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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권세와 나라 (단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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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권세와 나라 
        
지난 주 금요일인 8월 19일, 우리나라 주식 시장에 커다란 충격이 몰려왔습니다. 하루만에 코스피 주가지수가 115포인트나 떨어지면서, 올해 들어 가장 낮은 주가 지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코스피 주가지수 2,000포인트를 넘는 기록을 세우고 있었는데, 주가지수가 한 번 폭락하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계속해서 폭락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따지자면 19일 하루 만에 65조원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루 만에 손실된 액수로는 사상 최대 액수라고 합니다. 

주식 시장이 폭락하면서 우리나라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주식투자 손실 때문에 자살한 사람만도 열흘 만에 4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가가 떨어질 때가 오히려 투자의 적기라고 판단했던 여러 개인 투자자들이 빚을 더 내서 적극적으로 투자했다가 더 큰 손실을 보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서도 최근에 있었던 주가 폭락으로 인해서 여러 모로 피해를 입은 분들이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새 힘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긍휼히 여기셔서 최근 계속되는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이 나라를 일으켜 주시도록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만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사회를 가리켜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시대의 변화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고, 또 너무도 빠른 속도로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변화를 따라가기도 힘든 시대가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입니다. 

이처럼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수많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시대의 모습을 가리켜서 어떤 사람은, 미국에서 기침을 하면 한국은 독감이 걸리는 시대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뉴욕에서는 태풍이 몰아닥치는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는 것만 같은 시대, 캄캄한 흑암만이 가득하고 빛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오늘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몇 년 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 위기가 전 세계 경제를 큰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과연 오늘날과 같은 세계 구조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염려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 2007년에 미국에서 발생했던 경제 위기로 인해서 세계 경제가 한 차례 크게 휘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달 들어서 발생하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미국의 신용 위기에서 비롯되어 왔기 때문에, 과연 지금의 세계 경제 구조가 어느 정도나 지탱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또 한 차례 커다란 경제적인 위기가 닥쳐와서 온 세상에 큰 혼란이 닥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세운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한 때 이 세상은 동과 서로 양분되어서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력이 팽팽하게 대결을 벌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가 먼 옛날도 아니고 불과 2, 30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세계 질서가 마치 영원토록 지속될 것처럼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공산권 국가들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철의 장막처럼 견고해 보였던 소련이라는 나라도 지금은 그저 역사 속에 사라진 옛 나라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올해 초에는 중동 지방에서부터 민주화 혁명에 대한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이집트에서는 30년 동안을 장기 집권하면서 현대판 파라오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던 무바라크 대통령이 시위대에 밀려서 퇴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튀니지나 시리아와 같은 중동권 나라에서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피흘리며 투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그 끝이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보기에는 결코 깨어질 것 같지 않은 절대 권력도, 무너져 내릴 것 같지 않은 강대국의 권세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경제 질서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새로운 변화가 닥칠 것이고, 전혀 새로운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언제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여전히 이 세상은 불확실성 속에 갇혀 있고, 이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 길 잃고 헤매고 있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 마음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을 만한 곳이 있을까요? 어디에서 우리가 변함이 없고, 언제나 한결 같은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인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변함이 없고 한결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다니엘이 살았던 그 시대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나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라는 것은 똑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권세와 나라가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그 나라를 향하여 눈을 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말씀을 통해서 이 혼란한 시대 가운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6장까지가 다니엘서의 전반부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바벨론 땅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믿음의 시련들에 대한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처음에 포로로 끌려왔을 때, 왕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했었던 이야기, 다니엘의 친구들이 풀무불에 들어갔던 이야기, 또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었던 이야기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니엘서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1-6장 사이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7-12장까지는 다니엘서의 후반부입니다. 7장부터 다니엘서는 전반부하고는 그 성격이 아주 달라지게 됩니다. 전반부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겪었던 영웅적인 모험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7장부터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다니엘이 보았던 여러 가지 신비한 환상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7장 이후의 다니엘서에서는 앞에서와 같은 흥미진진한 내용들은 별로 나오지 않고,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같은 어려운 환상에 대한 내용들이 대폭적으로 등장합니다. 

오늘 살펴보는 다니엘 7장의 내용도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환상은 다니엘이 언제 본 환상입니까? 1절 말씀을 보면, “바벨론 벨사살 왕 원년에 다니엘이 그의 침상에서 꿈을 꾸며 머리 속으로 환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죽고 그의 아들 벨사살이 왕위에 올랐던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은 꿈 속에서 신비로운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환상은 사실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력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의 내용이 2~8절까지에서 나옵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네 마리의 짐승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 짐승들의 모습은 이상한 정도를 넘어서서 아주 기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단7:2~8절까지를 함께 교독해 보겠습니다. 

