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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까요? (눅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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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까요? (눅 24:25)

-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한참 숲 속 오솔길을 걷던 중 두 갈래 길 앞에 서게 되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갈등하면서 할머니는 하나님 뜻대로 갈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의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지팡이를 두 길 중앙에 놓고 쓰러뜨렸을 때 지팡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쓰러뜨렸고 지팡이는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사실 할머니는 왼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쓰러진 지팡이를 다시 세우고는 몇 번이고 반복했다. 결국, 지팡이가 왼쪽으로 쓰러지자 할머니는 “역시 하나님이 왼쪽 길로 인도하시는군.” 하며 자신이 원하는 길로 걸어나갔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믿는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믿는 것이 있고, 말로만 믿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늘 “우리가 믿을 만한 것”입니다.

아니,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의지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모양만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너희의 믿음을 보여라!”

[준비된 2인자]라는 책에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떤 병원에 환자가 한 명 왔는데 얼마나 겁이 많은지 검사하려고 기계만 갖다 대도, 주사를 놓으려고 해도 벌벌 떨었답니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에게 마취를 하기 위해 의사가 “심호흡을 하세요. 심호흡.”이라고 말했습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을 하면 되는데 환자가 너무 긴장을 했는지 심호흡은 하지 않고 말로 “심호흡, 심호흡”하더랍니다.

분명히 따라 하지만, 의사가 원하는, 그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따라 하지 않는 것이죠.

오늘부터 일곱 번의 설교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존재를 믿는 것임을 말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묵상하고 배우려는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와 성경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일곱 번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믿음으로 항해하는 기술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첫 시간에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정말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것인지 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의 항해 가운데서 불신과 불안이라는 암초에 걸려 실망한 채 걷는 두 사람을 예수님이 만나주신 이야기.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익명의 두 제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실망하여 엠마오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왜 실망했을까요? 그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그들의 생각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을 유심히 보세요.
위대한 지도자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모세가 죽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여호수아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도인 바울이 순교를 당하고 나서도 복음은 전파되었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증명되고, 믿음을 보게 되는 때는 죽음과 절망 앞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두 제자에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일이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오늘도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절망하고 실망한 두 제자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만나 주셨고,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는지를 말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니,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또한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으므로 근심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다(눅 24:9)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그들 중 둘”이란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소식을 전할 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1절을 보면,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실망에 차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을 향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본문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슬픔 가운데 존재하는 믿음이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기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게 언제나 은혜의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니며, 의기소침하며 슬픔 가운데 있다는 것이 언제나 신실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제자는 실망한 채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5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지 이들이 슬픔 가운데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이들의 슬픔 가운데 여전히 예수님은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인생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우리 곁에 주님이 계실 때, 아니 주님이 다가오실 때가 있음에도 우리는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슬픔으로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바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슬픔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 들으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위로’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 그들의 아픔을 다 털어놓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전에 나와 주님을 만나 기쁨을 누리는 순간은 우리의 상처와 아픔, 슬픔을 다 내어 놓고, 털어놓고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만날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슬픔을 안고 길을 가던 그 사람을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이 예배시간에 임하셔서 여러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주시는 순간에 믿음이 존재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목사님이 계속해서 마음의 상처를 내려놓으라고,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다 토해내라고 하는데 미치겠더랍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버지에 대한 어떤 상처도 없는데 내려놓으라고 하니, 게다가 그분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아쉬움에 대한 기억 애틋함이 있지 상처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많더랍니다.
우리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목사님이 들어와서 수업을 하는데, 가정과 부모에 대하여 만족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손을 들었더니, 자꾸 묻더랍니다. 부모에 대한 상처와 불만을 감추지 말고, 너는 목사 아들이니까 안 그런 척하지 말고…. 그런데 미치겠더랍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경험이 다르고 상처도 다르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지금 나의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아픔이 아닌, 나의 아픔과 문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죠.

