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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안에는 (골 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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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는 (골 2:8-15)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옛날에는 시골 학생들이 가까운 도시에 있는 중고등학교로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보면, 객차 안에 자리가 있는데도 거기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문간에 서서 손잡이만 붙잡고 가는 통학생들이 가끔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객차 안에 들어가면 답답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렇게 기차에 매달리듯이 타고 가는 것이 스스로 멋있게 여겨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무척 위험한 행동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객차 안의 좌석에 안전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절대로 기차 밖으로 떨어질 염려가 없지만, 문간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돌발 사태가 생길 때 기차에서 떨어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교회'라는 '구원 열차'를 타고 있는 교인이라도 '예수 안'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는 신자는 구원의 완성에까지 안전하게 이를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하고 '문간' 주위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교인은 언제든지 이단의 미혹에 아주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이단의 가르치는 것들이란 조금만 유의해서 살펴보면 모두 다 세속적 "철학"에서 베껴 온 것이든지 아니면 아예 사기꾼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없는 것을 사람이 만들어 내어 억지로 권위를 씌운 "사람의 유전"이든지 혹은 기독교가 아닌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가르치는 것에다가 기독교 교리를 혼합해서 변색시켜 놓은 것 - 이런 유치하고 헛된 것들일 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중에서도 이단에 쉽게 넘어가는 자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경우를 가리켜 "노략"당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은 '강도를 당하다' 혹은 '유괴를 당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몽땅 털린다든지, 유괴범에게 붙잡혀 자기 몸 전체가 볼모가 되는 것은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이며 통분할 일이겠습니까?
신앙생활하다가 이단에 넘어가는 것은 바로 그렇게 '노략'당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아니 더 최악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교인들이 그처럼 쉽게 '이단을 좇게' 됩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좇음" 자체부터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는 교인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확실히 따르는 신앙', 이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세상의 얄팍한 철학적 사색이나 사기꾼의 말장난에 불과한 이단에도 그처럼 쉽게 넘어가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좇는' 신앙, 9절에서 강조하는 대로 '그 안에' 거하는 신앙이란 과연 어떤 상태의 신앙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결코 이단에 미혹당할 리가 없는 신자, 즉 '예수 안'에서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신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하신 중보자로 모시면서 그 신성의 충만함을 공급받는 신자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다른 그 어느 누구의 중재도 거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공급받을 줄 아는 신자는 다른 미혹에 끌려갈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그 점을 본문 9절과 10절에서 밝히기를 "9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존재한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신성"이 충만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한 모든 필요조건들, 사람이 하나님을 뵙고 알고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그 모든 충분조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소유하고 계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물론 예수님께서는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충만한 신성의 소유자'가 "육체로" 즉 '완전한 인성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과 함께 "거하심"으로써 비로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그 둘 사이의 교통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독생자의 화육강세'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이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중보자'가 성립된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각 신자가 "그 안에서 충만하여지는 것"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신성에 관한 모든 은혜'를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골로새교회를 위협하던 이단들은 바로 여기서부터 크게 달랐습니다.
그 이단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중보자를 끼워 넣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네들이 만들어낸 규례들로써 그 중간을 막아 놓고 그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했습니다. 
헬라의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네들만이 그 어떤 신비한 영적 능력과 지혜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런 소위 '영적 엘리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평신도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오도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점에 대하여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정확하게 주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따르는 신자는 다른 중보자 필요 없이 오직 '예수 안에서' 그 신성이 충만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모든 영적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다."라고 깨우쳐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되신" 즉 '그 어떤 통치자보다 높고 그 어떤 세력보다도 강하신' 예수님 외에 다른 중보자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앙이란 것이 아직 '예수 안'에 확실히 거하지 못하고 있는 교인은 이단 앞에 가장 취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1대1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 주님의 충만한 신성으로부터 무한히 공급되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그대로 '그 마음이 비어 있고 청소가 되어 있는 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충만한 것'이 전혀 없는 방에는 귀신 하나 정도가 아니라 일곱이라도 언제든지 너끈하게 들어와서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가 '누워서 떡먹기'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처럼 예수님을 자신의 유일한 중보자로 모시지 못하고 있는 교인은 그 대신에 '제3자'의 중재에 의존하려는 연약에 쉽게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외면적으로 교회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 교인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모시지 못하고 그저 목사를 신앙생활의 중개인 정도로 착각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목사를 통해 일주일에 딱 한 번 설교 듣는 것만으로 말씀 생활은 다 끝나고, 교역자가 새벽마다 대신 해 주는 기도만으로 기도 생활도 다 때우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일수록 어디 '기도의 능이 있는 권사가 있다.'라는 소리만 들어도 귀가 번쩍하며 찾아가기 십상입니다.
