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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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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마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 중 “무자비한 종의 비유” 또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용서하는 한계는 세 번입니다. 아모스 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 하였음이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세 번째 죄까지는 용서하시지만, 네 번째 범죄 하면 징벌하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보다는 관대할 수 없으므로,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한 교훈을 받고 살아온 베드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 번만 용서하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노라니 예수님의 말씀은 일반 랍비들의 교훈에 비해, 그 한계가 더 넓고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랍비들의 교훈에 배를 곱하고, 거기에 한 번을 더 보태어, 자신 있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상상을 뛰어넘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어떤 분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얼른 계산부터 하겠지만, 그러나 이는 곱셈으로 답을 구하는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490번이 아니라 4900번이 된다할지라도, 얼마든지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서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용서에 관한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어떠한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인지 함께 상고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1. 우리의 많은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

1)죄와 인간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났으며, 죄 중에 살고 있으며,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제각기 자신들은 매우 선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코 죄인은 아니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영국 에딘바라 대학의 유명한 의학 교수였던 심프슨경은, 수술할 때에 필요한 마취제를 처음으로 발명해 낸 사람입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서 “선생님, 선생님이 발명한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서슴지 않고 “내가 발견한 최대의 것은, 나는 큰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할렐루야! 인간이 참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2)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죄 아래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 주님을 믿기만 하면 그것이 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비록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지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고,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느 영국 사람이 뉴욕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식사시간이 되면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식당에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그는 가진 돈이 없기 때문에 음식을 사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혼자 슬그머니 갑판으로 나와서 싸 가지고 온 비스켓과 치즈를 먹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선장은 식사 시간만 되면 혼자 갑판위에 앉아있는 그에게 “왜 당신은 식사시간만 되면 여기서 비스켓만 잡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선장님, 저에겐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힘없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때에 선장이 하는 말이 “당신이 이 배를 탈 때 사둔 승선비 속에는 이미 식사 대금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 놓고 가서 잡수십시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식당을 이용했고, 겨우 한 끼의 음식을 먹으니 미국에 도착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이미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2.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할 우리의 의무

1)용서는 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에 관한 진리 중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죄를 묵인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묵인하는 것은 죄와 연합하는 것이요, 죄와 함께 하는 협잡입니다. 용서는 결코 죄를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불법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인 용서는 율법과 짝할 수도 없고, 불법을 묵인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용서가 죄에 대한 묵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겠습니까?

2)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탕감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24절에 보면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부채를 지고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는 참으로 엄청난 돈입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인데 1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한 달란트는 노동자 6.000명에게 하루의 노동에 대한 품삯으로 제공되는 돈인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일용직노동자들이 하루 품삯으로 50. 000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일만 달란트는 3조가 되는 돈입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부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방의 1년 세입금의 총액이 300달란트였고, 유대 전국이 로마에 바친 세금이 800달란트였다고 하니, 당시로서 일만 달란트라는 돈은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부채를 안고 있는 이 사람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죄라는 부채가 이처럼 크고 엄청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임금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 종은 도저히 그 엄청난 빚을 갚을 돈이 없었습니다. 임금은 종에게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그의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종은 임금 앞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개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면서 간청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를 보고 임금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를 놓아주며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곧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5백만 원 정도 빚진 동료를 만나 목을 잡고 “당장 내 돈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습니다. 그러자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사람의 간청을 들어 주지 않고,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른 종들이 그가 한 짓이 너무도 괘씸하여 임금에게 가서 모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그 종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고 노발대발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비유이긴 하지만, 3조라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동료의 5백만 원을 탕감해 주지 않고 감옥에 가도록 했다는 것은 정말 인간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자비한 종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들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엄청난 죄를 용서받고도,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용서를 받은 만큼, 다른 이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엡 4: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대가 없이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다른 이들의 허물을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3. 용서의 방법

1)마음의 용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그렇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속마음을 숨기고 용서하는 척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런 식의 용서를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속 중심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용서를 베풀면, 주님께서도 우리들에게 그런 용서를 하여 주실 것입니다.

2)사랑의 행위

우리가 마음속으로부터 용서를 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그를 진정으로 용서하는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적인 노력이나 의지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전 문교부 장관 오천석씨가 쓴 ‘노란 손수건’이라는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풀로리다주에서도 이름 높은 포트 로더데일이라는 해변으로 가는 버스에는 여러 쌍의 젊은이들이 흥겹게 조잘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 안에는 젊은이들이 무안할 만큼 입술을 굳게 다물고,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는 허술한 옷차림의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일행 중 대담한 여성이 그에게 접근하여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마침내 입을 연 사내의 이름은 빙고였고, 지난 4년 동안 뉴욕의 형무소에서 보내다가 이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젊은 여성이 몹시 안 되었다는 듯 쯧쯧 하고 혀를 차면서 “결혼은 하셨던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내는 “잘 모르겠소!!” 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인이 놀라는 표정으로 “잘 모르다니요?” 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내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형무소에 있는 동안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소. 내가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할 형편인 만큼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든지, 아이들이 자꾸 아버지를 찾는다든지, 혹은 혼자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생이 된다면, 나를 잊어달라고 했소.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재혼을 해도 좋다고 말이오. 그 여자는 훌륭한 여인이오. 나를 그냥 잊어버려 달라고 썼소. 편지를 안 해도 좋다고 말이오. 그 뒤로 아내는 편지를 하지 않았소. 3년 반 동안이나.....”.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란 말이죠?” 그는 얼굴을 붉히며 “그렇소!”라고 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 갔습니다. “사실은 지난주일 가석방 결정이 확실해지자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소. 우리가 사는 마을 어귀에는 커다란 참나무가 한 그루가 있소. 나는 편지에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붙들어 매어 두라고 말했소. 노란 손수건이 참나무에 걸려 있으면 내가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갈 것이라고 말이오. 그러나 만일 재혼을 했거나 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고, 나도 잊겠다고 썼소.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 버릴 작정이오.”

