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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래도 그리고 그러기에 (겔 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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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리고 그러기에 (겔 20:10-17)

인도 ‘캘커타의 성자’라고 불리는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본명 : Agnes Gonxha Bojaxhiu, 1910년~1997년)가 그녀의 책상에 붙여놓았다는 아름다운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그래도”입니다.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도 사랑 하십시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 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십시오.
  당신이 성공하게 되면 가짜 친구와 진짜 적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도 성공하십시오.
  오늘 당신이 착한 일을 해도 내일이면 사람들은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십시오.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입니다. 그래도 성실하십시오.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사리사욕에 눈 먼 소인배들이 큰 뜻을 품은 훌륭한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크게 생각하십시오.
  사람들은 약자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힘 있는 자 편에 섭니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분투하십시오.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래도 만드십시오.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도와주십시오.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입니다. 그래도 평화롭고 행복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입니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익이 주어지는 곳으로 우리의 눈길을 가게 만들고, 그것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유익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과감하게 거절합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유익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길일지라도, 신앙의 양심과 가치가 그 길을 가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읽어드린 ‘그래도’라는 글은 우리 신앙인의 가치와 매우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일지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을 가야하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어렵지만, 그 안에서 희망을 보고 용기를 갖고 사는 신앙을 저는 ‘그래도의 신앙’이라고 이름붙이고 싶습니다. 힘들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삶이지만 그래도 기쁨으로 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신앙인은 그런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래도의 신앙’과 함께 ‘그러기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도’라는 말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단어입니다. ‘그래도’라는 말이 들어가면 앞에 존재해 있는 상황과는 다른 삶이 뒤따르거나 현재의 상황과 다른 상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러기에’라는 말은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여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삶이 행복합니다. 그러기에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기쁨을 누리며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힘들 때에는 ‘그래도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상황에서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평탄하고 기쁠 때에는 ‘그러기에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평탄하고 기쁜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풍요롭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하여 살면 우리의 인생은 피곤해집니다. 오늘의 삶이 힘들 때 ‘그러기에’라고 생각하면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가속하게 됩니다. ‘오늘 기분이 안 좋아. 그러기에 내 마음대로 살거야!’ 이것은 바른 삶이 아니고 바른 신앙도 아닙니다. 