그처럼 자신이 '예수 안'에 있지 못하고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신앙생활에 젖어드는 사람은 무슨 '월요 성자, 화요 성자...' 등등 일주일 내내 자기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는 성자들이 있다는 천주교의 이단 사설이 아주 '은혜롭게' 들리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인격으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좇지 않고 있으니 그 중간에 자꾸 '이상한 사람'들을 집어넣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사실만 확실히 깨달아도 '헷갈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신성의 충만함을 소유하고 계신 성자 예수님 안에 확실히 거하고 그 그리스도만을 유일하신 중보자로 모시고 좇음으로써 이단에 대하여 가장 안전한 '영적 면역성'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세례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진실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 성례를 받는 신자입니다.

이단이 대단히 미혹적인 것 같지만 기독교의 기본적 성례 중에 하나인 세례를 통하여 확실히 '예수 사람으로 인을 친 신자'는 결코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1절과 12절에 "11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를 가리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라고 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가 된 표식으로 사람이 손으로 행하는 할례를 시행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할례인 세례는 이제 사람의 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성례라고 한 것입니다.
비록 '사람인 목사'가 물을 부으며 시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할례"가 되는 이유는 그 성례의 진짜 중요한 집례 과정은 예수님께서 친히 다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가 죄 용서함 받음으로써 "육적 몸을 벗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벗김을 당하시고 못 박히신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세례가 상징하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말할 때 '죄 씻음'이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한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것"에 대한 표식입니다.
즉 세례를 받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와 사망의 저주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 장사 지낸 바 되는 것이며, 반면에 우리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바로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믿고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아야만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즉 그저 형식적으로 끝나는 의식이 아니라 진정 '그리스도의 할례'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도 크나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시행하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된다는 이 진짜 중요한 사실은 확신하지 못하고 그저 육신에 표를 남기는 그 의식 자체에만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의식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비단 신약에 와서 뿐만 아니라 이미 구약의 신명기 10장 17절에서부터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으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기가 받는 세례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가운데 그 성례를 받기만 해도 사실 웬만한 이단 사설에 쉽게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날의 지상교회들 안에서 이 귀중하고 뜻 깊은 세례가 너무나도 가볍게 치러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과 공회 앞에서 고백하고 서약하는 내용에 대해서 몇 주만 지나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경우에는 세례를 받는 바로 그 순간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저 나이가 찼다고, 교회 웬만큼 다녔다고, 혹은 교회에서 결혼 주례를 받기 위해서 얼렁뚱땅 행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은 것입니다.
일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신앙을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고백하면서 받는 세례조차 그런 식으로 치러진다면, 그 뒤에 따라올 신앙생활의 수준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뻔한 것이고 이단의 미혹에 얼마나 취약한 교인이 될지는 자명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새 신자 교육'을 실시할 때에 그 '세례 서약'의 내용과 의미를 일깨워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우리 교회에 등록하시는 교인들 중에서도 사실상 자기가 도대체 무슨 신앙고백과 서약을 하고 세례를 받았는지 전혀 기억도, 아니 애당초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한 교인들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세례의 의미를, 그 서약의 내용을 지금 알고 계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런 까닭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고, 그 신앙과 일치되는 경건생활에 힘쓸 것을 결단하며, 이 모든 신앙생활을 당회의 관할과 치리를 통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과 증거하는 공회 앞에서 손을 들고 서약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런 진실한 신앙고백과 서약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언약의 인침'을 받은 신자, '크리스천의 표식'이 분명한 신자는 이단이 어떻게 해 볼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도장'이 똑똑하게 찍혀 있는 신자를 도대체 어느 누가 어떻게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손으로 한 할례'에 그친 교인은 여전히 '666의 표'를 그의 이마에 찍으려는 이단에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신자는 그 어떤 마귀의 미혹도 너끈히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구원 얻고 중생 받았음을 확신함으로써 은혜와 승리를 항상 체험하며 사는 신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확실히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 이제 그 '구원의 확신' 안에서 성화생활에만 일로매진하는 것 역시 '예수 안'에 안전하게 거하고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13절 이하 15절에 기록하기를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사실들, 즉 단 한 분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 온전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세례로써 인침을 받은 신자가 그 남은 생을 통하여 날마다 자신의 심령과 생활을 통하여 되새기고 체험하게 되는 구체적인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정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고 그 안에 확실히 거하게 된 신자는, 우선 그 '마음' 속에서 자신이 죄 용서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 즉 '구원 확신'에 대한 감격이 날마다 새롭게 사무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실로 "범죄와 무할례로 완전히 죽었던" 나 자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즉 내가 얻게 된 새 생명, 영원한 부활의 생명은 그 질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새 생명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좀 더 고차원이고 신자의 부활하게 될 몸은 그보다는 약간 질이 떨어지는 생명체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실 때 "그와 함께"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새 생명을 보증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즉 '죄인에게 불리한 조항으로 가득 차 있는 증서'를 완전히 '파기'시켜 버리기 위하여 그것을 아예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던 그 율법의 증서, 그 율법의 고발, 그 율법의 정죄 모두가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깨끗이 해결됨으로써 저와 여러분은 이제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위협하는 그 어떤 '블랙 메일'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단에 끌려가지 않게 만드는 또 하나의 소중한 요인은 바로 그 예수 안에 있는 '삶'을 통하여 얻게 되는 '승리 체험'입니다.
