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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느 5: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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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느 5:14-19)


우리는 그동안 유다 사람으로 페르시아의 왕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느헤미야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깊은 신앙과 민족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다 무너지고 불타버린 채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건축할 뿐 아니라 민족공동체 자체를 재건하는 과정을 살펴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푸는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느헤미야의 일면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잠간동안의 공백기를 사이에 두고(느13:6) 앞뒤로 두 차례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임기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첫 번째 임기는 십이 년이었음을 오늘 본문 14절이 분명히 밝혀줍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녹을 먹는다는 것은 식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백성이 내는 공적 세금으로 충당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페르시아의 정책은 총독이 왕과 중앙정부에 바칠 세금뿐 아니라 자기 개인과 자기 수하의 관료 및 가솔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외교행위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세금을 백성으로부터 거둘 권한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런 특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본래 페르시아에서 돌아올 때 얼마나 큰 부를 소유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는 자기와 자기의 식솔들을 부양하고 자기의 고위관료들과 외부귀빈들을 접대하는 모든 비용을 개인적으로 부담했다는 것입니다.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한 데서 “내 형제들”이란 느헤미야를 밑에서 돕는 고위관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만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의 관료들도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솔선수범과 지도력이 그들로 하여금 그의 뜻과 실천을 따르게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이런 통치원칙은 그 이전의 총독들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합니다. 느헤미야보다 앞선 총독들 가운데는 세스바살과 스룹바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느헤미야보다 거의 백 년 전의 총독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이란 느헤미야 직전의 총독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고 그래서 백성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우는 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총독들만 백성을 착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종자들”이란 총독부의 하위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하위관리들은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걷는 실무를 담당하면서 페르시아의 왕과 지역의 총독을 위한 세금을 거둘 뿐 아니라 자기들 자신을 위해서도 백성들을 착취하곤 했고 고위관료들은 그것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과 고초는 더욱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백성을 생각하고 아끼지 않는 총독들의 정책은 그래서 백성에게 크게 해악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앞서는 5:1-8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백성에게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구걸을 하든가(느5:2) 곡식을 구하기 위하여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느5:3). 먹고 살기도 힘든데 왕에게 세금을 바치기 위해 빚을 얻어야 했습니다(느5:4). 밭과 포도원도 이미 남의 것이 되었고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사람들에게 남은 길은 자기의 자녀들을 종으로 파는 것이었습니다(느5:5). 그것도 동족 사이에 자녀를 종으로 사고팔고 했던 것입니다(느5:8). 동족 사이에 고리대금업도 성행했습니다(느5:7). 이에 백성의 부르짖음이 컸고 동족 사이에 원망이 높아졌습니다(느5:1, 6). 

느헤미야는 백성의 그 좋지 못한 소행 때문에 크게 노하였으며(느5:6) 즉각 그것을 중단시켰습니다(느5:10-13). 그리고 그런 유다 백성의 소행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총독의 정책과 백성에 대한 배려에 관심 없는 그 관료들의 행태 탓이었음을 안 느헤미야는 그들과 전혀 다른 통치자세를 견지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백성사랑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사랑과 백성사랑은 서로 끊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느헤미야는 쓰기를 자기는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빚을 갚을 수가 없어서 땅을 팔아야 할 때는 돈 있는 사람들이 헐값에 사서 자기 소유의 땅을 늘리거나 비싸게 되팔아서 부를 더 증식하는 기회이곤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지위와 부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니라 그의 수하에 있던 하위관리들도 오로지 성벽공사에만 전념하며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을 하거나 땅을 사고 넓히는 일에 관심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느헤미야가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 본을 보이며 그들을 잘 다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단지 축재하고 부를 증식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기의 재물을 오히려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기꺼이 썼습니다. 본문 17-18절을 봅니다: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페르시아 왕궁에서는 흔히 왕의 식탁에 귀족들이 함께하곤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유다 총독으로서 페르시아의 관행에 따라 식탁에서 자기의 고위관료들과 함께해야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 다른 지역의 총독이나 고관들이 페르시아 본토로 가는 길에 들리게 되면 역시 그의 식탁에서 그들을 접대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식사 때마다 수백 명 분의 음식을 마련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 모든 식사비용을 백성의 세금으로 충당하지 않고 개인 부담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요일3:17-18에서 사도 요한은 쓰기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했습니다. 하나님사랑은 형제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재물이 있고 궁핍한 형제가 있을 때에는 아낌없이 그 형제를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일찍이 그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한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의 그의 간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의 이 간구는 자칫하면 느헤미야가 공치사를 하거나 자기 영광을 구한 것으로, 또 하나님께 무슨 큰 보상을 요구한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여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언제나 옳은 판단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민족을 위한 자기의 진심을 이해해주시리라는 신뢰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그는 총독이며 지도자로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서도 그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그의 믿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느헤미야가 그런 간구를 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진심을 곡해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순수한 뜻으로 무슨 일을 해도 꼭 부정적으로만 보고 악의적으로만 해석하고 말을 퍼뜨리는 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도 안팎에서 보이지 않는 그런 시각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런 자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고 백성에게 매일같이 설명을 할 수도 없는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제나 변함없이 선하시고 올바르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 다 아시는 하나님만 믿고 그에게 다 맡기고 그의 역사에만 전념하고자 하는 느헤미야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 19절의 간구였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실 것이기에 온갖 오해와 비난과 비협조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건축의 사역을 중단 없이 계속할 수 있도록 함께해주시기를 빈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예루살렘 성벽재건축은 불가능할 것이라 믿으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한 것이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하는 기도였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그러우면서 사심이 없는 민족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인 느헤미야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지도자가 오늘날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년에 있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기도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고 봅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며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의 오늘의 느헤미야 이야기는 또한 우리 교회에게도 주는 교훈이 작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든 새 성전 건축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재건이 총독 느헤미야를 비롯하여 그를 따른 고위관료들과 하위관리들의 사심 없고 헌신적인 협력에 힘입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백성 사이의 신뢰와 단결을 이루는 결정적인 힘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새 성전 건축은 온 교우들의 참여와 협동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층에 있는 중직자들의 사심 없고 솔선수범하는 헌신적인 자세가 온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 되게 하며 신뢰와 전적인 참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일에 헌신하며 열심을 내는 사람에게 오히려 오해와 중상과 비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로 시험 들게 되고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본문 19절의 느헤미야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오해와 비방을 멈추게 해주실 것을 믿고 그저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나아가는 주의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 성전 건축의 대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느헤미야가 보여준 그런 지도력과 헌신의 의지와 실천의 능력을 주실 것을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보여준 그런 헌신의 자세는 비단 중직자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온 교우들에게 다 요구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매일 같이 수백 명의 식사를 제공해야 하는 부담을 백성에게서 거두는 세금으로 충당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한 교회예산을 쓰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제직으로서 또는 교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꼭 교회 돈을 쓰기를 바라는 생각은 고쳐야 하겠습니다. 

뭐 조그마한 일 하고도 의례 교회 돈으로 식사를 하는 관행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 같이 최대한 교회예산을 아끼려는 마음과 실천 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것 조금 아낀다고 몇 백억 원이 들어가는 건축에 무슨 큰 도움이 된다고 그러느냐 할 사람도 있겠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듯이 작은 마음 하나하나가 모이면 큰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새로운 마음가짐과 하나 된 다짐으로 우리 앞에 놓인 큰 역사를 이루어가는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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