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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의 종교, 은혜의 종교 (마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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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 종교, 은혜의 종교 (마 7:21-23)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 교인이라고 안심할 수 없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모처럼 청명한 주일 아침입니다. 도시 하늘에 잠자리가 날고 매미 소리가 처연한 것을 보면 이제 가을이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름내 흐트러졌던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할 때입니다. 저는 가끔 제 책에 서명을 부탁하는 이들에게 ‘참을 향한 순례자 아무개님께’라고 적어드립니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고 그렇게 살자는 다짐인 동시에 초대인 셈입니다. 제가 말하는 ‘참’은 물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 하나 얻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이 아닐까요?

그 ‘참’의 길을 앞서 걸어가며 ‘길’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분이 앞서 걸으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걷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관념이 아니라 삶입니다. 오늘 아침, 교회 오는 길에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가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었습니다. 소속된 교회는 달라도 ‘그 길’을 걷는 형제요 자매인 데 왜 낯설게 보였을까요? 어떤 이는 피곤해 보였고, 어떤 이는 권태로워 보였습니다. 생기 넘치는 사람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있음 그 자체로 예수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미에서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끝마다 ‘주님의 영광’, ‘주님의 뜻’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이들에게는 아주 서운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백이 아니라, 흐트러진 곳을 고르고 더러워진 것을 닦아 하나님의 비춰내는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나름대로 잘 믿고 있다’는 자부심입니다. 종교적 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성경 구절을 많이 암송하고, 복음성가를 많이 불러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구원의 확신이란 허위의식일 뿐입니다. 이건 제가 심술이 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입니다. 제 욕심껏 사느라 이웃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사는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을 운위(云謂)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내주하여 계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그 뜻이 삶으로 번역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습니다. 삶이 모호하니 그럴만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뜻을 모르십니까?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길거리로 내쫓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배고픈 사람 먹이고, 내쫓긴 사람의 설 땅이 되어주거나 그의 이웃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갑을 열어야 하고, 안락하고 편안한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돌아가신 박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이 안 될 때면 ‘자기에게 손해나는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깨달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선택이 하나님이 뜻하신 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선택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의 기준이 없냐고 물으시는 분들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희생이 아니다.”(마9:13)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믿음의 보람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란 ‘함께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 이릅니다. 아픔을 겪는 사람을 보면 마치 제 몸이 아픈 것처럼 아파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비로운 분이셨습니다. 

• 자기 열심에 대한 변증

주님은 마지막 날의 광경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아주 반갑게 인사하며 자기소개를 합니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몇 가지를 더 보태도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큰 교회 건물도 지었고, 복지 재단도 만들었고, 사상이 수상쩍은 자들을 내몰기 위해서도 애썼습니다. 십일조도 열심히 드렸고, 없는 시간을 쪼개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칭찬을 기대했겠지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그들은 신앙생활을 참 잘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냉랭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외면도 이런 외면이 없습니다. 차라리 배신이라고 할까요? 대체 어디서 이렇게 꼬인 걸까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거나 자기만족을 느끼는 순간, 그 일은 주님과 무관한 일이 됩니다.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은 도움 받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그들이 행여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나 세심하게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참 많은 일을 합니다. 우리교회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농촌 교회 자립을 돕기 위한 일도 하고,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에 동참하여 저소득층을 돕는 일도 하고,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의 생활비도 지원하고, 에너지 빈곤층을 지원하는 일도 하고, 생협 운동을 통해 농촌 교회와도 연대하고, 몽골에 은총의 숲을 조성하는 일에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면서도 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누군가를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순간,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는 권력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주는 자는 받는 자를 내려다보기 쉽습니다. 제가 성도들은 ‘베푼다’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베푼다’는 말 속에는 ‘은혜를 입힌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베풀 수 없습니다. 오직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뿐입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나눔’조차도 우리 자의식을 치장하는 액세서리가 되기 쉽습니다. 

교회가 커져야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단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일을 하라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하실 뿐입니다. 교회의 힘은 무엇이나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을 절감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자랍니다. ‘나의 약한 그 때가 오히려 강함이라’고 고백했던 바울 사도의 말이 가리키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넉넉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간절함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금 대형교회들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봅니다. 지저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질이 늘어나면 뜻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을 때마다 ‘나도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지만 ‘불법을 행하는 자’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두렵기 이를 데 없습니다. 

• 심장을 바치라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특정한 진술이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라는 단어는 원래 사람을 직접 목적어로 취하는 단어입니다. ‘나는 〜를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고백하는 사람은 고백의 대상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믿는다는 단어인 ‘believe’는 옛날 영어인 ‘be loef’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인 데 그 뜻은 ‘친근히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와 유사한 단어가 ‘빌러비드beloved’인데 ‘가장 사랑하는’이라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신임이나 신뢰를 뜻하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들에 대한 어떠어떠한 진술이 참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라틴어로 ‘나는 믿는다’는 말은 ‘크레도 credo’인데 그 속뜻은 ‘나의 심장을 드린다’입니다. 심장은 단순히 감정이나 느낌만이 아니라 가장 깊은 차원의 ‘자기’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지, 생각, 감정보다 더 아래쪽에 있는 그 중심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심장을 바치며 삽니까? 누구에게 헌신하고 계십니까?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질문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심장을 바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의 말은 통렬합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약2:19)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위대한 계명을 가르치실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막12:30)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많은 데 그들의 인격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우리 속에 엄청난 변화의 힘이 솟구칩니다.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타이틀곡이 떠오릅니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별보다 예쁘고 꽃보다 더 고운 나의 친구야
이 세상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야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 몸 하나 건사 못하는 이도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집안에서는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던 아들이 애인을 위해서는 밤샘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엄마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초월의 능력’입니다. 사랑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정성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시간과 물질과 정성,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내놓고 있습니까? 

• 힘씀과 감사의 통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우리와 만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늘 참다우십니다. 하나님은 어지십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우십니다. 우리는 참과 어짊과 아름다움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열두 바구니>라는 글에서 저는 참 간단하지만 명료하기 이를 데 없는 말씀과 만났습니다.

참의 종교-힘씀
은혜의 종교-감사
힘써야 감사를 알고 감사하는 데서야 참 힘씀이 나오고. 

거짓 종교는 값싼 은혜를 강조합니다. 회개 없는 용서를 선언하고, 제자됨을 위해 뭔가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참의 종교는 가장 값진 보화를 사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신앙은 거짓입니다. 참 신앙은 남을 살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게 사람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힘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전히 욕망의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푯대에서 벗어나 비틀거리고 있는 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믿어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둘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한 몸입니다. “힘써야 감사를 알고, 감사하는 데서야 참 힘씀이 나오고.”

너무 늦기 전에 안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전심으로 받들며 사십시오. 신앙고백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애쓰십시오. 자기 울타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처럼 애처로운 것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려 할 때, 외면당하는 이들에게 다가서려 할 때, 주님은 평강의 선물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주님을 외롭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걷든 삶의 영원한 중심이신 하나님을 향한 순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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