다니엘이 보았던 첫 번째 짐승은 4절에 나옵니다. 그 짐승은 마치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 날개 같은 날개가 있습니다. 5절에 나오는 두 번째 짐승은 곰과 같은 짐승이고, 6절의 세 번째 짐승은 표범같은 짐승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짐승이 7절에서 나오는 데, 이 짐승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무섭고, 또 강한 짐승입니다. 이 네 번째 짐승은 앞서 나온 다른 짐승들보다도 훨씬 기괴하게 생겼고, 또 가장 강한 짐승입니다. 특징적으로 이 짐승은 10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 괴물같은 짐승입니다. 

물론 이런 짐승들이 실제로 존재할리는 없습니다. 이 짐승들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앞으로 일어나게 될 세계적인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짐승들입니다. 여기 나오는 네 마리의 짐승들은 모두 바벨론 제국 이후에 일어나게 될 강력한 세계 대제국들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앞에서도 이와 비슷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단 2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한 신상에 대한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느부갓네살 왕은 꿈에서 한 큰 신상을 보았는데, 그 신상의 머리는 순금이었고, 가슴과 두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며, 그 종아리는 쇠로 되어 있고, 그 발은 쇠와 진흙이 섞여 있는 신상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 꿈을 해석해 주면서 그 신상의 각 신체 부위들이 사실은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될 여러 나라들을 상징한다라고 해석했습니다. 머리는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가슴은 그 뒤에 일어날 어떤 나라, 배와 넓적다리는 또 그 다음 나라, 종아리와 발은 또 그 다음의 나라, 이런 식으로 각각 그 신상은 바벨론 이후에 일어나게 될 세계의 대제국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나오는 네 마리의 짐승들도 바벨론 이후의 세계 제국들을 상징합니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 사자와 같은 짐승은 바벨론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오는 곰과 같은 짐승은 바벨론 이후에 등장한 메대와 바사 제국을 나타내고, 세 번째 나오는 표범과 같은 짐승은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무섭고 강한 짐승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라고 평가받는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꼭 맞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짐승은 꼭 이런 나라를 상징하고 있다라고 성경 해석을 고정해 놓는 것은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본래 의미를 축소시키고 제한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짐승은 이런 나라를 상징한다라고 하나의 짐승을 꼭 하나의 나라로 대응시켜 해석하기 보다는 단지, 여기 나오는 네 마리의 짐승들은 이 세상의 역사를 만들어오고, 인간의 세속사를 이끌어왔던 세계의 모든 대제국들을 상징한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꼭 바벨론, 그리스, 로마라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세상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역사상의 모든 강대국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이 네 마리의 짐승들이 과연 어떤 나라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냐 하는 점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최종적인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다니엘 7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13-14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네 마리의 짐승들이 나타나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다니엘 앞에 보였던 것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 위에 있는 천상의 세계였습니다. 9절을 보면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왕좌는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좌 위에 좌정하셔서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모습을 다니엘은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이 강처럼 흘러 나오면서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내고, 그 좌우 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셔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다니엘은 바라봅니다. 하늘 높은 곳 위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땅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과 두려운 모습과는 전혀 상관없이 견고하게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온 땅과 만민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온 땅을 어지럽게 만들던 그 네 번째 짐승이 심판을 받습니다. 땅 위에서는 그 무엇도 맞설 수 없었던 강력한 상대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이 네 번째 짐승 역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심판당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 후에 다니엘이 본 것이 13-14절입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좀 특별한 어떤 존재를 봅니다. 다니엘은 그를 가리켜서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이것을 “바르 아나쉬”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인자”는 즉 “사람의 아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뜻합니다. 
    
다니엘은 하늘 위에 펼쳐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어떤 사람 같은 존재를 봅니다. 천상의 영적인 존재들 앞에서 이 사람 같은 존재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사람이 감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으면서도, 그는 전혀 위축되어 보이지도 않았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도, 이 사람 같은 존재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 신기한 광경을 눈여겨 보고 있는데,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원한 권세와 나라를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고, 모든 권세가 그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의 나라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영원한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 같은 존재가 통치하게 되는 나라는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대체 이 사람 같은 존재, 인자 같은 이가 누구이길래, 이토록 놀라운 권세와 나라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지칭할 때, 항상 ‘인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지칭하던 “인자”라는 말은 바로 여기, 단7:13절에서 따오신 말이었습니다. 

천상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넘겨받으셨던 그 인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바로 이 “인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드러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권세를 넘겨받은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네 마리의 짐승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은 후입니다. 이 네 마리의 짐승들은 인간이 세운 세계의 대제국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장본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힘과 폭력의 통치를 지향하던 세력들입니다. 바로 그런 세력들과 세계의 대제국들이 무너져 내린 후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권세와 영광을 얻으시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힘차게 열게 되실 것입니다. 

