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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관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약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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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약 2:1-13)

우리나라가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있었던 서구 문화의 유입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삶의 여러 영역에서의 변화를 초래하게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현저한 영향이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소위 <목표 중심의 인생관>을 갖게 하고, <목표 중심적 사람됨> ‘task-oriented person’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결코 잘 못 된 것은 아니고 이런 인생관의 전환이 전쟁의 비극을 극복하고 단기간의 한국의 문화, 산업의 발전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결과 우리 문화 그리고 동양 문화가 오랜 세월 강조해온 <관계 중심적 사람됨>‘people-oriented person’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일이 잘 되어가고 있느냐를 물을 때 <괜찮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말의 ‘괜찮다’는 어원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소개됩니다. 본래 괜찮다는 ‘괜하지 않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그 뜻은 ‘공연하지 않다’로 ‘원인이 없다’는 의미로 전해지기도하고 어떤 이는 한문의 ‘관계치 않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후자를 취한다면 그 말은 ‘관계치 않아도 되십니까?’ 라는 뜻으로 모든 것을 관계의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옛 문화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것이 ‘관시’ 곧 ‘관계’라고 말합니다. 중동에서도 ‘와스따’ 문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와스따는 중간이라는 뜻으로 중간이 잘 연결되어야 모든 것이 제대로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문화는 단연 관계 중심의 문화를 지향합니다.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마침 유대인 회당에 들어와 예배하는 가난한 이웃을 차별하는 한 케이스를 통해서 바른 인간관계의 교훈을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성경적인 인간관계-어떻게 형성되어야 하겠습니까?

1.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먼저 본문이 시작되는 1절을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본문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할 전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강조합니다. 왜 우리가 이웃을 차별하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인간적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가 정말 우리의 삶의 주인, 생각의 주인이 되어 다스린다면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인간관계의 전제는 먼저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진정 주인 되신 그분의 인도와 그분의 관점으로 인간관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관계의 적용의 가장 좋은 출발점은 아마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In His Steps)를 쓴 촬스 쉘돈의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 회당에는 ‘췌찬’이라는 특별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석에 앉아야 했었던 일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이런 전통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도 승계되어 교회의 장로님들이나 교회에 큰 헌금을 한 사람들의 지정석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가난한 한 평신도가 이런 자리에 앉고자 할 때 당신이 안내 봉사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쉘돈의 질문을 적용하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 같으시면 어떻게 하셨을까?” 옛날 청교도 시대 유명한 청교도 장군 크롬웰 곁에 한 남루한 옷차림의 교인이 앉고자 했을 때, 장군의 경호원이 그를 제지하자 크롬웰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대로 놔두게. 이분이나 나나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이라네” 크롬웰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적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첫 출발점-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성경 최고의 법을 따라 이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성경적 인간관계를 가르치던 야고보는 본문의 절정인 8절에서 주님이 교훈하신 최고의 법을 언급합니다. 8-9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어니와 (9)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정죄하리라” 

이어지는 말씀에서 야고보는 인간 차별의 죄는 살인죄나 간음죄와 마찬가지로 범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비록 살인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간음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차별하고 있다면 그것은 꼭 같이 율법을 깨트린 범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은 최고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우리는 최고의 법을 깨트린 최고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웃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잘 어울리는 사람들, 나와 비숫한 공간에서 비숫한 직업을 갖고 비숫한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인식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웃의 정의는 달랐습니다. 

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누가 네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십니다. 대답이 무엇입니까? 여리고 길에서 상처받고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우리의 이웃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선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도전하십니다. 2절에 보니까 어느 날 회당에 금가락지를 낀 사람이 입장합니다. 여기 금 가락지가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손가락 마다 반지를 하나씩 끼운 사람, 그리고 ‘아름다운 옷’(아름다운/lampros-brightly shining, 번쩍 번쩍 빛나는/아마도 밍크 코트)을 입은 사람이 입장하자 안내자는 그를 제일 좋은 좌석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다음 가난한 자가 입장하자 “자리가 마땅치 않으니 서 계십시오”하던가, 발등상의 말석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고를 4절에서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8절 이하에서 최고의 법을 깨트리는 범죄라고 말합니다. 왜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일까요? 최고의 하나님이 명하신 가장 중요한 최고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의 적용이 교회당 좌석안내로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가장 큰 차별과 고통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예컨대 요즈음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을 조사해 보면 1순위가 전세/월세 대란입니다. 

이런 시대에 이웃 사랑의 실천이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다주택 소유자들이 전 월세를 동결하고 인상 제한 운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부동산 투기(땅과 주택 투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실수요 목적으로만 구입하고 그리고 내 운영 가능한 자금으로 조금씩이라도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구제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 성경 최고의 법을 따라 가난한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심판의 날에 필요한 긍휼로 이웃들을 대해야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두 구절 12-13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도 자랑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마지막 심판의 날-우리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심판에 직면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한 모든 말, 모든 행위가 심판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동료 이웃들에게 쏟아놓은 모든 말, 취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낱낱이 심판된다는 말입니다. 그날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말씀하게 될 까요? 제발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날 심판의 날, 주께 호소할 긍휼을 미리 이 땅에서부터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아니던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로 다가서는 것을 성경은 은혜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는 은혜로 시작하고 은혜로 결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이웃 사랑의 계명은 우리를 속박하는 계명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율법’(12절-자유의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독일 전범들을 잡아 법정에 세우는 일에 헌신해온 한 유대인 지도자가 수많은 유대인 학살의 주동자인 아히히만의 재판에 방청하러 갔습니다. 그는 이 악한 사람이 정죄받고 사형언도를 받는 역사적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낮에는 전범들을 추적하고 밤이면 밤마다 유대인 전범들의 사진을 떠올리며 괴로운 밤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를 향한 불타는 저주와 증오심을 안고 법정의 방청석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눈앞 불과 20m 떨어진 자기 정면에 앉아있는 초라한 노인, 그에게 내려질 언도를 기다리며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한 평범한 노인의 얼굴을 대면한 순간, 그가 그렇게 수많은 자기 동족들을 가스실로 보낸 악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자기와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갑자기 그가 불쌍해 졌습니다. 그의 이성은 그를 정죄하고 저주함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더 깊은 곳에 있는 감성은 그가 의도하지 않은 용서를 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는 그 법정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고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전범들을 그의 꿈속에서 더 이상 만나지 않고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자유인이 되어 살기 시작했다고 증언합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실로 새 인생을 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 인간관계가 새 삶을 선물한 것입니다. 이 선물을 주시는 분, 십자가에서 용서를 가르쳐준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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