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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려울 때일수록 (삼상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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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때일수록 (삼상 23:1-5)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한자 고사성어 가운데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다투던 때에 항우가 한나라 군대에 포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빠져 나갈 길도 보이지 않고 병졸은 줄어들고 군량미도 떨어지고 있었던 어느 날 밤 사방에서 초나라 군사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고달픈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고향을 그리워하게 하는 구슬픈 노래였습니다. 사실은 적진에서 심리전의 일환으로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고향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었습니다. 

항우는 깜짝 놀라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 군사들 대부분을 장악한 것으로 판단하여 마지막 주연을 베풀고 나서 자결함으로 자신의 운명을 마무리하고 말았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인생을 살다보면 그런 사면초가의 상황을 직면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요즈음 우리네가 처한 삶의 모습이 바로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이 아닙니까?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끝은 보이지 않고 남북 긴장의 상황은 여전하고, 내수 침체와 물가고, 실업률의 증가와 취업난, 자살률의 증가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정황은 정말이지 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사면초가의 상황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 때, 그에게 두 가지 아주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하나는 사울이 아히멜렉을 비롯한 85인의 제사장과 성읍 놉에 사는 사람들을 진멸했다는 소식입니다. 지난주에 보셨지만, 억울하게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다윗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무엘상 22:2절에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로 모였는데, 그 수가 4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울 왕의 폭정에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사울의 정권 아래서는 발붙이고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다윗 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400여명을 이끌고 도망자 생활을 해야 할 다윗에게 있어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다윗 곁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점점 많아져서 이제는 600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삼상 23:13) 그러니 갈수록 '이 많은 무리들을 어떻게 먹일 것이냐' 하는 것이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에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준 것입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과 그 일행에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던 '거룩한 떡'을 주어서 먹게 합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도움을 주었다는 소식이 사울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문에 제사장 아히멜렉뿐만 아니라, 아히멜렉이 살고 있던 '놉' 땅의 제사장 85인을 죽였고, 그 땅의 모든 사람들을 칼로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끔찍한 살생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자신 때문에 하나님의 제사장이 85명이나 죽임을 당했고, 제사장의 가족들과 그 동네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이 살해를 당했으니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낙담이 되었겠습니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직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야기가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히멜렉 제사장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마음아파 하고 있을 때에, 또 다른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과 인접하고 있던 '그일라'라고 하는 농촌 지역에 블레셋 군인들이 쳐들어와서는 농사지어 놓은 것들을 모조리 약탈해 갔다는 소식입니다. 군사도 없는 시골 마을 사람들은 블레셋 군사들의 약탈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농사지은 곡식들과 기르고 있던 가축들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의 마음은 결코 편치가 않았습니다. 블레셋을 치고 동족 그일라 거민을 도와주는 것이 다윗에게는 더 큰 위험을 자초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의 손에 잡혀 죽을지도 모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를 따르고 있는 600여명의 식량조차 해결해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쫓겨 다니는 처지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먹을 것을 해결한다는 것은 너무 너무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블레셋은 예로부터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 말 그대로 '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그저 사울 왕과 당시의 정권이 싫어서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블레셋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상황이 어느 것 하나 다윗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또 그일라 거민을 구해주는 것은 굳이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나라가 해 줄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좌에 앉아 있는 사울에게 그일라의 그 억울한 일을 풀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지, 도망자 신세인 다윗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일라 거민들의 억울함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런 행동이 좀 어리석어 보이지 않습니까?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할 처지에 있는데도, 그는 억울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일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오히려 다윗은 목숨을 걸고 그일라 백성을 도와주었지만,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어서 그 곳을 도망쳐야 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생명을 걸고 도와준 그 그일라 거민들이 다윗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물론 그일라 거민들이 자신들을 도와준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준 것이 다윗이 밉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제사장 아히멜렉의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다윗의 도움을 받았고, 다윗이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도 아히멜렉이 당한 것처럼, 온 성읍이 죽임을 당할지 몰라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다윗을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선을 행한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유익도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한 후에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손에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런 경험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부모가 세상을 떠난 가운데 어렵게 살아가던 남매가 있었습니다. 오빠가 어렵게 고학을 하고 대학에 들어갔고, 또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려는 가운데 이 남매가 모처럼 강가에 물놀이를 갔다가 어떤 어린 아이 하나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자 오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꺼집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너무 탈진해서 그 강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습니다. 

