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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런 사람이 되라! (고후 8: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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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이 되라! (고후 8:16-24)

 
1.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성도 여러분, 6·25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진두지휘했던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 1880~1964)의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을 알고 계시죠?

오 주여!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에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정직한 패배 앞에 당당하고 태연하며,
승리의 때에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여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깨닫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이끌지 마시고,
자극받아 분발하도록 고난과 도전의 길로 인도하소서.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게 하시고,
실패한 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마음이 깨끗하고 높은 이상을 품은 사람,
남들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
웃을 줄 알면서도 우는 법을 결코 잊지 않는 사람,
미래를 향해 전진하면서도 과거를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 모든 것들 외에 그에게 유머 감각을 주소서.
그리하면 항상 진지하면서도 결코 지나치게 심각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겸손을 가르쳐주소서.
그리하면 진정한 위대함은 소박하며, 
진정한 지혜는 열려 있으며, 
진정한 힘은 너그럽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었을 때 저는 감히 그에게 속삭일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구나’라고.

이 기도의 원 제목은 “아버지의 기도(A Father's Prayer)”입니다만,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과 신앙이 베인 이 기도문을 일반적으로 “자녀를 위한 기도”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자녀들 역시 맥아더 장군이 기도하고 바란 대로 자라준다면 그 인생은 참 괜찮은 인생이요 성공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녀들만 이런 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 이 나이에 무슨 …?”이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편 55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자들은 “변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성도는 항상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말씀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사람이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2. 세 사람 이야기

1) 본문의 배경

고린도후서 8장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신약 교회의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글라우디우스(Glaudius, A. D.41~54) 황제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발생한 심한 기근 때문에 대단히 궁핍했습니다(행11:27~30). 거기다가 財力을 지닌 신자들과 젊은이들이 계속 된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났고 남은 것은 노인들과 과부들을 비롯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설립한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복음의 빚을 진 것을 잊지 말고 물질적인 도움으로 그 빚 갚기를 바랐습니다(갈6:6). 그 교회들의 중심에 고린도교회가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절부터 5절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모범이 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케도니아란 그리스 북쪽 발칸반도 지역으로서 서쪽으로는 ‘아볼로냐’로부터 동쪽으로는 ‘빌립보’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들’은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를 가리킵니다(행 17:10~15). 

이 교회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즉 극심한 박해를 당하고 있었는데요. 그 박해는 먼저 로마 제국의 식민지 백성에 대한 착취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경제활동 금지로 인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유대인들의 직간접적인 방해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방해를 하기도 했고, 폭력배를 동원하여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들로 인하여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거의 다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듣고는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했습니다. 누군가의 강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발 벗고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었습니다. 당장 그들이 다른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자발적으로, 기쁘게, 풍성한, 그리고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헌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고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어서 바울 사도는 6절부터 15절에서 이러한 구제 헌금에 고린도교회도 동참할 것을 권하고 있으며, 그 일을 위하여 디도를 파송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교회는 이 일에 다소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은혜로 물질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었고 신령한 은사들을 많이 받아 영육 간에 부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보다는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고, 희생과 헌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서신과 디도를 통하여 그들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고린도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에 동참할 것을 권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분으로서 성도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을 기억시키면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요 성숙임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소식을 듣고 구제헌금 의사를 가장 먼저 밝힌 교회가 다름 아닌 고린도 교회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미 1년 전에 시작했으나 성도들이 적극 참여하지 않아 지지부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완수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죠. 세 번째 이유는 성도들이 서로 나눔으로 빈부격차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고 서로 “균등”해지는 것이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 지역 교회들의 헌금을 전달하고, 고린도 교회의 헌금 모금을 위하여 파송된 사람들의 면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2) 세 사람

