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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품 (눅 15:11-24) -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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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품 (눅 15:11-24)
 
지난 8월 19일에 mbc 스페셜에서 ‘캥거루케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보신 분들이 계십니까? 신문에서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읽고 떠오른 것이 있어서 인터넷으로 다운 받아 보았습니다. 

캥거루케어라는 치료법은 콜롬비아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미숙아들 중에 73%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캥거루케어를 통해 치료한 후에는 미숙아 사망률이 30%로 줄었습니다. 이 보고를 기초로 해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미숙아와 신생아들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성장시키는데 적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하나님께서 많은 가정에 출산하는 기쁨을 주셨는데 젊은 부부들은 꼭 한 번 함께 이 프로그램을 보시기 바랍니다. 1시간짜리 영상인데 짧게 영상을 편집해 보았습니다. 함께 보신 후에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호주의 한 가정에서 900g으로 태어난 신생아가 사망 선고를 받은 이후에 마지막으로 엄마의 품에 안겼다가 다시 살아난 내용입니다. 설명하는 교수는 사망 선고를 받고 캥거루케어를 통해 다시 살아난 사건이 8건이나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700g으로 태어나 심장과 뇌, 그리고 망막 수술 등을 받으며 사투를 벌리는 미숙아가 캥거루케어 치료를 받으며 회복되어지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실려 있습니다. 서울대에서 캥거루케어를 실험한 후에 그 결과를 데이터로 말하며 더 적극적으로 캥거루케어를 미숙아과 신생아 치료 방법으로 적용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숙아들이 인큐베이터 밖으로 나오면 감염이 우려된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면역성이 높아지며 뇌, 심장, 혈압, 모든 면에 있어서 어떤 약물 치료보다도 더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와 살을 맞대고 누우면 5분 안에 평안한 모습으로 깊은 잠에 듭니다. 아이와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도 신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엄마는 아이를 안는 순간 젖이 도는 것은 느낍니다. 온도가 올라가 35도를 유지합니다. 캥거루케어 치료를 하는 의료진들을 신생아는 최소한 3개월, 미숙아는 최소 1년간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캥거루케어를 하라고 말합니다. 

신생아들에게 모유를 먹이는 것이 좋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모유에 담겨 있는 영양을 과학의 기술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가슴에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것은 영양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신생아들이 엄마의 배속에서 10개월 동안 들었던 엄마의 심장 박동 소리입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들에게는 엄마의 배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충격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아이들이 엄마의 품에 안겨 자신이 10개월 동안 들었던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들을 때 가장 안정되고 행복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캥거루케어에 대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글을 읽고 그 영상을 찾아서 보면서 설교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영적으로 보면 신생아와 같은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한 신생아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숙아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미숙아 중에서도 1kg 미만의 심각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신생아이든, 미숙아이든 갓난아이는 자신 스스로 설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특히 부모의 돌봄은 필수적입니다.

저는 사투를 벌이던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엄마와 살을 맞대고 누워 엄마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치료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던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회복되는 오늘 본문 말씀과 요한복음 15장 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좋은 약과 좋은 의료시설을 가지고 아이의 생명을 회복시키려고 노력을 하지만 아이의 생명의 원천이 엄마의 품보다 더 평안하고 힘이 되는 곳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상처 입은 영혼들이 치유되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도 아닌 우리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 분이 내 안에, 내가 그 분 안에 있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작은 아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나눠 받아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방탕한 삶을 삽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결국은 낭패와 아픔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방황하던 중에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방탕한 삶을 살던 그가 아버지의 품에 안길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은 돈, 명예, 권력, 지식, 사회적인 성공 등을 얻으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곳은 우리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입니다. 그 하나님이 품에서 참된 안식을 찾을 수 있을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행복한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품에서 상한 영과 육의 치유을 받아 회복되며 하나님의 품에서 진정한 행복을 깨닫고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행복한 교회가 하나님의 품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온갖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교회에 아서 하나님의 품에서 용기와 새 힘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다시 힘을 얻어 일어서는 힘과 생명, 사랑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품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캥거루케어를 통해 다 죽어가는 아이들이 회복될 때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의료진들입니까? 사경을 헤매다 회복된 갓난아이입니까?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입니까? 역할에 따라 그 감동이 다를 수 있지만 누구보다도 아이를 품에 안고 아이에게 사랑을 주며 회복을 지켜보는 엄마입니다. 아이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가장 기뻐하고 감격하며 행복해 합니다. 영상을 보다 보면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들이 아이들의 조그만 반응에도 행복해 하며 조금씩 회복되는 모습에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를 향한 사랑과 기쁨이 엄마의 몸에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가 아이에게 전달되면서 놀라운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나가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가장 기뻐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받게 된 작은 아들일까요? 그의 형 일가요?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일까요? 동네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기뻐하며 감격해 하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자신의 것을 다 잃었고 자신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던 자식이지만 그 자식이 돌아온 것만으로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작은 아들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는 우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지치고 상처 입은 모습을 한 채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어김없이 우리를 품에 앉으시고 기뻐하시며 잔치를 베푸십니다. 

성경에는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가 열린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잃었던 한 마리의 양을 찾은 목자가 양을 목에 울러 메고 마을로 돌아와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하며 잃었던 한 마리의 양을 찾은 기쁨은 나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입니다. 한 마리의 양의 값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하는 비용이 훨씬 더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은 손익계산서를 두드리지 않습니다. 손익계산을 뛰어 넘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과 계산서가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누가복음 15장 1,2절에 나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리와 죄인들은 사회의 골치 덩어리였고, 사회의 암과 같은 존재로 사회로부터 경리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그 악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사랑으로 품고, 하나님 나라를 그들에게 전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주신 비유가 한 마리의 잃었던 양을 찾는 목자, 잃은 동전을 찾은 여인, 잃었던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감격을 이야기 하며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의 탓을 합니다. 목사는 교인들을 탓합니다. 교인들은 목사를 탓합니다. 교인은 교인을 탓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탓하고 남편은 아내를 탓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탓하고 자녀는 부모를 탓합니다. 지도자는 국민을 탓하고 국민은 지도자를 탓합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과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과 허물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실수와 이기적인 모습조차도 탓하지 않으십니다.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나와 하나님의 품에 안겨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고 참 평안을 얻는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행복입니다. 

이 주일 아침에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생명과 평안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거함으로 치유와 회복이 있고, 하나님께는 가장 큰 기쁨이 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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