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르비딤의 하나님 (출 17:1-7)

첨부 1


어느날 엄마 낙타와 아기 낙타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아기낙타: 엄마, 우리에게 발톱은 왜 있어? 
 엄마낙타: 그것은 사막을 잘 다닐 수 있게 우리 몸이 변형된 거란다. 
 아기낙타: 엄마, 우리 등에 혹은 왜 있어? 
 엄마낙타: 그것은 우리가 사막을 다닐때 영양분을 저장해 두었다가 먹기 위해서     있는 거란다. 
 아기낙타: 그런데 엄마, 나랑 엄마는 그런 게 있는데 왜 우리는 동물원에서 살아? 
 엄마낙타:-_-;; 

여러분, 짤막한 이 이야기가 시사해 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낙타는 사막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발톱과 등의 혹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을 두려워하고 사막이 아닌 동물원에 있는 낙타는 그야말로 어린아이들의 구경거리밖에 될 수 없는 낙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낙타는 사막에 있어야 합니다. 비록 사막이 힘들고 뜨거운 곳이지만 낙타가 사막에 있을 때 그 낙타는 진정한 낙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우리의 삶 속에서 사막과 같이 뜨겁고 광야와 같이 메마른 삶들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만약 우리의 삶에 사막과 같은 뜨거움과 광야와 같은 메마르고 척박한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동물원의 낙타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생의 사막을 피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사막과 같고 광야와 같은 삶을 개척하고 극복하여 결국 가나안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의 발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1절 말씀을 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이후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광야에서 떠나 노정대로 행하여서 르비딤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는 지경에 이르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여정대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가나안땅이 아니라 마실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척박하고 메마른 땅 르비딤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여기 르비딤은 시내산 북서 2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현재의 와디 페이란으로 추정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이곳으로 인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이 풍부하고 거하기 좋은 장소로 인도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땅, 마실물 조차 없는 척박한 르비딤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신8:2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그들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그들을 시험하시고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시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시험 보는 날 학교에 안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험을 통과해야만 새로운 학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 준비하느라고 힘이 들고 스트레스를 받고 심지어 시험 보는 날 몸이 좀 안 좋아도 시험을 보러 가야 합니다. 그것은 시험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시험이후의 있을 한 단계의 성장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험이라는 것은 결국 학생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코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어떻습니까?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시험을 통과하는 기간이 쉽거나 재미있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고통스럽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기간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통과하면 우리의 믿음은 분명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시험은 유익한 것이요, 필수불가결한 신앙의 요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험을 꺼려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기피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곤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그들은 모세와 다투었다고 하였습니다. 
물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3절 말씀에도 보면 이들은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성경이니까 그렇지 아마 실제로는 굉장했을 것입니다. 

야  이 00야 네가 우리를 끌고 나와 가지고 말이야 지금 꼴이 이게 뭐야... 너 책임져 이 00야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들이 모세를 대적하고 모세와 다툰 것은 모세 혼자와 다툰 것이 아닙니다. 
결국 누구와 싸운 것 인줄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과 싸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마르고 척박하고 목마른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향하여 원망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에게만 원망한 것이 아니라 그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을 향한 원망이요 불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원망과 불평은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불평인 동시에 곧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동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도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는 것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역장을 향하여 원망하는 것, 부서의 부서장을 원망하고 교회의 장로님과 목사님을 원망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 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긍정적인 결과나 상황 뿐만 아니라 혹시 우리가 예상치 않았던 부정적인 결과들을 만나게 될 때 이것 역시 하나님의 시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탓함으로 그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개인의 삶 속에서도 가나안과 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르비딤과 같이 척박하고 메마른 삶의 환경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현실 속의 우리의 삶의 모습은 바닥이 쩍쩍 갈라져버린 논바닥과 같은 메마름이요 곤고함일때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또는 가족을 향하여 또는 나 자신을 향하여 원망하고 비난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가나안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가나안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르비딤이지만 하나님은 르비딤과 같은 척박하고 메마른 삶의 환경속에서 우리를 끝내버리지 않으실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르비딤과 같이 척박하고 메마른 삶의 환경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남 탓하지 말고 오히려 변함없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오히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너 때문에 안 돼, 우리 집은 너 때문에 안 돼라고 말하면 정말 그 사람 때문에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너 때문에 잘 될거야. 우리 집은 너 때문에 잘 될거야 하고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기 시작하면 정말 그 사람 때문에 잘 되는 역사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가운데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법칙이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된 다고 말하는 사람은 되고,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안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인 것입니다. 

