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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삼상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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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삼상 16:1-13)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다가 버림받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왕입니다. 영국 속담에 “왕의 밥그릇도 깨지면 강아지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속담에 적합한 사람이 사울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정말 영광스러운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교만에 빠집니다. 결국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한 사람도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처럼 끝까지 하나님께 붙어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시험이 오고 어떤 유혹이 와도 하나님만 붙잡고 믿음의 길을 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울 왕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된 사람이 다윗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다윗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구약에서 무려 800번이나 나오고 신약에서는 60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행 13:22에 보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정하셨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는 내용입니다. 사울 왕이 타락을 하니 사울을 이어서 왕이 될 사람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웠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본문은 다양한 영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영적 진리 중에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하나님은 약한 자를 쓰십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이새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일곱 아들과 함께 몸을 성결하게 하고 사무엘 앞에 섭니다. 사무엘은 거기에 모여 있는 일곱 아들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택하신 왕이라고 생각하고 기름을 부을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모인 일곱 아들 중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들판에서 양을 지키고 있는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을 불러옵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보니 하나님께서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새의 아들 중에서 막내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
   
여기서 다윗이 막내였다는 말은 그가 단순히 형제 서열상 말째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다윗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약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라는 그 시대의 지도자가 이새의 집에 방문을 하니 이새는 자기 아들들 중에서 가장 부족하게 보였던 다윗을 들판으로 보내서 양을 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형제 중에 가장 말째요 약자였던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말째요 약자였던 다윗을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답게 써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나오는 다윗의 선택을 보면서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가 공회 앞에서 했던 설교가 생각납니다. 행 4:11에 보면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처럼 생각하고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머릿돌처럼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집을 지을 때 머릿돌이 가장 중요합니다. 머릿돌은 기준이 되는 돌입니다. 이스라엘의 건축가들은 머릿돌을 중심으로 건물을 지었습니다. 머릿돌은 건물의 벽과 벽을 연결해주는 필수적인 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건축자들은 건축이 끝나면 이 머릿돌에 자기의 이름을 써놓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많은 민족 중에서 유대인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신 7:7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은 유대민족처럼 수효가 적고 약한 나라를 인류구원을 이루는 구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민족으로 사용하신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시대에 대한민국에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경제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위상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높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종말의 시간표에서 어쩌면 이스라엘 다음으로 중요한 나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인구비례로 보면 세계 제1의 선교사파송국가가 되게 하셨고,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의 파트너로 대한민국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사실 세계에 내세울 것이 있습니까? 인구가 많습니까? 자원이 풍부합니까? 너무나 가진 것 없고 작은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세계선교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쓰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강하고 능력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인을 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서 40년간 목자생활을 하고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신뢰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만약 모세가 40세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던 나이에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40세의 모세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쓰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당사자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큰일을 한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신뢰하게 되고 그 결과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교만은 가장 무서운 영적인 독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약함 때문에 눌린 분이 계시면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해결하십시오.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데 힘을 쓴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쓰시는 분입니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성실한 자를 쓰십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일곱 아들 중에서 왕으로 기름부을 아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이새에게 묻습니다.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대답합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서 우리를 주목시키는 말이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무엘이 자기 집에 온다면 다윗도 관심을 가지고 쫓아 왔을 법도 한데 다윗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의 아버지가 다윗에게 양을 치고 있으라고 했기 때문에 할 수없이 양을 친 것이지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사무엘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고약한 아들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양을 버려두고 사무엘이 있는 집으로 왔을지도 모릅니다. 혹 집으로 오지 않았어도 사무엘이 왔는데 자기만 빠진 그 상황에 화가 나서 양을 돌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실하게 양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습니다.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종살이를 하면서도 성실하게 일해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요셉에게 모든 재산까지 맡길 정도로 요셉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요셉의 성실함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요셉에게 감옥총무를 맡겼던 것입니다. 요셉은 옥중에서 모범적인 죄수로 일을 하고 있을 때 왕의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깊은 밤 성전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베드로는 바다에서 그물을 고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쓰셨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은 밖에서 자기 양떼를 치다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식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능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쓰십니다. 또 죄가 많은 사람도 쓰십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쓰시는 법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는 기준이 나옵니다. 성경에서는 몇 가지 기준을 말하는데 첫째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으므로 나는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면 심판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또 하나의 심판의 기준은 충성됨입니다. 충성됨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실함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맡겨진 달란트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맡겨진 달란트에 충실하지 못했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소리를 듣고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신령한 생활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령한 생활에 대해서 오해한 사람들이 자기의 생활에 성실하지 못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일만 힘을 씁니다. 신령한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 하는 생활입니다.
   
