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보물을 쌓아 두는 곳 (마 6:19-24)

첨부 1


보물을 쌓아 두는 곳 (마 6:19-24)

여러분, '골드러시(gold rush)' 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말은 ‘19세기 미국에서 금광이 발견된 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현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160여 년 전인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아메리칸강의 지류 강바닥에서 금이 발견되고, 그 주변에서 많은 금이 나오자, 미국인들이 자신의 일들을 팽개치고 이 지역으로 금을 캐러 모여들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1849년에는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 중남미, 하와이, 중국, 등지에서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해 왔습니다. 이들이 이주해오는 과정이 험난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오는 과정에서 죽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온 사람들을 ‘포티 나이너스(forty-niners)'라고 하였는데, 이들로 인해 미국 역사상 최단기간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서 1850년에 캘리포니아가 정식으로 미국의 한 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중에 발간된, 8월 16일자 미국의 ‘뉴욕타임즈’라는 잡지에 최근 현대판 ‘신 골드러시’ 물결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최근에 금값이 세계적으로 치솟아 오르자 중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금 생산지인 호주에 옛 금광이 있던 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대박’의 꿈을 좇는 도시민들로 직장을 버리고 오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호주 각지의 쇠락한 금광 도시들이 활기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 금 탐사용품을 판매하는 사람들도 재미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금을 캐거나, 줍기 위해 땅을 보고 다니고, 냇물이나 강물 속에 들어가 모래를 채취하여 채를 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 이 땅에서 나오는 보물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 그 사람들은 생각과 삶이 온통 금에 사로잡힌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와 오늘 성경 말씀을 교차시키면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무엇에 사로잡힌 인생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보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때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예수님은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물이 무엇일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갈까요?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물에 사로잡혀 살아간다고 해도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물 때문에 범죄가 많이 생기고, 재물 때문에 인간관계(형제간, 동기간, 이웃간)가 깨지고, 재물 때문에 생명이 위협받고, 하는 일들이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무수히 많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점점 더 물질의 지배를 받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돈이 많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회, 황금만능사회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것이 우리의 질문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 땅의 재물을 보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물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들이 오늘 말씀을 보며 가져야 할 질문들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마태복음 5장과 6장의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경건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삶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해 예수님이 원칙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는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 경건생활입니다. 

오늘 본문의 19~24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의 현실생활과 가장 직결되는 문제인 재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결론적인 말씀은 24절입니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주님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1) 보물의 비유 : 19~21절,  
2) 눈의 비유 : 22~23절,  
3) 노예의 비유 : 24절,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3가지의 교훈을 생각합니다. 

1.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인생을 투자하라. 

오늘 말씀의 첫 번째 교훈은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인생을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이 세상의 삶이나 잠깐 맛보다가 끝나버리는 세상의 재미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고 영원히 이어지는 영원한 하늘의 가치를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투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재물의 문제를 다룰 때에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19~20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 

여기서 보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문맥을 볼 때 재물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24절에는 재물이라고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재물 자체를 배척하거나 물질을 경악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 어디에도 재물 자체를 배척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지,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의 비유에서도 부자는 돈이 많았기 때문에 지옥에 갔고 거지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부자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지옥에 갔고, 거지 나사로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입니다.  

마19:24에 나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도 영생의 문제를 놓고 재물의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던 한 청년을 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는 말씀도 저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재물에 대한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을 갖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옆의 굶주리는 이웃을 보면서도 자기 배만 채우려 한다든가, 주변의 헐벗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것을 외면해 버리고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려 한다든가 하는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은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우리의 가치를 투자하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물질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정말 땀 흘리고 귀하게 번 그 돈을 하루 저녁 술집에 가서 뿌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내 몸에 해로운 쾌락의 도구로 내 귀한 재물을 사용하는 것보다 선교하고 구제하고 주변의 많은 이웃들을 돌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물질을 우선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목회했던 교회 성도들이 경험했던 일들입니다. 