우리 이 시간 서로 옆 사람을 축복하며 고백합시다.   
당신 때문에 우리 교회는 잘 될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 교회는 부흥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집에 가시면 꼭 가족들에게 축복하며 고백하십시오. 
에이 웬수같은 인간, 당신 때문에 하나도 되는 게 없어.라고 말하지 마시고 당신 때문에 우리 집은 잘 될 겁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 집은 축복받을 겁니다. 
그렇게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할 때 각 가정과 우리 교회 공동체는 반드시 축복하고 고백한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 속에서 위기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면, 르비딤과 같이 척박하고 메마른 삶의 환경을 만나게 된다면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 신앙의 위기를 만날 때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우리의 지도자도 우리의 가족도 아니요, 하나님도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그들의 싸움의 대상으로 삼고 다투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싸움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주님 앞에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치고 또 치는 사람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의 시험들을 통해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또 낮아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오늘 말씀의 르비딤과 같은 환경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삶 속에서 르비딤을 만나게 될 때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점검해보는 것이고 나를 다시 한번 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르비딤을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오늘 출17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장인 16장에서 이미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에서 실패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출16장2-3절 말씀을 볼까요? 16장에서 이미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배고파 죽게 하신다고 모세를 원망했던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배고파 죽게 하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위해 아침에는 만나와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통해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려고 예비하시고 계셨던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 그들이 불평하고 있는 출17장에서도 그들은 분명히 아침으로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입고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번에는 목마르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저녁까지, 오늘 아침까지 아니 바로 이 자리에 나오게 되는 이 순간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는 동안 조금 목마르면 조금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지금까지의 그 모든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망각한 채 그저 목마르다고만, 물을 내놓으라고만 아우성치는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찌나 흡사한 지 모르겠습니다. 