오늘의 삶이 너무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그럴 때 ‘그래도’라는 생각을 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 행복하다. 그래도 이 행복은 오래 가지 않을거야. 지금은 축복을 누리지만 그래도 언젠가 나에게도 고난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불행의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래도의 신앙’과 ‘그러기에의 신앙’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주전 597년, 바벨론이 유다를 두 번째 침공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그 때 비록 유다는 멸망당하진 않았지만, 왕이 된 지 불과 석 달 열흘 밖에 안 된 여호야긴 왕까지도 바벨론에 사로잡혀가게 됩니다. 왕만 포로로 잡혀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왕족들과 수많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갑니다. 그 때 제사장이었던 에스겔도 25살의 젊은 나이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게 됩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지 5년쯤 지났을 때인 30세에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이렇게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고생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임을 고발하면서,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7절 이하에서 그것을 고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부터 애굽의 가증한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눈에 보이는 대로 이끌려 살아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경고하셨습니다. 애굽 땅에는 우상들이 즐비했습니다. 눈만 들면 들끓는 우상이 보이는 그런 사회에 살면서 우상숭배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우상숭배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9절에서 “그러나 내가 그들이 거주하는 이방인의 눈앞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9절 첫 단어인 “그러나”라는 말은 ‘그래도’라는 말로 바꾸어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400년의 년수가 다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것이 “내 이름을 위함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하나님 스스로 지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의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베풀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죄를 따라가는 그들의 습관은 광야생활 중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광야 생활 중에 하나님께서는 ‘그래도의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얽어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 11절과 13절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계명’입니다. 신명기 10: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과 말씀은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따라 살도록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그 말씀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썽만 피우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의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말도 잘 듣지 않고 툭 하면 불평하는 백성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 주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하나님의 계명을 거부했습니다. 본문 13절에 말씀합니다.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래도의 은혜를 베푸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거부하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계명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안식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제정해 주신 안식일마저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든지 버리셔야 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래도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17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아껴서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하지 아니하였었노라.”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래도 불쌍해서 다 죽여 버리지는 않았다. 광야에서 전멸시키지는 않았다.” 지독히도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래도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불쌍해서 말을 듣지 않을 지라도 다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전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이미 다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미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래도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다 죽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대로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좇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손을 놓아버리고 우리 마음대로 달려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게서 얼굴을 돌려 세상을 바라볼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돌이키지 않으시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믿음을 따라 산다 하면서도 믿음을 잃어버린 채 살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옛사람의 성품과 모습을 버려야 하는데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 행했던 습관과 성품을 그대로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참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게 모두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래도의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하늘의 생명을 누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오늘도 이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래도의 은혜’를 주셨고, 그 ‘그래도의 은혜’로 오늘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그래도의 은혜’ 안에서 ‘그래도의 신앙’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내 삶이 힘들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그래도 그 상황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래도의 은혜’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 때론 마음이 무겁고 걱정이 가득할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그래도 그 문제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그래도의 은혜’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래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래도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분노가 일어나고 미움이 가득할지라도 그런 감정들을 폭발시키지 않고, 그래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래도의 은혜’가 아직 우리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이 힘드십니까? ‘그래도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힘들다고 포기해야 할 상황은 우리에게 절대로 없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그래도’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일수록,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불안과 걱정이 나를 짓누를 때일수록 ‘그래도’라고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래도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 앞에 새로운 역사가 창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 가운데 빠져 파멸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인생의 짐으로 인해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져서 낙오자의 인생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문제가 크고 힘들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문제 앞에서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상황에서 ‘그래도’라고 외치며 믿음으로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도’라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다시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평안한 삶을 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그러기에의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약속하신 약속의 요약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네가 부르짖었느냐? 그러기에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 ‘네가 참으로 충성하였구나. 그러기에 내가 네게 많은 것을 맡겨 주리라.’ ‘네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구나. 그러기에 내가 네게 하늘의 신비를 알려주리라.’ ‘네가 내 말에 순종하였구나. 그러기에 내가 말씀에 약속한 복을 네게 안겨 주리라.’ 
  
그런 은혜가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복을 마음껏 누리시고 그 복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건강합니다. 그러기에 그 건강한 몸으로 더욱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힘써야 합니다. 가정이 행복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누리는 그 행복을 내 이웃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그것을 값지게 사용해야 합니다. 받은 은혜와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은혜와 은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래도의 은혜’는 우리에게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고, ‘그러기에의 은혜’는 지금 누리는 복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도록 만들어줍니다. 
  
이것을 결코 거꾸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 때 ‘그러기에’라고 생각하면 더욱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고통스러울 때 ‘그러기에’라고 생각하면 더욱 고통스러운 삶이 될 뿐입니다. 문제가 풀려지지 않을 때에 ‘그러기에’라고 생각하면 그 문제는 더욱 꼬여갈 뿐입니다. 그럴 때에는 ‘그래도’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러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희망이 생기고, 고통이 사라지고, 문제가 물려집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고 평안할 때에는 ‘그러기에’라고 생각해야지 ‘그래도’라고 외치면 삶은 거꾸로 곤두박질하고 맙니다. 우리의 삶에 행복으로 가득할 때, ‘행복하다. 그래도 그 행복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면 행복은 그 순간 정말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럴 때에는 ‘그러기에’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행복을 더욱 풍족하게 누리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의 삶에는 때론 고통이 있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고, 힘든 문제가 우리를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는 ‘그래도’라고 외치며 더욱 믿음의 용기를 내십시다. ‘그래도’라고 외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평강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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