즉 "정사와 권세를 완전히 벗기고 밝히 드려나게 하는" 십자가의 승리를 자신의 생활 속에서도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10절 하반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만을 중보자와 구세주로 삼게 되면 이 땅의 다른 모든 정치적 권력이나 세속적 세력들은 십자가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체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죄'만 지워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승리'까지 확실히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과 '연전연승의 체험'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가 어찌 요상한 이단에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 놀라운 구속의 은총보다 더 좋은 복음이 세상의 어떤 이단 사설에 있다고, 이처럼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강하고 높은 이단 교주가 어디에 있다고 거기에 말려 들어가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 사역을 통하여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게 된 자, 중생을 통하여 얻은 새 삶 속에서 모든 것에 대한 승리의 자신을 얻고 달려가고 있는 자 - 이런 확실한 '신행일치'의 신자를 이 땅의 헛된 이단들이 넘어뜨리려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될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머리로만 아는 교인이나 세례는 받았지만 진짜 중생의 체험이 없는 교인은 그야말로 '이단의 밥'입니다.
구원의 확신조차 없는 교인은 '당신은 정확하게 언제 중생 받았습니까?'라는 한마디만으로도 간단히 넘어갑니다.
 
세상의 그 어떤 '정사와 권세'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십자가 승리'를 자신의 생활 속에서 체험할 줄 모르는 교인은 무슨 '우리 성경공부시간에 한 번만 오시면 아주 특별한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지극히 말초신경적인 미혹에도 어처구니없게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구원의 확신'보다 더 큰 은혜는 없으며 세상 그 누구도 '십자가 안에서의 승리 생활'보다 더 큰 축복을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신함으로써 끝까지 요동치 않고 '성화의 완성' 즉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는 영화'의 자리까지 꼭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가끔 탈북자들의 수기나 인터뷰를 보면 그들이 남한의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김일성이나 김정일에 대하여 언급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야 물론 '김일성'이라고 이름 석 자만으로 부르는 것에 지극히 익숙하고, 만약 거기에 무슨 명칭을 덧붙인다면 '독재자 김일성' 따위로 부르는 데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북한 동포들은 아예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무슨 '위대한 지도자'라든지 '경애하는 수령' 따위의 존칭으로 깍듯이 부르는 것이 생활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종교화'된 가운데 살아 왔었습니다.
  
그러니 그러던 사람들이 비록 탈북을 하고 몸은 자유 대한의 품에 안겼지만, 그들의 뇌리 깊숙이 박혀 있던 김일성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은 쉽게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아직까지도 자기 주위에서 그냥 "김일성"이라고만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면, 이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심령이란 것은 한번 어디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곳이 잘못된 곳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정말 다시 빠져나오기가 힘든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이요 '세속적 초등 철학'이요 아니 그저 '속임수'에 불과한 이단들이 사람의 마음을 그처럼 쉽게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몰몬교나 통일교는 '가족애'를 강조하는 종교인 것처럼 위장하는 가운데 메마른 가족관계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있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아주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교주가 자기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요 '인 치는 천사'요 더 나아가서 아예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소위 '신천지'는 지금 특히 대형교회들을 집중 공략하면서 근본적으로 파괴시키고 있는 형편입니다.
어느 이단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지금 우리나라 안에 자기 자신을 '재림하신 예수'나 '하나님'으로 주장하는 이단 교주들이 확인된 것만 해도 44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결코 '그리스도를 좇는 신앙'이 아님이 너무나 명백한데도 수많은 교인들이 이런 이단에게 간단히 넘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원래부터 '그리스도의 언저리'에, '교회 문간 근처'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확실히 자리 잡고 있는 신자는 절대로 이단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을 유일하신 중보자로 모시고 그 분의 충만한 신성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성도는 영적 건강상태가 아주 양호한, 결코 이단의 병균이 침범할 수 없는 '기초가 탄탄한 신자'입니다.
진실한 신앙을 확실히 고백하고 성실한 교회중심의 생활을 서약하면서 세례를 받은 성도는 마귀가 아예 넘볼 수도 없는 '어린 양의 인이 그 이마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신자'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체험 가운데 신행일치의 삶을 날마다 영위하고 있는 신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있는 택자'인 까닭에 이단이 손끝 하나도 건드릴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이단에게 자신의 영혼을 '노략'당하지 않도록 더욱 철저하게 '그리스도만을 좇는' 신앙과 '예수 안에서만 사는' 생활을 굳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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