기억상실증이란 병을 아시죠? 전에 있었던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바로 은혜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 같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은혜는 모두 망각의 늪으로 빠뜨려버린 채 하나도 기억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문제들만 해결해 놓으라고 아우성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연약한 모습이 바로 2000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바로 이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많이 흡사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은혜기억상실증에 걸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의 이 모습 이 대로 또한 다시 받아주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16장에서 배고파 죽겠다고 원망했던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하나님이 17장에서는 반석을 쳐 물을 나게 하심으로 그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시는 은혜를 또 다시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늘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에게 또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연약하고 믿음 없는 모습으로 나왔다할지라도 하나님은 또 다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4절 말씀에 보면 은혜기억상실증에 걸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뭇 다른 모습의 사람이 한명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공동체에 불어 닥친 목마름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그는 자신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4절 말씀에 보면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싸우는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묵상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신적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그의 권위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수 있는 절대적이고 막강한 권위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에게 달려들어 원망하고 돌을 들어 던지려고 하는 그들을 보면서 그가 자신과 싸우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려고 했다면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권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맞서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야말로 같은 동족끼리 치고 받고 때리고 죽이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른 사람과의 싸움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조금만 더 참자..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거야.. 하면서 하나님앞에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상가를 어느 여전도사님과 심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은 주위에 모텔이 띄엄띄엄 섞여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심방하던 길에 모텔 골목을 막 돌아나오고 있는 그 찰나 그 말 많은 모 집사님이 그 사실을 목격하고는 그야말로 번개통신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박집사,, 나 최집사야.. 세상에나 만상에나... 어떻게 
그야말로 번개처럼 그 소문은 이집에서 저집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모셔놓고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아무런 대꾸도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사님은 장로님들 제가 다 부족한 탓이지요.. 저 일주일간 기도하고 옵니다. 하고는 기도원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소문을 내기 좋아했던 그 박집사님이 목사님을 시기해서 그런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결국 그 박집사는 그 교회를 다닐 수 없게 되었고 나중에 알고보니 사업이 부도가 나고 애들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는 등 그야말로 자기가 했던 일에 대한 응당한 보응을 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장로들과 성도들과 싸우려고 생각하고 증인을 대라는 둥 또 목소리 톤이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등 했으면 그야말로 교회는 난장판이 되는 것이고 그럼 결국 목사님이 지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주어진 위기를 기도로 이겨내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모세 역시 그 위기를 기도로 이겨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나를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 다시 은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 이번에도 역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5절 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손에 잡고 호렙산 반석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왜 그냥 가라고 하지 않고 지팡이를 들고 가라고 하였을까요? 
이 지팡이는 어떤 지팡이였습니까? 
이 지팡이는 바로 물을 피로 만들었던 지팡이며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했던 그 믿음의 지팡이였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가면서 모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래 이전에 나와 함께 하셔서 나로 하여금 물을 피로 만들게 하시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던 그 하나님이 이번에도 분명 역사하실거야라는 믿음으로 호렙산을 향하여 나아갔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믿음의 지팡이가 있습니까?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여러분은 분명 알고 계실 것입니다. 
과거 어느 순간 여러분이 믿음의 지팡이를 내어밀었을때 여러분을 도와주시고 여러분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이 시간 여러분의 기억 깊은 곳에서부터 꺼내어 들어올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나에게 이렇게 역사해주셨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밤에도 나를 도우시고 역사하시사 큰 영광 나타내 주옵소서.. 르비딤의 척박하고 메마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현재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요, 현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미래에도 역사하실 것을 믿는 기도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분 앞에 믿음의 손을 드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지팡이를 드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간절히 부르짖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모세의 기도가 응답되어 척박한 르비딤땅에서 생수가 솟아올랐던것처럼 르비딤과 같은 우리의 척박하고 메마른 삶의 환경속에도 하나님의 생수의 역사가, 기적의 역사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르비딤의 역사입니다. 르비딤은 목마른 곳이었습니다. 메마른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믿음의 기도속에서 생수의 땅이 되었습니다.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처하여 있는 상황이 르비딤과 같이 열악하고 힘겹고 목마르고 안타까운 상황과 처지라 할지라도 이 밤에 믿음의 손을 들고 믿음의 지팡이를 들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 땅은 갈함이 없는 생수의 땅, 축복의 땅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타는 사막에 있어야 진정한 낙타입니다. 
낙타에게 발톱이 주어져 있는 이유는 뜨겁고 메마른 곳, 사막에서도 낙타의 낙타됨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사막에 없어지게 해 달라고 떼쓰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서도 광야에서도 당당히 그 길을 걸어 끝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르비딤과 같은 신앙의 위기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시험을 자신과의 싸움으로 알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기 위해 낮아지는 사람입니다. 
그 낮아짐은 결국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낮아질 수록 하나님은 높아지시고 내가 작아질수록 하나님은 커지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으로 가라고 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 이 밤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르비딤과 같은 위기를 만난 00야 내가 전에 너에게 역사했던, 너를 도와주었던 그 00사건을 기억하지.. 그때 네가 들고 기도했던 그 믿음의 지팡이, 기도의 지팡이를 꺼내어보아라.. 
그때처럼 너를 도와줄 것이다. 그때처럼 너를 붙잡아줄 것이다. 그때처럼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할 때 오늘 이 밤 여러분에게 주어진 르비딤이 메마른 땅이 아닌 갈함이 없는 생수의 땅, 축복의 땅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을줄로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