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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부득불 해야 할 일 (고전 9: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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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득불 해야 할 일 (고전 9:14-19)

고린도전서 8장부터 11장까지는 우상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8장에서 우상 제물에 대해 권면하고 나서 갑자기 9장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바울이 사도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직을 의심하는 무리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당시 사도로 인정받으려면 예수님의 제자이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자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12제자에 포함되지 않았던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지만 그를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을 받았습니다. 

9:3-7절을 보면 우상제물과 몇 가지 문제를 통하여 사도성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사도성에 대해 9:2절에서 이렇게 변증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하면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주님께서 인쳐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절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 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 합니다. 

이는 우상 제물이나 결혼문제 특히 교회에서 생활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비판에 대한 대답입니다.  한마디로 다할 수 있지만 복음을 위해 참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이 중심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도 포기하고, 고린도 교인들의 요구도 묵살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사도직의 권리를 쓰지 않고 일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부득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사명이요, 존재이유임을 강조합니다. 

여기 ‘부득불 할 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낭케’라는 단어로 '마땅히 해야 할 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억지로’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숙명’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자신이 숙명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그 숙명인 복음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요,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를 가장 핍박했던 자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인을 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인생은 송두리째 바뀝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불러주신 이유는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행 20:24절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께 받은 사명이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복음 전도가 곧 사명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에도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친히 행 9:15절에서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시면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이 복음을 위해 택함을 받았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음전하는 사명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이방인을 위한 복음증거자로서의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이방인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아직도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자로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 1:14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 가운데 있던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빚진 자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가리켜서 흔히 "공수래 공수거"라고 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생을 "공수래 공수거"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창조의 질서를 말씀하면서 우리 인생을 창조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또는 "사명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또 다른 우리의 이웃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도라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명령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요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의무요 사명임을 기억하고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가 부득불 할 일’이기 때문에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바울은 정말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출신 성분이 남다른 사람입니다. 경건한 가문 출신으로 그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지키며 성장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최고 명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는 로마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 3:5절에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왕족이요, 종교지도자요, 신앙적으로는 완벽한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게 된 후에도 자랑거리가 남다릅니다. 그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직접 주님께 그 누구도 받아 본 일이 없는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의 신비한 영적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만큼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 많은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도중에 정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과거의 자랑거리는 다 배설물처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한 그 대단한 자랑거리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잊어버렸습니다. 

빌 3:7-9절에 사도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고백 했습니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만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가정도 가문도 포기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도 버리고 결혼도 포기했습니다. 지위와 가말리엘에서 배운 학문과 율법도 다 버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주만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모든 육신적인 자랑거리를 다 포기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다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의 이러한 겸손한 신앙태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3.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가 부득불 할 일’이기 때문에 상급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교회 일을 해서 상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일은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보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의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면, 국민의 4대 의무입니다.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근로의 의무입니다. 이것을 잘 지키는 것이 국민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무를 감당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들은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주장하면서 병역의무 및 집총을 거부합니다.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국가 존속을 위한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지 않는 것이므로 병역 거부 시에 최소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습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험이 오면 위험을 알리는 경고방송을 합니다. 빨리 피하라는 것입니다. 방송의 역할은 경고하는 것뿐입니다. 피하고 안하고는 방송을 듣는 사람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만일 파수꾼이 경고를 했는데도 벌 받을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그 책임이 당사자에게 있고, 만일 파수꾼이 경고를 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이 파수꾼에게 있으므로 그 생명 값을 파수꾼에게 묻겠다고 에스겔서 33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경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파수꾼의 역할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도망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요나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나게 했습니다. 결국 바다에 던져젔고 큰 물고기 배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였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에게 화가 찾아 왔습니다. 

요나가 복음을 전하기 않는 한 그 자신도 살 수 없고 니느웨이 백성도 살리 수 없습니다. 요나는 결국 회개하고 니느웨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니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경고 했습니다. 회개하면 살 길이 있다는 복음만 전했습니다. 회개하고 안하고는 니느웨이 사람들의 몫입니다. 요나는 할 일을 다 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도 살고 니느웨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복음이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죄를 지었어도 용서받을 길이 있고, 죽어도 살 수 있고, 지옥 갈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알려 주지 않으면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을 복음을 전하며 상급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 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9절에서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함으로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 안에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복음 때문에 자기의 자유를 제약시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종처럼 노예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복음만 전해질 수 있다면 노예취급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상이나 상급이 없습니다. 자신의 자존심도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주인을 위해 바쳐야 합니다. 노예는 주인을 위해 죽도록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 노예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성도나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아니하면 우리도 죽고, 교회도 죽고, 모든 영혼들이 다 죽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정체하며 퇴보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한국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잃어버리고 영혼구원 하는 기쁨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영혼구원의 열정과 기쁨을 회복하여야만 합니다. 저는 이러한 일이 우리 교회에서 먼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세상의 그 어느 일보다도 천하보다 귀한 영혼구원 하는데 열정을 다하는 교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좋은 소문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외형적인 것이나, 교회의 프로그램 때문에 소문나는 교회가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에 영혼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교회의 본질인 영혼구원과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처럼 전도와 선교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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