사내의 이야기는 마침내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버스 안은 흥분과 긴장감 호기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한 마을과의 거리는 20마일에서 15마일로 다시 10마일로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물을 끼얹은 듯한 버스 안의 정적은 한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별안간 젊은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치며 춤을 추듯 뛰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침묵을 지킨 사람은 오로지 빙고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멍하니 넋 잃은 사람처럼 차창 밖 멀리 보이는 참나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그 참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20개 30개 아니 수백 개가 바람 속에 환영의 깃발로 마구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동안, 전과자 빙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앞문 쪽을 걸어 나갔습니다. 그는 아내의 용서를 받고 틀림없이 재생했을 것입니다.

용서는 이처럼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죄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으며 좌절감 속에 빠져, 아예 생명을 포기케 하는 무형의 살인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사람을 살립니다. 용서는 죄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어둠 속에 빛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었듯이, 우리의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생명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살리는 일입니다. 용서가 없는 마음에는 미움만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랑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랑이 없는 마음은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듯한, 절박한 고독과 죽음만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는 이 모든 것을 뒤바꿔 놓습니다. 사랑에 기쁨이 충만하듯이, 용서는 자신의 마음을 환한 빛으로 가득 차게 하며, 싱싱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고, 고독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그리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4.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동료의 적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던 무자비한 종에게 엄한 형벌을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무자비한 종은 결국 옥졸에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악한 종은 사실상 평생 옥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일만 달란트란 엄청난 돈은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거액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남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이요 당부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인지상정으로는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용서해야만 합니다.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귀한 용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올무에 스스로 얽매어, 인간에게도 하나님께도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983년 조지아 주 클레이턴 카운티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피고는 캘빈 존슨이라고 하는 흑인 남자였습니다. 백인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죄로 기소를 당했습니다. 미국 재판에는 배심원 제도가 있어서 배심원들의 평결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날도 배심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전부 백인이었습니다. 한 40분 정도 서로 의논을 하더니 기소된 흑인 남자가 진범이라고 단정을 했습니다. 흑인 여자 네 사람이 찾아와서 피고의 알리바이를 제시했는데도, 배심원들은 묵살해 버렸습니다. 

재판관은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캘빈 존슨은 그 앞에서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증인입니다. 나는 잘못 기소되었습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감옥에서 나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벗겨 주시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날마다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으로 갔습니다.

그 후 16년이 지난 1999년 6월, 캘빈 존슨은 다시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를 무죄 석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전자(DNA) 검사 결과 진범이 아니라는 것이 16년 만에 밝혀졌습니다. 판사는 그를 석방시켰습니다. 그 시간 그는 손에 조그마한 신약 성경을 꼭 쥐고 서 있었습니다. 무죄 석방이라는 판사의 말을 듣고 묵묵히 재판정을 나오고 있었는데, 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를 붙들고 정신없이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존슨 씨, 당신을 16년간이나 감옥에 집어넣어 썩게 만든 그 판사와 배심원들을 증오하지 않습니까? 보복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순이 많은 미국의 사법 제도에 대해서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없습니까?” 그때 존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타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내 마음에 담고 있으면, 그것이 나를 죽입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 증오를 담고 있고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남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을 죽이는 동시에 자기도 죽이는 것입니다. 존슨은 성경을 읽으면서, 형제를 향하여 노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6년 ‘지스로우 가들로스키’는 그 일행과 함께 독일의 어느 외딴 농가에서 한 가족 10명을 총으로 쏘고 약탈했습니다. 그 중 아홉 명은 죽고 가장인 ‘하멜만’씨 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들로스키’는 20년간의 복역을 끝냈지만, 그가 갈 곳이 없자 당국은 그를 석방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멜만’ 씨는 자신을 후견인으로 하여, 일가족을 살해한 흉악범 ‘가들로스키’를 풀어 줄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습니다. 다음은 그 청구서의 일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머리털보다 더 많은 저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제가 어찌 그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와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비록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꺼이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너 선한 마음 가진 자 남 용서하며 살아라.”는 찬송가처럼, 용서하며 용서받으며 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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