시신이 건져지고 동생은 그 오빠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 통곡을 하는데 그 옆에 어린아이 부모가 자기 아이만 보듬고 한바탕 울더니 고맙다는 인사한마디 안하고 그냥 그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 동생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아마 다시는 남의 어려움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역시 인생의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금융위기로 인해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남을 돕다가 빚보증을 잘못 서서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한치 앞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비극을 당하여 몸부림 칠 때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 같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누구나 “야! 정말 모르겠다” 하고 말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잘 모릅니다. 사실 인생의 사사건건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요구한다면 약간의 대답은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진리는 될 수 없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불행을 당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의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의 어려운 형편에 대하여 각자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전부 다 잘못된 견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그들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완전히 아는 것처럼 떠든 그들을 좋게 보셨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할 때마다 인간적인 설명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더 미궁으로 빠지고 맙니다. 

불행과 행복이 공존하고 의와 불의가 함께 병행하는 이 땅의 상황을 우리는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에서는 양식이 남아서 버리는데 다른 한 모퉁이에서는 하루 한끼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아 상태에서 죽어 가는 현실의 모순을 우리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고층 아파트가 서있는 그 맞은 편에 한숨과 탄식이 끊이지 않는 음습한 지하 셋방에서 살아가는 이 현실의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절대로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왜 다윗인가? 그리고 왜 사울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 있는데 한 사람은 그 은혜 앞에 자신을 맡겼지만, 또 한 사람은 그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그일라 사람을 목숨을 걸고 달려간 것도 그의 영웅 심리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그일라' 거민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자신의 결정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2-4절을 보세요.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블레셋을 물리치고 동족을 구원하는 일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자신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반대 할 때도 그는 떠 엎드려 기도합니다. 3절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블레셋을 침공해서 그일라 거민이 빼앗겼던 것들을 되찾아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지금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경내에 머물고 있는 것만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 어찌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우리는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때 다윗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4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다시 묻자온대- 기도!! 

생각해 보세요! 다윗은 항상 이 기도의 생명줄을 놓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사울은 기도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울의 삶은 점점 메말라 가는 실패의 인생으로 치달았고, 그 결과 항상 다윗의 뒤만 쫓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기 위해 영적 안테나를 하나님을 향해 고정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기 위해 항상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항상 앞서가는 인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고 유하였음으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한 어느 누구도 다윗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가 실패의 자리에서도, 그리고 알수 없는 고통을 직면 할 때도 그는 기도의 줄을 놓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집중 폭우와 유난히도 더웠던 폭염이 이제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밀려 가을을 향기를 맡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말 우리 역시 기도의 자리에 서야 할 때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순간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기도의 날개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런 특권을 행사하며 하늘을 향해 나래를 펼치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정말 이상한 일은 우리는 소소한 일상에서 어느 정도 기도를 실천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많이 서식하는 secretary bird가 있습니다. 이 새는 상당히 높이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위험이나 어려움에 직면하면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땅을 기다가 붙잡히는 그런 새입니다. 날아야 할 때 나르지 못하는 비서새-그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로 현실을 넘어서서 살라고 기도의 날개를 주셨는데 언제 기도의 날개를 펴 보셨습니까? 왜 기도하지 않으시나요? 지금이야 말로 기도할 때가 아니신가요? 그냥 기도할 때가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아니십니까? 

이제 우리 교회는 9월 1일에 전 교인이 나와서 새벽에 엎드려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생활이 무엇입니까? 영적 생활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던 사람이 믿음 안에서 거듭남으로 성령의 감화와 인도로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중심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는 기도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그의 자녀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권이며, 비밀의 세계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역사의 거룩한 발자취를 남기고 간 사람들은 그들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가히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해냈습니다. 

사실 기도의 자리를 나가기가 선뜻 그렇게 쉬운 것만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기도의 자리는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피하면 평생을 살아도 영적인 풍요를 한번 누리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한 번만이라도 승리하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비록 지금은 내가 당한 이일에 대해 명쾌한 답이 없어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줄로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일수록 기도의 자리에 계십시오.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보다 앞서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아름답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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