➀ 오늘 본문에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디도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여러 명의 제자 혹은 믿음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디도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바울이 서신서 초두에 공동 송신자로 자주 디모데를 언급한 것과는 달리 서신서에 송신자로 언급된 적이 없으며, 사도행전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고린도후서를 비롯한 서신서 몇 곳에 잠시 소개될 뿐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디도를 “같은 믿음의 생활을 하는 진실 된 아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즉 디도는 초대 교회와 선교 활동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래 그리스 사람인 디도가 바울을 만나 기독교인이 된 후, 항상 바울의 선교 활동에 동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특히 그의 믿음이 탁월하고 인격과 삶이 믿음직스럽고 충실하여, 바울은 그를 이방인 신자의 모범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서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 상황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러 가면서 이방인 신자의 모델로써 디도를 데리고 갔는데 그것이 디도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디도의 가장 현저한 활동은 뭐니 뭐니 해도 고린도교회의 문제 해결에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힘써 복음을 전하여 신자를 얻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면 그것으로 복음 사역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 곳곳의 교회마다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문제 있는 교회마다 바울이 직접 가서 해결하기에는 바울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있는 교회에 아무나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그것을 올바로 가르쳐줄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디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곳곳에 파견합니다. 그리스의 고린도 교회로, 지중해의 그레데 교회로, 동유럽의 달마디아 교회까지…. 그리고 디도는 바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가는 곳마다 문제를 해결하여 주님의 교회를 복음의 터 위에 굳게 세웠습니다. 

이 디도에 대해 오늘 본문이 언급하는 말은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16)”입니다. 이 부분을 다른 성경은 “내가 여러분에게 기울이는 것과 같은 열성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나와 생각이 같고, 목표가 같고, 심지어 열정까지 같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디도가 바울에게 있어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디도는 단지 인간적인 면에서 바울을 닮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한 열정과 그 간절함에 있어서 바울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디도에 대해 바울은 23절에서 “나의 동료요 … 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동료”라는 표현은 ‘사역의 파트너’라는 말이고, “동역자”라는 표현은 ‘함께 일하는 동지 혹은 친구’라는 뜻입니다. 결국 둘 다 같은 말이지요. 이러한 표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디도는 바울의 제자이자 아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특별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위대한 사도의 아들로 불리는 사람! 

