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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바른 길 (행 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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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바른 길 (행 13:4-12) 
 
 
본문은 구브로 섬의 바보 전도 현장에서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어떻게 선교를 이루어 가시는 지 살피고자 합니다.

교회의 선교는 성령님께서 구별하신 선교사를 따로 세우므로 시작되었습니다(2). 이제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 구브로”에 갔다는 말씀은 선교지의 선택 역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음을 보여줍니다. “구브로”(Cyprus)는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데 안디옥 남서쪽 약 95km 지점에 있습니다. 사이프러스가 요즘은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도행전에는 바나바가 이 섬 출신이라는 것과(4:36),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파했던 몇몇 사람도 구브로 출신이었다는 정보만 미리 밝혀 놓았습니다(11:20). 바나바와 바울의 첫 활동 무대로서는 너무 멀지 않으면서 너무 낯설지도 않은 곳이었지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며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은 성도의 간절한 소망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많은 갈등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싶으나 내가 그분의 인도하심을 인식하기 어렵기에 생깁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이 막막해지곤 하지요. 하지만 선교지로 “구브로”가 선택된 일은 성령님께서 선교사들의 현실적인 여건이나 개인적으로 이끌리는 성향이나 상식적인 판단과 무관하게 인도하시지는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신비한 기운에 끌려가는 것처럼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멀리 볼 수는 없지만 가야할 전체적인 방향을 알고 있으면 최선을 다해 한 발짝 옮길 때 다시 한 걸음 앞이 보입니다.

구브로 동쪽 해안 도시 “살라미”에 이르자 바나바와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5). 자녀가 먼저 배불리 먹고 그 후에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마땅하다 하신 주님의 말씀(막 7:27)에 따라 ‘먼저 유대인에게’라는 원칙을 세운 것일 수도 있지만, 유대인인 그들이 타향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렇게 유대인 회당들을 따라가며 말씀을 전하다보니 어느덧 섬을 가로질러 약 150km 떨어진 서쪽 해안 도시 “바보”에 이르렀습니다(6a). 바나바와 바울은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한걸음씩 아주 자연스레 목적지를 향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구브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Venus) 여신에게 바쳐진 섬인데, 바보(Paphos)에는 그녀의 신전이 있습니다. 그곳에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6b-7a). 서기오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고 원로원 선거권도 가진 총독(proconsul)입니다. 로마 정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한 것이지요(7b). 성령님께서는 말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말씀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를 인도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큰 복이겠지요. 그런데 “박수 엘루마”가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고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8). ‘박수’는 동방 박사처럼 ‘박사’라고 번역될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천문을 보거나 복술을 행하는 등의 일로 앞일을 예측하여 총독에게 조언을 주며 거짓 선지자 노릇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엘루마는 지혜로운 총독이 가까이 두고 조언을 받을 만큼 뭔가 신비한 면모가 있었고, 또 총독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힘써 대항할 수 있을 만큼 탄탄한 자기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사단은 예루살렘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했었습니다. 이제는 안디옥 교회가 보편성을 드러내며 세계로 전진하자 첫 걸음부터 막아섰습니다. 언제나 진리가 드러나려 하면 거짓된 것이 막아서는 일들이 생깁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면 자기 영향력이 축소되거나 이득이 감소될 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힘써 진리를 대적하는 세력들이 저항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원할 뿐,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교회가 처음부터 그런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대적했음을 보여줍니다.

9절을 보면 성령님께서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에게 충만히 역사하셨습니다. 혹자는 가만히 있었던 바나바를 마음 좋은 사람으로, 바울을 한 성깔 하는 사람으로 평가할지 모릅니다. 설령 그런 성격들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성경은 바울 사도가 더 이상 못 참아서 한바탕 퍼부은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성령이 충만해진 결과 바울은 엘루마의 본질을 꿰뚫어 봅니다. 지혜로워 보이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였고, ‘예수의 아들’(바예수) 같으나 “마귀의 자식”이었고, 객관적인 조언자 같으나 “모든 의의 원수”였습니다. 바울은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10)고 단호하게 제지합니다.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취향대로 고르는 일에 익숙해진 소비자 시대의 사람들은 교회도 자기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교회가 사람을 찾아가기도 하고 제거하기도 했음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교회가 받아들일 사람과 거부할 사람을 선택했지요. 성령님께서 당신님의 일꾼을 통해 “주의 바른 길”을 선언하실 때, 작은 이득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잡다한 인간적 사상이나 기존 관습으로 계속해서 희석시키려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셔서 교회의 순결성을 보존하시고 교회의 권위를 세우십니다.

