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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자세 (창 6: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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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자세 (창 6:18-22) 
 
 
하나님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그렇게 갑자기 대홍수를 내래셔서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범죄한 인류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암 3:7에서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 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노아에게 비밀의 경륜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 비밀의 경륜을 선포하고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으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당신의 종들을 통해 언약을 세우시고 비밀을 미리 보여주시고 알려주십니다. 소돔, 고모라 멸망 때도 아브라함에게 먼저 그 사실을 알려주셨고 아브라함의 조카 놋에게도 피할 기회를 미리주셨습니다.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했습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을 누리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비밀도 털어놓신다는 사실입니다. 
   
엣적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서시대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식언치 아니하시고 아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영광 가운데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듣고 어떤 자세로 준행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무엇보다도 마음의 성급함을 버려야 합니다. 성급함은 실수를 불러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듣고, 대략 듣고, 건성으로 듣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성급한 사람은 말을 끝까지 다 듣지 않습니다. 성급한 수험생은 문제를 끝까지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답을 틀립니다. 마음의 성급함이 일을 그르칠 떄가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끝까지 다 듣지 않는 성급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음이 성급한 사람일수록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소위 정서적인 up & down이 잦습니다.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잘 합니다. 열 잘받고 혈기가 심합니다. 이처럼 성급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평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자세를 익혀야 할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될 일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훈련하면 됩니다. 

독일의 퀼른대성당은 독일 최대의 성당으로 퀼른시의 자랑거리입니다. 1248년에 착공되어 1880년에 완공되었으니 무려 6백32년이 걸린 셈입니다. 이 대성당은 독일인의 인내와 끈질김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의욕만 앞세워 성급하게 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잘못되고 후회할 일들을 만들어 냅니까?
성급함에 사로잡히면 비극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사사기 11장 29-40절에 입다라는 사사가 성급히 서원한 말에 대한 결과 나와 있습니다. 입다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사로서 인정을 받고,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암몬 족속과의 결렬한 싸움 중에 있었을 때 입다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허락하게 되며 자신의 집 문 앞에서 제일 먼저 입다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성급하게 서원하고 말았습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 승리의 소식을 가지고 기뻐하며 미스바에 돌아와서 자기 집에 이를 때 보니 입다의 어린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영접하였습니다. 입다는 함부 서급하게 서원함으로써 자신의 귀한 외동딸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입다의 승리는 결국 온 집안을 슬픔의 울음바다로 변하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19절에서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까지 듣고 지나친 욕망과 성급한 마음에 짐승을 붙잡으러 쫓아다녔다고 하면 과연 몇마리나 잡아서 방주에 넣을 수 있었겠습니까? 노아는 사냥꾼도 아니었습니다. 설사 사냥꾼인들 무슨 재주로 그렇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성급하게 짐승을 잡으로 나갔다면 그 기간은 얼마나 많이 걸렸겠습니까? 짐승잡으러 나갔다가 정작 홍수 떄에는 방주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홍수를 피하지 못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까지 듣고 성급하게 불평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다 합니까? 방주를 짓는 일에도 지쳐 있는데 이 땅에 있는 짐승과 생축들을 어떻게 다 방주로 잡아넣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못합니다. 

성급한 사람은 예단하게 되고 속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은 불평부터 합니다. 성급한 사람은 분노부터 합니다. 성급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부터 줍니다. 이런 성급함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의 성품 가운데 하나가 성급함입니다. 자판기에서 커피뽑아먹다가 손을 데는 사람은 한국 사람 밖에 없다지 않습니까? 자판기 커피잔에 커피가 채워지는 시간이 얼마나 짧습니까? 그런데 그 사이를 못 참아서 들여다보고 커피잔을 뽑아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급함만 조절할 수 있다면 위대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19절 말씀을 문제 삼아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노아방주이야기는 단지 이야기일뿐이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나 믿음의 지위를 부여하기는 곤란하다."고 주장하며 무신론을 펼치기도 하는 인본주의자들이 있어왔습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오늘날도 곳곳에서 이런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폄하하고 믿음을 조롱하며 자신들이 가장 지혜로운 과학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면서 활동을 합니다.

여기에 넋이 나간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기도 하고 나쁜 크리스찬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종결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인본주의자들과 과학주의자들의 조롱하는 소리와 유혹에 단호하게 신앙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급하게 듣는 자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다음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20절입니다.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네게로 나아오게 하리니 너는 그것을 인도하여 방주로 넣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이고 우리는 보조자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창 7:13-16를 보십시오.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군데에서 하나님이 동물들을 마음대로 움직이셨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재앙을 가져온 개구리와 파리(출 8장), 메뚜기(출10장), 발람의 나귀(민 22:28),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욘1:17), 다니엘을 해치지 못하게 입이 봉해진 사자(단 6:22),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는 까마귀(왕상 17:6)...등등. 이 경우라면 노아의 일은 매우 줄어들 수 있고 모든 동물을 방주에 태우는 일은 더욱 쉬어졌을 것입니다.(9) 
  
노아의 장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첫마디만 듣거나 중간이나 끝만 듣고 속단하여 달려가는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노아와 같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을 습관적으로 끝까지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속단합니다. 짐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뉴얼을 읽어보지 않습니다. 계약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싸인을 하고 도장을 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한국 사람입니다만은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앞만듣거나 중간만 들으면 안됩니다. 앞과 중간과 끝이 어떻게 연결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즉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자세,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맞으면 말씀을 받아들이고 아니면 듣지 않으려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다 들었고, 끝까지 들었고 겸손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노아는 말씀과 동행하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2절에 노아에 대해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장차 홍수가 있을 것은 알았지만 그 홍수가 얼마나 계속될 것이며 또 방주 안에는 얼마 동안이나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몰랐습니다. 또 몇 마리의 동물들이 방주에 탈지도 몰랐습니다. 이 모든 주도권이 노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만 했기에  자기 생각과 지식에 맞으면 순종하고 맞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말씀에도 다 순종하여 준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도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니 순종하는 사람도 행복하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십니다. 

오늘날 믿는 많은 사람들이 나도 하나님께서 그처럼 나에게 말씀하신다면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기 생각과 지식이 앞서고 또 이론이 동원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게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설계를 그대로 준행해 방주를 지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지시하자마자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속단하지 않았습니다. 예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다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도 노아 같은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노아와 같은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준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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