그런데 바울은 이 디도를 아랫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급수의 사람으로, 즉 동료와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새 믿음과 영성이 자라 자신의 동료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디도를 바울은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디도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바울이나 디도처럼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죽어도 좋다는 각오와 열정을 가지고 계십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보고, ‘나와 같은 간절함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➁ 오늘 본문에 두 번째 소개된 사람은 이름은 없고 다만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라고 소개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헌금 전달과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위해 디도 외에 두 사람을 더 보냈습니다(22). 그 중 한 사람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18)”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학자들은 ‘누가’, 혹은 ‘디도의 형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만,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그는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 즉 “복음을 전하는데 명성을 떨친 사람(공동번역)”이고, 그로 인하여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복음을 열심히 전했는지와, 그로 인하여 바울의 신뢰를 받았다는 것, 나아가 여러 교회로부터도 칭찬을 받았던 자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충 설명은 19절에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는 것으로 보아 그는 여러 교회의 택함, 즉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공식적인 투표를 거쳐 선출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이 제2의 인물은 어떤 사람입니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고, 지역 교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교회만 아니라 지역 교회, 이웃 교회들로부터까지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성도, 얼마나 멋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➂ 그리고 22절에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의 한 형제”라고 소개된 이 사람 역시 그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누군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바울은 그를 소개하면서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된 사람이라고, 그리고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22). 여기서 “간절하다”는 것은 ‘민첩한, 발 빠른’의 의미가 있고, ‘순종하여 봉사에 열심하고 부지런한’이라는 의미, 그리고 ‘올바르고 선하여 도덕적인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입증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주님과 복음과 교회와 어려운 성도를 위한 일에 누구보다도 민첩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당장 눈에 일이 보이는데 느려터진 사람, ‘누군가 하겠지’ 하고 팔짱끼고 있는 사람은 복장 터지는 사람이죠! 그런데 이 제3의 인물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일을 보면 누구보다도 빨리 움직이는 사람, 그리고 그 일에 성실하게 매달려 그 일을 이뤄내는 사람, 거기에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자질까지 갖춘 사람! 여러분, 정말 대단하고 멋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이 두 사람에 대한 소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23절에서 다시 한 번 두 사람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23).” 여기서 “사자”란 ‘사도’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을 12제자와 같은 사도라고 부르지는 않고, 다만 마케도니아 지역 교회들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이라는 것, 즉 단순한 교인이 아니라 그 교회들의 사역자 혹은 목회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이번의 구제 사업을 위해 여러 교회들로부터 추천되고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만 아니라, 그 교회들의 사역자 혹은 목회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바울이 디도를 비롯한 이 세 사람을 고린도 교회에 소개하면서 정말 행복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 주님을 향한 사랑이나 교회를 향한 사랑, 그리고 복음을 향한 열정이 같은 사람들, 교회들이 믿고 돈을 맡길 뿐 아니라 바울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을 소개하면서 바울은 웃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리고 바울로부터 이러한 인정을 받고 있는 그들은 또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용혜원 시인은 “그대를 만남이/ 그대를 찾음이/ 나에게는 축복입니다. 우리 함께 가는 길에/ 동행할 수 있음이/ 나에게는 행복이기에”라고 노래했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나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이라는 것이죠. 여러분에게도 이런 행복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 곁에 있는 사람, 그 사람과 친한 사람은 그의 분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 즉 여러분이 친하고 늘 함께 어울리는 사람은 여러분의 분신,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내 곁에는 이런 사람 밖에 없지?’라고 불평하시지는 않았습니까? 類類相從, 자신과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이 人之常情이요, 當然之事라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만날 어울려 지내는 그 사람에 대해 욕이나 하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욕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주님의 사람, 교회의 일군, 복음의 도구였던 바울, 그의 곁에는 이렇게 자신과 닮은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먼저 바울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바로 이 사람들처럼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된다면 바울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여러분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달라지셔야 합니다. 바울과 그의 동지들처럼 거룩하게 변화되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3. 그들처럼만 산다면!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인 이해인은 “우리 모두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평범하지만 가슴엔 별을 지닌 따뜻함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신뢰와 용기로써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월의 보름달만큼만 환하고 둥근 마음 
나날이 새로 지어먹으며 밝고 맑게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너무 튀지 않는 빛깔로 누구에게나 친구로 다가서는 이웃
그러면서도 말보다는 행동이 뜨거운 진실로 앞서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오랜 기다림과 아픔의 열매인 마음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화해와 용서를 먼저 실천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롭게 이어지는 고마움이 기도가 되고,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 지루함을 모르는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자신이, 우리 모두가 “기도의 사람”, “희망의 사람”, “사랑의 사람”, “평화의 사람”, “기쁨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표현했습니다. 
잘못했을 경우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인정하는 사람. 
아는 것이 적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사람.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남의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 
남의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 
언제나 웃으며 말하는 사람. 
고마웠던 일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 

남이 잘되는 것을 축복해주고 반기는 사람.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후한 사람. 
웃으며 일하는 사람. 
마음까지 화장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배우려고 하는 사람. 
잘될 이유를 찾는 사람. 
겸손과 양보가 몸에 배어있는 사람. 
남의 잘못을 잘 용납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주님과 교회를 위한 열정과 간절함이 바울과 같은 사람, 그래서 바울이 “나의 동료요 … 나의 동역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 즉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 그로 인하여 뭇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사람,  그리고 주님과 복음과 교회와 어려운 성도를 위한 일에 누구보다도 민첩하게 움직이는 사람, 그 일에 성실하게 매달려 그 일을 이뤄내는 사람, 도덕적인 자질까지 갖춘 사람!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요,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주님의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이 이런 사람 되기를 바라며, 여러분 주변에 이런 사람이 많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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