사도는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하였고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11). 바울의 말과 함께 성령님께서 놀라운 기적으로 즉각 역사하신 까닭은 주의 바른 길을 막는 세력을 돌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란 언제든지 내 유익에 따라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부담 없는 친교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며 대적의 세력을 강하게 제압하시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계속 주의 바른 길을 굽히는 상황에서는 단호하게 그를 제거하셔서 돌파해 나가십니다.

성령님께서 엘루마를 대적하실 때, 바울이 신비한 기운에 휩싸여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입술이 움직인 것은 아닙니다. 또 대적했다고 하면 큰소리로 고함치는 것을 떠올리기 쉬우나, 총독 앞에서 그런 행동을 취하긴 어렵지요. 오히려 냉철하게 상황을 주목해서 그냥 두면 더 악한 일도 꾸밀 위인임을 분별하고 단호하게 대처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점잖은 태도로 물러서면 복음의 능력도 입증되지 못하게 된다고 판단했겠지요. 바울은 ‘우리말이 옳다고 생각되면 받아들이시고, 엘루마씨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면 그리 하시죠’라며 물에 물탄 듯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아무런 마찰 없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꽃길을 걷는 교회가 아닙니다. 언제나 우아하고 고상한 크리스천의 모습으로만 살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갖가지 모양으로 공격해오는 사단과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대적하는 세력이 힘쓰고 있기에 영적 전투 없이는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치열한 전투 현장을 돌파해 나가려면 먼저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주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하고 먼저 충실히 그 길로 걷고 있어야 하지요. 그 후에야 주의 길을 굽게 하려는 세력에 대해서 회피하지 않고 단호히 응전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적하는 자에게 성령님은 참으로 두려운 분이되십니다. 엘루마는 즉시 소경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가 영원한 소경이 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성령님의 자비하심 또한 볼 수 있습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두려운 경험이었겠지만, 엘루마도 다메섹 도상의 바울 사도처럼 잠시의 고통 후에 눈에 비늘을 벗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기적은 엘루마를 꺾으시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총독에게 주의 바른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하시려는 목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징(勸懲, discipline)이 단호하게 시행될지라도 이 역시 바르게 함을 목적으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12)는 말씀은 이 사건에서 성경이 어떤 부분을 주목했는지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행했던 기적을 주목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엘루마와의 대결에서 멋지게 승리한 사실에 매료될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셨을 때 그분께서 세우신 종들의 말을 “주의 가르치심”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조명합니다. 이를 위해 본문은 심지어 총독이 들었던 “주의 가르치심”의 내용조차 언급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사도의 가르침을 주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바보 사역을 결산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총독은 기적을 통해 “주의 가르치심”에 대해 충격을 받고 믿었습니다. 이는 그가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더 이상 인간의 말로서가 아니라 “주의 가르치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이 있는 곳에서는 사도의 가르침을 인간의 말이 아닌 주의 가르치심으로 여기고 믿는 일이 발생합니다. 일반 책들과 똑같이 종이에 인쇄되어 책으로 엮어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기적입니다. 거짓 가르침에 빠져 있던 자나 주의 가르침을 대적하던 자가 주의 말씀을 통해 주의 바른 길을 걸어가는 일 또한 성령님의 역사하심 없이는 불가능한 기적이지요.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총독처럼 주의 말씀에 눈을 뜨고 주의 바른 길을 걸어가게 되는 일이 우리 가운데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훼방하는 세력들은 단호하게 제거되어 거룩한 교회로 세워지질 또한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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