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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된 안디옥 교회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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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안디옥 교회 (행 13:1-3) 
 
 
13장부터 사도행전 후반부로 구분한 까닭은 예루살렘 교회 중심의 사역이 안디옥 교회 중심으로 분명하게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전반부에서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1:8a)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면, 후반부에서는 팔레스타인 본토를 떠나 본격적으로 “땅 끝까지”(1:8b)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위해 기존의 예루살렘 교회 대신 안디옥 교회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쓰신 안디옥 교회가 가진 특징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과 순교를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며 신실히 순종하고 있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더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1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가 선택된 이유는 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더 적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로, 안디옥은 로마제국 3대 도시(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중의 하나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유대 지역으로 한정하지 않고 세계로 확장하려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리적 측면에서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보다 더 적합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자체적으로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두 직분은 하나님의 뜻을 통찰하고 이해하는 은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자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안디옥 교회는 큰 흉년의 때에 자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냈고(11:29-30), 바울 일행은 전도 여행 후에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의존되어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유대인의 독특한 관습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예루살렘 교회가 오직 유대인 출신 사도들을 지도자로 둔 것에 비해 안디옥 교회의 리더들은 출신성분과 배경이 다양했습니다. “바나바”는 구부로 출신의 레위인이었고(4:36), “시므온”은 “니게르”라는 라틴어가 ‘검은 자’(Negro)라는 뜻과 연관되어 아프리카 출신으로 추정되곤 합니다. “루기오”는 “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마나엔”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인데, 세례 요한을 죽였던 헤롯 안디바와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면 사회적 신분이 높았겠지요. “사울”은 정통 히브리인이면서 로마인 신분도 가진 사람입니다(16:37; 빌 3:5). 특정 부류만 모인 교회가 아니라 비교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예루살렘 교회도 에디오피아 내시와 고넬료의 회심(8:26-39; 10장),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파한 사건(11:19-20) 등에서 이방인의 회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허용된 예외적 사건인양 이방인 선교에 적극적이진 않았습니다. 유대적인 특성과 유대인 성도 간의 결속력이 매우 강해서 이방인 성도가 동화되어 함께 교제하긴 힘든 상태였습니다. 교회는 어느 시대의 누구라도 지체가 될 수 있는 보편성(Catholicity)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적 속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려면 유대주의 특성이 너무 강한 예루살렘 교회보다 보편성을 갖춘 안디옥 교회가 보다 더 적절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뜻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2a) 임했습니다. ‘섬기다’(leitourgevw, 레이투르게오)는 단어는 공적인 일을 행한다는 의미인데, 제사장이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그들이 주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라고 번역했습니다. 금식까지 한 것으로 봐서 특별히 마음을 모아 주님께 예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령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을 지에 대해서는 1절의 선지자들 중 한 명을 통해서였을 거라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분명한 점은 교회가 공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에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적 사명은 교회가 함께 깨달아야 하지요.

요한계시록 2-3장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7번 반복됩니다. 성령님께서 교회에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을 귀가 없으면 듣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한 선지자가 통찰하여 말하고 교회가 동의했든 동시에 여러 명이 이해했든, 결과적으로 안디옥 교회는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2b)는 것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일인데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뜻을 명확히 분별할 수 있는 장성함이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교회에 무슨 뜻을 두셨으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명확히 깨닫고 순종할 수 있으려면 교회의 성숙성이 필요합니다. 들을 귀조차 없는 미성숙한 상태라면 세우신 교사를 통해 성령님께서 말씀하실지라도 교사 개인의 의견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회의에서 다수결로 결정되면 무조건 성령님의 뜻인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안디옥 교회가 그 정도로 미성숙한 상태였다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에 합당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뜻을 위한 도구로 쓰시기에 합당할 만한 충분한 성숙함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처럼 12사도들의 권위가 떠받치고 있는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잡다한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11장 26절을 보면 바나바와 사울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디옥 교회를 쓰시기 전에 집중적으로 교육하셔서 미리 준비시키셨습니다. 성도들 입장에서 말하자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날 만큼 성실하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준비시켜서 쓰시는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3년을 같은 교실에서 신학을 배워도 입학 때의 자기 생각 그대로 졸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닫고 참 그리스도인 같이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강의를 똑 같이 들어도 어렴풋이 감을 잡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명확하게 깨달아 가르치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듣는 귀가 생기기까지 참으로 열심히 배웁니다. 반면 대충 꾀부리며 시간만 보낸 사람은 점점 알아듣지 못해서 흥미마저 잃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막 4:24)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한 번 듣고 흘려버리지 않고, 듣는 말씀마다 열심히 헤아리는 중에 성숙해갑니다. 성숙은 결코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을 주실 때 철저히 준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숙성은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3)는 말씀에도 여러모로 잘 나타납니다. 그들은 순종함에 있어서 금식과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즉시 순종하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신중하게 행했음을 봅니다. 여기서 “안수”는 일종의 성별 예식입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이 최고 리더였는데 누가 안수했을까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을 안수하기 위해 예루살렘 사도들을 초청하지 않고 교회 자체에서 해결했습니다. 안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개념이나 직분의 높고 낮음을 구별하는 계급적인 마음이 없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보내니라”(ajpevlusan, 아펠뤼산)고 번역된 단어는 직역하면 ‘해방하다’입니다. 어떤 장소로 파송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안디옥 교회에서 담당하고 있던 직분의 의무에서 풀어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성숙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도 다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미성숙할수록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따로 일 때가 많고, 유익이 있을 때만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의 입장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교회의 기둥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내고 나면 이전보다 훨씬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손실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단순히 순종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했다면, 바나바와 바울의 입장에서도 ‘내가 없으면 이 교회는 어떻게 하나’라고 염려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 교회를 키우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면서도 막상 실제로 아픔을 감당해야할 순간이 되면 기존에 누리던 특권들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 힘과 노력으로 쌓아올린 공든 탑을 고스란히 남에게 빼앗기는 듯 억울한 심정을 가지기가 오히려 쉽지요. 여러모로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은혜를 감당할 만큼 준비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일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그릇마다 용도가 다르듯이 교회마다 사명이 다릅니다. 큰 교회에 적합한 일이 있는가하면, 작은 교회에 적합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이든 힘써야 할 일은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요소들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쓸모 있는 그릇으로 준비될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교회가 가져야 될 속성들을 잘 구비해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쓰시고자 하는지 발견해야 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어려울지라도 헤아리고 또 헤아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통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구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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