이 말은 아직은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와 나라를 받으시는 때가 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지 않은 시대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고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짐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 흉폭하고 기괴하게 생긴 네 마리의 짐승들이 여전히 그 힘과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어두운 시대를 우리가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때로는 어둠의 권세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1절을 보면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네 번째 짐승에게서 나온 뿔이 성도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하고 싸움을 벌였는데, 그 뿔이 성도들을 이겼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닌 세상 나라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탄과 마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짐승의 시대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두움의 시대라는 데에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은 이 혼란스러운 짐승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 먼 곳에서부터 힘차게 밝아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저 멀리서 동 터 오르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새벽빛에 고정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하기 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권세와 나라를 얻게 되시기까지는 분명히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그 때가 되기 까지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확실한 것은 짐승의 권세가 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권세와 나라를 얻게 되기까지는 분명히 일정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성도들은 이 짐승의 시대 속에서 환란과 고통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 때가 오기까지는 우리는 이 어두움의 시대를, 이 폭력의 시대를, 짐승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안에서 우리는 패배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노예처럼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꺽은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승리자로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살았던 곳이 어디입니까? 그는 바벨론 땅에서, 포로로서 살아갔습니다.  다니엘이 살던 바벨론 땅은 온갖 우상의 세력들이 들끓는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어떻게든 다니엘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수많은 대적들이 우글대던 적대적인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진정한 포로였던 적이 없습니다. 다니엘서 1~6장까지에 나오는 사건들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처음 시작부터 그의 믿음에 도전하는 어둠의 세력들에 직면합니다. 단1장에서 처음 포로로 끌려가서 느부갓네살 왕을 모시기 위한 훈련을 받을 때에,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먹을 것인가, 먹지 말 것인가라는 선택 앞에 섰습니다. 왕이 주는 음식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진수성찬이었지만, 그 음식들은 하나같이 우상 앞에 제물로 드려졌던 음식들입니다. 순결한 신앙양심을 가지고 있던 다니엘의 믿음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것은 왕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고, 그 것은 곧 왕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다니엘의 결정은 무엇이었습니까? 다니엘의 결정은 먹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치고, 심지어는 자기의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상 앞에 제물로 드려졌던 음식을 결코 먹을 수 없다라는 것이 다니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다니엘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가 패배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당당하게 승리합니다. 채식만 했던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의 건강상태가 왕의 진미를 먹었던 다른 사람들의 건강 상태보다 훨씬 더 뛰어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기로 작정했던 이 소년들의 순결하고 헌신된 모습 속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다니엘 3장에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커다란 신상을 만들어 놓고, 누구든지 그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면 풀무불 속에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번에도 그들의 목숨보다고 믿음을 지키기로 다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느부갓네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풀무불에 던져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능히 우리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기도, 왕이 세운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진노하면서 그들을 풀무불에 던져 넣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풀무불에 들어간 세 친구들보다도 오히려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풀무불에 던진 사람이 세 명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내가 보니깐 저 불 속에 네 사람이 다니는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이번에도 하나님은 짐승과도 같이 흉폭한 바벨론의 권세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당신의 백성들을 친히 보호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다니엘 6장에서는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는 위험을 당합니다. 메대의 다리오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을 때, 다니엘의 정적들이 다니엘을 모함하기 위해서 이런 음모를 꾸몄습니다. 다리오 왕에게 간언하기를, 누구든지 왕 외의 다른 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소서. 자신이 마치 신처럼 떠받들여지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다리오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서 금령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금령에 걸린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 아끼는 신하인 다니엘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 내려진 것을 알면서도 이전과 다름없이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열려진 창문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은 왕의 명령을 여겼다는 죄목으로 사자굴에 던져집니다. 다니엘을 없애고자 했던 자들은 아마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세상 역사 속에서 준동하고 있는 악한 영들은 지금도 선하고 의로운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치밀한 방해 공작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다니엘을 제거하고자 했던 이들은 분명 사람들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을 대적한 악한 세력, 짐승의 세력, 사탄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서 사자들의 입을 막고 다니엘을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어린 시절에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평생을 그 땅에서 살면서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고, 또 그의 믿음을 꺽어 놓고자 하는 수많은 악한 세력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땅에서 어두움의 시대를, 폭력의 시대를, 짐승의 시대를 살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어두움의 시대 속에서 빛으로서 살아갔습니다. 포로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았습니다. 패배자가 아닌 승리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사람이 바로 다니엘입니다. 그 어두운 바벨론 땅에서 저 멀리서 힘차게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줄 알았던 다니엘은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자 승리자로서 오늘 우리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 우리가 다니엘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저 네 마리의 짐승들이 울부짖으며 돌아다니는 것 같은 폭력과 불확실성의 시대, 어두움과 악한 영의 시대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위험이 다가올지, 앞으로 이 시대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는 저 하늘 위에 견고하며, 결코 흔들림 없이 좌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실 그 때가 시시각각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 영원한 승리의 나라, 인자 같은 이가 다스리실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가 이제 곧 임하십니다. 

짐승과 우상의 권세가 판을 치던 바벨론 땅에서도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 살았던 다니엘과 같이 오늘 우리도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어둠의 세력들 속에서도 승리하는 용사들로 세워지길 바랍니다. 이제 곧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권세와 영원한 나라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이 짐승의 시대를 이겨내고,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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