믿음은 여러분의 문제와 부족함이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모든 것을 들으시고 해결자가 되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픔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가는 두 사람의 슬픔과 근심의 이야기를 다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를 꾸짖으셨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들을 꾸짖는 순간에도 그들을 향한 사랑이 변치 않았음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사악한 자들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미련한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이들의 미련함으로 불신앙의 상태에 있으며, 이들의 미련함으로 슬픔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들에게 다가오셔서 이들의 불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며, 믿음의 세계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이 두 사람의 불신앙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생각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못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런 생각하지 않음과 게으름이야말로 사단이 우리에게 주는 생각입니다.

2009년 6월 초하루 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한 박도웅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12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마지막 박사 학위를 앞에 놓고 논문을 준비하는 중에 너무 힘들어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물었답니다. 
“하나님! 제가 박사학위를 끝낼 수 있겠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마음속에 응답을 주셨답니다.
“It's up to you" "너에게 달렸다!”라는 말입니다.

이건 네가 기도해서 물을 문제가 아니라 네가 열심히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주 경건하게 하나님께 묻는 기도가 불신앙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며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불신앙의 삶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슬픔 가운데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예언하셨던 말씀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면 메시아가 어린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22편 16절에서도,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장차 메시아가 받으실 영광에 대하여도 선지자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이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 여인들을 통하여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독한 낙담으로 마음이 흐려졌고 생각이 무뎌졌습니다. 마치 우리가 망원경을 가지고 멀리 있는 것을 보려고 해도, 근심과 슬픔의 서리가 껴있어서 앞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때로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게 하며,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우리의 고백이 삶과 일치하지 않는 불신앙의 문제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선지자들의 말씀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많이 들었고 믿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세부적인 상황에 대하여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만 믿고,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얼마나 불신앙적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까?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와 동물원에 갔습니다. 아이가 사자 굴 앞을 지나갈 때 포효하며 어슬렁거리는 사자에게 놀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이 있니?”
새파랗게 질린 아이가 가답했습니다.
“아빠, 저 사자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철창도 함께 보고 있단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사자를 가둔 철창을 보게 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가? 이것이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한 가지를 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이유는 ‘성급함’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특징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다 읽지 못했지만, 유심히 보세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슬픔과 실망의 빛을 띠고 예루살렘을 떠나가는 그날이 언제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날, 새벽에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여인들을 통해 들은 그날입니다. 아직 약속의 날이 다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더 기다리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그들이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있었을까요? 그런데 그 사흘이 채 지나지 않은 날 이들이 실망하여, 자신들의 조바심으로 슬픔 가운데 그 약속의 자리, 기적의 현장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히브리서 10장 36절을 보세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우리가 믿음으로 해야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모든 약속이 ‘오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바라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그분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불신앙이며, 그분의 역사 가운데 우리가 직접 계획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어가기를 원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불신앙입니까?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불신앙을 가져온 이유 때문에 엠마오의 제자들이 슬픔에 차 있고, 또 우리의 인생에서 실망한 채 살아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미련함과 사악함은 다르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소망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련함을 사악함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악함은 징계의 대상이지만, 미련함은 배움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깨우쳐 알기를 원하시고, 직접 다가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소망적인 것은, 하나님은 자녀가 보이는 불신앙을 모욕으로 간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련하다!”라고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수없이 경험하는 것처럼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는 미련함을 우리 주님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꾸짖음은 우리를 향한 사랑이 배어 있는 표현입니다.

한번 이런 상상을 해보세요. 
배를 항구에 정박해 놓기 위해 닻을 내렸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배가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 배가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련하여 작은 파도에도,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 흔들림 때문에 멀미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닻을 내리는 이상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미련함을 질책하실 수는 있지만, 우리를 버리시는 사악함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분명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흔들리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러한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문제를 몇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인데요. 우리 인간들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있는 것과 동시에 너무나 쉽게 믿는 경향으로 사기를 당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는 사실입니다.