11세기 독일에 살았던 왕 ‘하인리히 3세’는 어느 날 왕궁 생활에 대한 깊은 회의와 허무를 느껴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을 찾아가 수도원장에게 수도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가 수도사가 되려는 동기가 올바르지 않다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폐하,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규율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수도사가 되려면 폐하도 이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우리 수도원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 수도원 원장인 저와 이 수도원에서 지도하는 모든 스승들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거기에도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알겠소. 그렇게 하겠소.” “그러면 이제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폐하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셔서 백성 다스리는 일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위한 수도사가 될 수 없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는 현장에서 성실해야 합니다. 사업하는 이들은 사업의 현장에서 성실해야 합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성실해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인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말씀드렸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인정받도록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상상에서 인정받도록 성실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목사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보이는 목사, 보이는 직장 상사, 보이는 부모에게도 인정을 못 받는데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은 부모님의 눈보다, 직장 상사의 눈 보다, 목사의 눈보다 높습니다.
   
유명한 성공학자인 지그 지글러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고도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재능이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이다” 쉽게 말하면 많은 재능이 그 사람의 값을 높여주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값은 그 사람의 삶의 자세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삶의 자세 중에 하나는 성실함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사람을 쓰십니다. 
 

3. 하나님은 중심이 하나님과 맞는 사람을 쓰십니다. 
   
사람은 용모와 키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이라는 이새의 큰 아들의 외모를 보고 그를 왕으로 기름 부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절입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엘리압은 외모는 멋있었는데 중심이 하나님과 일치 하지 않아서 왕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셔서 사용하시는 분명한 이유는 그의 중심이 하나님과 맞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얼짱’과 ‘몸짱’이란 말이 있습니다. ‘얼짱’이란 얼굴이 괜찮게 생긴 사람을 말하는 것 같고, ‘몸짱’이란 몸매가 날씬한 사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유행한다는 것은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만큼 외모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는 말입니다. 아마 이런 풍토는 TV의 영향 일 것입니다. TV에서 너무 외모 중심으로 사람을 뽑고 세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케이블 여성채널 동아TV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프로그램 제목이 [도전 신데렐라]였다고 합니다. 평범한 외모의 여성을 성형수술과 치아미백, 헤어 및 메이크업, 피부관리, 다이어트, 패션 등 파격적인 외적 변신과 함께 전문가로부터 모델워킹교습과 이미지 메이킹 등을 통해 ‘미인’으로 탈바꿈시켜주는 100일 간의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입니다. 처음 모집 당시, 1200명이 지원했습니다. 제작사 측은 이 들 중 3명을 선발해 이들의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과정을 방송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1200명이 지원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만큼 현대 여성들은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외모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어떤 금실 좋은 부부가 딸을 낳고 나서부터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불화가 깊어지면서 결국에는 파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딸아이가 아버지 어머니 그 어느 쪽도 닮지 않았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의심이 결국 불화를 낳고 불화는 파국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어머니가 성형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결혼 전에 얼굴을 고치고 성형 이전의 사진을 모두 없애 버렸기에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딸의 얼굴은 성형 전의 아내를 빼다 박은 얼굴이었습니다.
   
벧전 3:3-4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젊은이들에게 부탁합니다. 평생의 반려자를 고를 때 외모에 치중하지 마세요. 외모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중심입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 전설 같은 이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큰 농장을 경영하는 ‘테일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때에 한 젊은이가 와서는 갈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집에서 일하면서 먹고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까? 힘 꽤나 쓸 것 같아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고는 창고가 딸린 작은 방에 기거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젊은이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농장 주인의 딸과 그 젊은 청년이 서로 눈이 맞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농장 주인은 청년과 자기의 딸을 번갈아 보더니 딸을 향해서 “얘야!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이 사람의 가문은 어떤지, 이 사람의 인격이 어떤지 네가 어떻게 아냐? 저 창고 방에 살면서 남의 집에서 하인노릇이나 하는 녀석과 결혼을 한다니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면서 그 젊은 청년을 내쫓아버렸습니다. 

어느덧 세월은 30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농장주인 ‘테일러’씨는 창고를 새로 수축하기 위해서 청소를 하다가 기둥에 새겨진 ‘James. A. Gafield’라는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30년 전 창고 방에 살면서 자신의 딸과 사랑을 속삭였던 그 청년이 자기의 이름을 새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 ‘James. A. Gafield’라는 이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입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현직 대통령의 이름이 ‘James. A. Gafield’이었던 것입니다. 30년 전 자기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청혼했던 바로 그 청년이 현직 대통령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겉모양만 보고 자신의 딸을 줄 수 없다고 내쫓아버렸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대통령의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했답니다. 그가 사람을 볼 줄 몰랐던 것입니다. 외모보다 중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기뻐하셔서 그를 쓰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일곱 형들하고는 중심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 점을 주목해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면 두 사람의 제사의 차이를 육신의 눈으로는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에게 믿음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 11:4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는 믿음은 없이 모양만 갖춘 제사였던 것입니다.
   
