 내려서 예비 타이어로 바꾸어 끼느라 땀을 뻘뻘 흘렸지만 지금은 그냥 콜 센터에 전화하면 그들이 와서 다 해주고 가잖습니까? 음식을 하나 해도 전에는 내가 다 한다고 끙끙 거렸는데 요즘에는 맞춤형이 얼마나 많은지 그냥 갖다가 끓이거나 데우기만 하면 되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어떤 음식을 불가피하게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해도 요즘은 인터넷을 뒤져보면 만드는 법이 소위 레스피라고 해서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요리사를 부르면 됩니다. 문제는 돈이 없는 것이라고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이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신다고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는데 염려하고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맡기면 됩니다. 어떻게 맡깁니까?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염려가 되거든 그러면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단 감사함으로 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 모든 해결책을 다 갖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全知)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전능(全能) 다 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 아버지임을 깨닫는다면, 그것도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이신데 염려만 하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는 것이요 그것도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 작은 머리로 이 좁은 생각으로 끙끙거릴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면 됩니다. 모든 염려는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묶어 버리고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룀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당당히 이기고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물고 뜯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빈틈을 노리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이는 잠도 자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내 작은 생각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께 날마다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요즘 체인점들이 많습니다. 체인점들은 물건이 모자란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모자라는 물건이 뭐라고 본사로 전화만 하면 다 알아서 갖다가 줍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컴퓨터로 다 체크가 돼서 자동으로 모자란 만큼 채워주는 시스템화가 되어 있는 곳도 많습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많이 쌓아놓지도 않습니다. 또한 강도나 어떤 도적이 염려가 된다면 보안 장치를 한다든가 경호원을 고용하면 됩니다. 아무리 우는 사자가 노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파리 차량 같은 것에 타고 있으면 이건 떼로 덤벼들어도 끄떡없습니다. 아니 탱크를 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자가 아니라 그 어떤 동물이 덤벼들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근신하라 깨어라 하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뜻도 되고 그만큼 조심하라는 뜻도 됩니다. 악한 마귀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대적하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매고 푸는 권세입니다. 악한 마귀의 모든 역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묶어 버리십시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한 마귀의 모든 역사를 꽁꽁 묶어버리십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의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모든 은혜 아래 당당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악한 마귀의 가장 큰 무기가 염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공포에 질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모든 염려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묶고 물리치십시오. 당당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악한 마귀, 귀신 뭐 할 것 없이 염려할 것도 없고 무서워할 것도 없습니다. 당당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명령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오직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이 있도록 하나님 앞에 깨어있어 부르짖으십시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누가 돌아가지 않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감사함으로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실 터이니,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항상 축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하며 축복하셨습니다. 감사하면서 복 주시기를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이 좋으신 아버지가 되심에 감사하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복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에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줄행랑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뭐 기관총을 가지고 쏘아대던 사람도 탱크가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도망치기 바쁩니다. 그 엄청난 골리앗도, 온 이스라엘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그 블레셋의 대장군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는 작은 다윗, 믿음의 사람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 아닙니까? 그냥 돌 한 개에 끝나버렸습니다. 그날 전쟁이 돌 한 개로 끝나버렸습니다. 기억하세요. 우리가 염려하고 있으면 마귀는 점점 더 신이 나서 우리를 조여듭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염려를 꾸짖고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한 마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묶고 꾸짖어 물리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리십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면 더욱 감사가 넘치게 되고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뭐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채우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감사하십시오. 뭐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깨어 있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다가 깰 때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를 힘들께 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가정도 있을 것입니다. 가족 간의 어떤 문제로 인해서 염려하는 가정도 있을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또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우리에게 벅찬 어떤 문제가 우리를 가로막기도 할 것입니다. 건강 때문에 염려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잠을 못 자서 힘들어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제대로 먹질 못해서 염려하기도 하고, 더위에 지치고, 장마에 지치고, 사람에 지치고, 돈에 지치고, 사업 때문에 지치고, 이래저래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그렇습니까? 

아니 기도는 해야 되겠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염려가 되십니까? 그것 역시 속은 것입니다. 분해서 못 견디겠다고요? 뭐가 분한데요? 나보다 못난 사람이 나보다 잘 살고 잘 돼서 분합니까? 생각을 바꾸시면 됩니다. 뭐가 잘 사는 것이고 뭐가 잘 된 것입니까? 보는 시각만 바꾸면 됩니다. 성경에도 먹을 것이 있고 입은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했고 그나마 없으면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채워주시고 까마귀를 통해서 먹여주실 것으로 믿으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 당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 때문에 힘들고 뭐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모든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내 생각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안 된다고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악한 마귀가 자꾸 그런 마음을 넣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이제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 아무개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개를 사랑한다. 아무개를 용서한다. 하나님의 채우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해결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다.” 항상 고백하시고 당당하게 선포하시고 부족하기에 더욱 넉넉하게 채워지기를 선포하십시오. 
이를 위해 날마다 깨어있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우리를 격려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분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고 내가 힘들어하는 모든 것의 해결책이 바로 하나님의 손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은혜입니다. 나로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이 되게 하십니다. 나는 오직 그렇게 선포하면 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미 영원한 영광에 들어갔습니다. 벌써 들어갔습니다. 넉넉히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잠깐 고난이 있습니다. 잠깐 힘든 일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힘이 듭니다. 미칠 것 같습니까? 하지만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잠깐 고난을 당한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하나님은 잠깐의 어려움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는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결국 잠시의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비슷한 말을 각도를 달리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온전하게 하고, 굳건하게 하고, 강하게 하고, 터를 견고하게 하고 그러니까 이건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친히 그렇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에 깨어 있으십시오. 쉽게 생각합시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죽기를 각오하면 두려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죽는 날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옮겨지는 날인데 그러면 더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떠날지라도 분명한 것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날마다 깨어 있어 기도하며 매사에 조심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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