스펄전 당시의 사기 사건을 하나 소개합니다. 
어떤 사기꾼이 순박한 노부부가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옵니다. 사기꾼은 노부부의 집에 종종 들러 친분을 쌓았고, 얼마 후에는 외국에 있는 노부부의 사촌이 엄청난 유산을 남기고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유산을 받으려면 정부 당국에 세금을 내야 하니 다달이 자기에게 돈을 주면 대신 내주겠다고 덧붙입니다. 사기꾼은 그렇게 수차례에 걸쳐 많은 돈을 갈취했고, 몇 개월이 지나자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친절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쉽게 속는 경향이 있습니다. 
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우리 인생의 문제는 사탄이 무섭고 더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친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저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뜬금없이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여기 경찰선데요! 혹시 우체국에서 카드를 발급받지 않으셨나요? 그 카드에 문제가 생겨서 전화를 했습니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카드는 교회에서 다 만들어서 관리를 하는데, 누가 나도 모르게 내 이름으로 카드를 만들어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사무실에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제 핸드폰에 적힌 전화가 있기에 다시 확인하고 전화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자마자 사무장 장로님이 “목사님! 그거 사기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제가 바로 보이스 피싱에 걸려든 거지요. 보이스 피싱의 특징은 사실이 아님에도 우리를 당황스럽게 함으로 정보를 빼내고 돈을 갈취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중의 한 분이 대검 중수부출신 검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아들이 납치되었으니 돈을 보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납치되었다는 아들과 전화통화가 되어 사기를 당하지 않았지만, 자신 스스로 그렇게 쉽게 속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 신기하지요?

사기를 치는 사람들의 말을 그렇게 쉽게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인간의 속성을 보면서 말입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의 믿음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하셨던 약속과 예언도, 새벽에 무덤에 갔다 와서 소식을 전하는 여인들의 소리도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슬픔에 차 엠마오로 가는 이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이 곁에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믿음이 없습니까?

둘째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부인하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봅니다.

이렇게 표현을 해 볼까요?
“믿으면서도 믿지 않는 우리”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그 약속이 성취되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인용했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미국의 어느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마을에 몇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마을 주민의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주민은 기도도 열심히 하였지만, 좀처럼 비는 오지 않고 가뭄이 더 심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의 목사님이 마을 주민에게 광고를 해서 "마지막으로 온 마을 주민이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를 하자!"라고 주민을 교회로 모이게 했습니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아이까지.

그래서 주민이 모두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감사드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우산이 없었기 때문에 빗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교회 문턱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때 한 어린 소녀가 우산을 쫙 펴들고 빗속을 지나 집으로 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그 날 기도하면 비가 올 줄 알고, 진정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한 사람은 그 소녀였던 것입니다.

[5만 번 응답받은 기도용사]라는 책을 쓴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노년의 나이에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로 믿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첨단의 특급 유행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아도, 상점이나 이부자리에서나 사무실이나 학교나 부엌에서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밥이나 의복이나 집세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 그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오늘이나 내일 일에 대해서는 근심과 염려와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참된 믿음은 일상에서 나타나는 믿음이다.“

성경에 나오는 족장들의 믿음을 보세요.
그들의 삶에서 천막에 거하는 믿음, 양을 치는 믿음입니다.
우리 인생의 순간순간에 흐르는 눈물과 쇠약함을 이겨내는 믿음,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얼마 전에 차 의과대학의 박명재 총장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책을 보내 드렸는데, 함께 식사를 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들은 말이 있습니다. 
이분이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주일학교 선생님에게서 들은 말씀을 잊지 못한답니다.

"교회에 잘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영희와 철수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영희는 늘 기도하는 학생이라 시험 때가 되면 공부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시험지를 앞에 놓고도 기도하고,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서도 간절히 기도하는 학생이지.
철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는 영희보다 많이 못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야. 기도하고 나면 열심히 공부하는 그런 학생.

그런데 시험을 보고 났는데 영희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어도 50점을 못 받았는데, 철수는 100점을 맞았어!"

아마도 그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아주 귀한 교훈을 준 것 같습니다. 
제가 늘 표현하는 것으로는 “발 달린 기도”를 하라는 것이지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것을 믿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자신의 무능함을 정당화하고, 삶의 책임을 지지 않고 하나님께 전가하려는 불신앙의 모습이 숨어 있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엠마오의 두 제자,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 예수님과 함께하던 12명의 제자.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무덤을 찾아와 없어진 시체, 빈 무덤을 보고 우는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가장 강력한 도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변화산 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우리 속에 숨어 있었던 믿음을 드러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을 믿지 못했던 우리의 불신앙이 진정한 믿음으로 바뀌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서 믿음을 보이며, 인생을 믿음으로 항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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