히 11:6에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의식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을 상대하지 말고 하나님을 상대하며 하십시오. 그것이 믿음이며 그런 중심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을 쓰십니다. 
   
13절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영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에게 감동되었다는 말은 자기 생각이나 자기 감정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성령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는 찬송생활입니다. 성령께 사로잡히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송을 합니다.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찬송과 기도에 응답하셔서 옥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할 때 찬송하고 기도하십시오. 바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옥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행복합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자꾸만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성령 충만하여 찬송을 좋아했습니다. 시 119:164에 보면 다윗이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노래를 지어서 불렀던 싱어 송 라이터(sing a song writer)였습니다. 시편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반주하며 자기가 불렀습니다. 수금을 타는 솜씨는 특별했습니다.
   
사울에게 악령이 역사하여 아플 때 다윗이 사울 왕 앞에서 수금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사울에게 역사하던 악령이 떠나고 사울의 병이 상쾌하게 나았습니다. 찬송에 영적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찬송을 하면 젖소도 젖을 짜는 양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젖소의 품명 중에 홀스타인이라는 소가 있습니다. 희고 검은 얼룩무늬가 있는 젖소입니다. 그 소가 전에는 한 마리가 약 600 파운드 젖을 짰습니다. 그런데 찬송가를 들려주며 기르니 4750 파운드의 젖을 짠다고 합니다. 같은 젖소인데 찬송가를 들려주니 무려 8배에 가까운 양의 젖을 짜는 것입니다.
   
성령이 떠나면 악령이 역사를 하는데 악령이 역사하면 인생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을 떠나니 사울에게 악령이 역사를 했습니다. 악령이 사울에게 했던 일이 번뇌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많은 번뇌로 인해서 불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번뇌라는 말은 국어사전에서는 ‘마음이 시달려서 괴롭다’는 뜻이고, 히브리 원어에서는 ‘두렵다. 무섭다’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왕이었습니다. 누구도 사울에게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잘 훈련된 군인들이 사울을 경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무서울 것이 없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악령이 역사하니 사울은 무서웠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악령은 사울을 불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고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는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즉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통해서 악령이 사울에게 역사했고, 사울의 목을 졸랐던 것입니다.
   
또 성령을 소멸하고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는 욕심입니다. 약 1:15을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욕심을 비우십시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실 것이고 그 결과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악한 영이 역사할 때는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가 모두 나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악한 영이 들어가면 개인이 망하고, 가정이 망하고, 나라가 망합니다.
   
몇 년 전 일입니다. 68세, 65세, 63세 되는 삼 남매가 땅을 공동으로 샀습니다. 땅 값이 올라가서 팔려고 하니까 누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생은 당장 돈이 필요해서 팔아야 하는데 안 된다고 하니 남매간에 싸움이 붙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큰 형이 꿩 잡는 총으로 누나와 동생을 쏴서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본인은 농약 먹고 죽었습니다. 셋 다 죽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흔히 재산다툼이다. 형제간에 불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마음에 악한 영이 역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에 방해 되는 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을 비워야 악령의 역사가 물러갑니다.

사실인지 유머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에게 교인이 한 분이 찾아 와서 “목사님, 우리 개가 한 마리 죽었는데 장례식 좀 치러 주세요.”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무슨 개를 장례식을 합니까? 다른 교회 가서 알아보세요. 나는 그런 거 안 합니다. 그까짓 개 그냥 묻으면 되는 것이지 무슨 장례식까지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인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제 개가 좀 비쌉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요즘 비싼 개는 한 마리에 오천만 원, 일억 원 하는 개가 있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 개가 비싸서 보험에 들었습니다. 보험료가 수 천만원 나오는데 목사님이 장례식을 하면 사례비를 한 오백만 원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시험이 들었습니다. “아, 그러면 그 개가 진작 예수 믿는다고 말을 해야지, 이제 그렇게 말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사람이 물질의 유혹이 오고, 이성의 유혹이 오고, 명예의 유혹이 오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욕심을 비우십시오. 그래야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충만 할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시다. 위대한 삶은 능력이나 외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삶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쓰임 받는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귀한 인생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은 약한 자를 쓰십니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성실한 자를 쓰십니다.
   3. 하나님은 중심이 하나님과 맞는 사람을 쓰십니다.
   4. 하나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을 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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