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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상제물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고전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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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제물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고전 8:1-13)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흑백논리로 설명하기 힘든 문제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술 담배의 문제, 노래방을 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의 문제, 복권을 사거나, 주식에 투자를 하는 문제, 주일에 식당에 가는 문제나 취미활동으로 스포츠를 하는 등등 입니다. 같은 신앙인이라도 어떤 분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운 반면에 어떤 분들은 똑 같은 문제를 놓고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도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영역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고린도 교회의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문화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중에서도 신전제사는 고린도 지역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신전 제단에 바쳐진 고기는 대개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일부는 제단에서 불태워지고, 그리고 일부는 사제의 몫으로 주고, 나머지는 제주가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사제들은 받은 고기 중에 필요한 양 만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시장에 싸게 내다 팔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시장에서 고기를 살 때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제단에 받쳤던 고기 중 제주의 몫은 이웃들과 잔치를 벌이며 함께 먹었습니다.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웃의 잔치에 초대 받고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면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으려면 잔치에 참석하지 말아야 했고, 그러면 이웃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되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이나 이방인들 가운데 개종한 성도들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면서 먹지 않는 자들을 비난하면서 무시하였습니다. 반면에 신앙인 약한 자들과 유대인가운데 개종한자들은 우상에게 받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니까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먹는 자들을 향해서 자유주의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로 이런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을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된다, 안된다’라는 명확한 답변으로 답변하지 않고 복음의 원리로 설명하는데 그 첫 번째가 지식의 원리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도 우상 제물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 무엇입니까? 사도바울과 성도들이 우상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4절 말씀에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란 말은 우상이란 실재하는 신이 아니라 공허한 허상의 존재라는 뜻이며, 참된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는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고 하지만 진짜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곳곳에서 우상을 '허망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시 115:4-7절에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우상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사 44:15절에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덮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 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사도 바울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지식과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도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전의 우상들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신들은 다 만들어진 신이요, 거짓 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바쳐진 제물들도 형식상만 제물이지 실제로는 제물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그 우상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신이라 부를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분명히 우상은 사람이 만들어 세운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신이라 섬길 따름입니다. 따라서 이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 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떡이면 그냥 떡이며, 고기는 단순히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른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면 우상의 제물이라 해서 거리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참된 지식이 성도들로 하여금 우상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해 자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세상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신은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우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을 하나님은 가장 높은 위치의 존재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신앙의 참 자유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해 양심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행 23:1절에서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신앙문제에 부딪혔을 때 성경에도 분명하지 않으면 각자 믿음의 양심에 따라 기도 중에 결정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신학 논쟁 가운데 소위 “아디아포라 논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말은 헬라어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 “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이란 뜻으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성도 각 개인이 양심에 따라 결정하고 판단할 문제라는 말입니다.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이 제물이 우상에게 절한 것이므로 먹으면 죄가 된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양심에 꺼리면서 먹으면 7절 말씀대로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 나가서는 더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4절 말씀처럼 모든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고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신이신 줄 믿고,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 무슨 특별한 귀신의 힘이 내재된 것이 아니라고 믿으며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먹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식, 즉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분뿐이라는 믿음의 지식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 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우상의 신전에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은 그 신을 실제로 있는 것으로 알고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과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 우상의 존재를 믿지 않으니까 우상 앞에 바쳤던 제물을 먹는다 해도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지식이 약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자유롭게 먹는 것을 보고는 시험에 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 본문 1절에 나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 말은 사랑의 원리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접근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상 제물인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지식으로 접근해서는 해결책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14:6절에서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라는 뜻입니다. 참 사람으로 접근하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밤을 무서워합니다. 캄캄한 밤에 혼자서는 시골집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못 갑니다. 귀신이나 도깨비라도 나올 것만 같아 무서워서 못갑니다. 어머니가 귀신이나 도깨비는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잘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이들은 머리로는 이해가 돼도 무서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이럴 때는 아이를 억지로 보낼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의 손을 잡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화장실 앞에서 기다려 줘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우상 제단 앞에 바쳐졌던 음식은 먹으려면 꺼림칙합니다. 설명을 듣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먹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모릅니다. 

오늘 본문 9절에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2절에는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하여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상 제물은 신앙 양심상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자칫 잘못하면 다른 성도들을 힘들게 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유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 제물보다는 술 담배 이야기를 하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술 담배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온 지 오래되지 못한 초신자들도 술 담배를 끊으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교회 나온 지 오래된 성도나 중직자가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먼저는 오래된 성도가 술 담배 하는 것을 보면 마침 위선자를 보는 것 같아서 교회 나오고 싶은 마음이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동안 열심히 술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던 초신자가 오래 믿은 성도가 술 담배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담대함이 생겨서 마음대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12절 말씀대로 형제에게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양심을 상하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먹어도 괜찮지만 그런데 그것을 보고 혹시 시험에 빠질 자가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내 믿음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자유스러움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걸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우상의 제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마치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 앞에 올려진 제물은 먹지 않겠다며,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이제 막 우상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우상을 섬기던 시절의 그 어떠한 행위와 제약으로부터 철저히 해방되어 살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우상숭배를 많이 하던 분들이 교회 나온 후에 모두 끊고 살면서, 만일 우상의 제물을 조금이라도 손대었다가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까 해서 노심초사 조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허랑방탕하던 생활을 청산하면서 술 담배도 끊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분들로 하여금 시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신앙의 자유라고 할지라도 연약한 믿음의 성도들을 위해서 삼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리고 고전 10:23-24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자기 신앙 양심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믿음이 약한 형제가 상처가 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우상제물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려는 교훈은 너무 분명합니다. 우상 제물에 대하여 자유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시대의 백성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자유와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백성들의 특권이며 복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가 무한정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유함이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형제로 하여금 죄 가운데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식과 자유를 잘 사용하여 주의 교회를 바로 세워 나가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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