어느 때에 교회에 괜찮은 새가족이 왔습니다. 인상도 좋고, 사람들에게 좋은 태도와 말씨로 쉽게 친해집니다. 교회 봉사도 잘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정말 잘 합니다. 돈도 잘 씁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대접도 잘 하고, 성가대원들에게 간식도 잘 쏘고...  사람들은 너무나 좋은 사람이 교회에 왔다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2~3년이 지난 어느 때에 갑자기 중요한 일로 급전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에게 돈을 꿉니다. 그동안 쌓아놓았던 신뢰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돈을 꾸어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날 도망갑니다. 정말 황당합니다. 나중에 드러난 것은 교회안의 많은 사람들이 당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자주 있는 일입니다.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가치는 일시적입니다. (전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솔로몬의 탄식 속에서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순간적이고 허망한지 알 수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 본 솔로몬이 마지막 인생의 고백으로 남겨 놓은 말은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였습니다. 이 말은 사는 것 자체가 가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육신의 삶만을 위하여 인생을 투자한다면 그것은 허무한 인생이요, 허망한 투자라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은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위해서 우리의 귀중한 것을 투자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투자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21절)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 올바른 인생관으로 인생을 설계하라.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의 교훈은 ‘올바른 인생관으로 인생을 설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관이 바로 세워질 때 우리는 인생을 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2~23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눈은 몸의 등불이고, 마음의 창문입니다. 창문이 더러우면 온 집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창문이 깨끗하면 온 집이 밝아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물에 눈이 가면 우리의 지성의 눈이 멀게 됩니다. 또 우리가 사랑에 눈이 멀게 되면 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돈에 눈이 멀거나 명예나 권력에 눈이 멀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보물은 우리의 이성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서 맹목적이 되게 합니다.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중학생 때, 반에서 어떤 아이가 시계를 차고 있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학교에 가면 그 아이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시계가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너무나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집에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손목시계가 갖고 싶습니다’, 그날 저는 아버지와 거래를 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을 올리면 시계를 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부터 어땠을까요? 오직 그 시계 생각만 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 결과로 드디어 제 아버님이 시계를 사 주셨습니다. 쇠줄로 되고 무브가 녹색바탕으로 된 ‘오리엔트 시계’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제 아버님은 그 시계를 저에게 사 주시기 위해 큰 결심을 하시고 지출을 한 것입니다. 매일 시계를 닦았습니다. 제가 그 시계를 십년 이상 찼습니다. 

얼마 전 둘째 아이가 시계를 사 달라고 하길래 옛날 시계에 제 눈이 꽂혔던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눈이 보는 것에 따라 좌우됩니다. 길을 건널 때 파란 불이 보일 때 건넙니다. 만일 우리가 아주 심한 색맹이라 그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보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동차에 치일 것입니다. 이처럼 눈이 좌우하는 대로 우리는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눈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다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밝아서 온전하게 보면 우리의 몸도 밝은 것으로 바르게 인도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눈은 결국 생각이나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관입니다. 눈이 바로 보면 온 몸이 바로 서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관, 우리의 가치관이 바로 서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바로 투자할 수 있습니다. 


3. 섬길 대상을 바로 선택하라. 

세 번째로 주님은 이 재물의 문제를 우리에게 가르치면서 노예의 비유로 결론을 맺습니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지금 노예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이 잘 심감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거리에 즐비한 것이 노예였고, 귀족은 누구나 노예를 두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라고 하는 직분은 오직 한 사람의 주인만을 섬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것이 노예의 인생이었습니다. 

만일에 주인과 맞서 어떤 대적자가 등장하면 그 주인을 위해서 대적을 물리치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이 노예들의 인생이었습니다. 절대로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한 주인만 섬겨야 했습니다. - 우리 주님은 노예의 비유를 하면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인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물질이라고 하는 주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과 물질, 줄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섬길 대상을 바로 선택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떤 것에 매여 그것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 혹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엔가는 반드시 내 인생을 투자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권력과 권세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위해서 일생을 바칩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생각한 과거의 충신들은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같이 명예가 귀하다고 생각하면 명예 때문에 자기의 목숨까지도 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바칩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어떤 대상을 섬기며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바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대신 물질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무엇에 사로잡힌 인생입니까? 여러분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때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이 물질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작가 최인호씨의 장편소설, ‘상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로 거상이면서 당시 최고의 부자였던 ‘임상옥’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적 내용을 가미해서 쓴 내용입니다. ‘거상 임상옥’은 평안도 일대의 거대한 땅을 소유했고 조선의 큰 상인이었기에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모두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가포집이라는 수상집의 내용입니다. (權不十年 花無十日紅 
‘천하의 권세도 십 년이 가는 것은 없고, 열흘 이상 붉은 꽃도 없다’) 

그 어떤 부자도 3대 이상 계속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세습을 안 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자손들에게 재산을 물려줌은 자손들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일이며 유산은 자손들의 몸을 베는 칼이라고 여겼습니다. - 

당시 천주교가 들어와 있을 때. 그가 말년에 예수를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이 소설의 내용 속에 있습니다. 

황금이 만능으로 통하는 이 시대에, 황금의 노예가 되지 아니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바른 신앙, 바른 인생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인생을 투자하고,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인생을 설계하고, 물질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올바른 대상을 섬기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