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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을 당하거든! (약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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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당하거든!  (약 1:2-8)
 

1. 우리를 흔드는 것들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이 평온하고 잔잔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항상 그러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아도, 그래도 그런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우리 삶은 여러 가지로 인하여 흔들립니다. 

자신의 호를 “다솜”이라고 하신 분은 “나를 흔드는 것은”이라는 글에서 “비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퍼붓는 날,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는 날, 운무가 산 어귀에 마실 내려온 날, 바람이 놀자며 귓불 간지럽히는 날이 나를 흔드는 것이 아니다. 나를 흔드는 것은 식지 않은 욕망과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자존심”이라고 했습니다. 작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에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말하기를 정작 자신을 가장 많이 흔드는 것은 “식지 않은 욕망”이고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자존심”이라고 합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사람의 말 한마디가 우리를 흔들고,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인생을 흔들며, 어떤 사람에게는 갑작스런 질병이 그 인생과 가정을 흔들고,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문제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 그 인생을 흔드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미움이 인생을 흔들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꿈과 소망이 그를 흔들고, 어떤 사람은 낙심과 절망으로 인하여 그 인생이 흔들립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생을 흔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인생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2. 야고보,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야고보가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낸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야고보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요? 유대인들의 모습이 과거 자신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여러 군데를 보면, 야고보를 비롯한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는 것(요7:1~5)과,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님을 귀신 들렸거나 혹은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이라고 여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형이 하나님이라니? 에이, 어릴 때부터 나랑 같이 자라온 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어?’ 그런데 이렇던 야고보가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사도행전 1장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무리들 가운데 있었고, 그 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사도들을 대신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과 주님의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 선교와 주로 이방 지역 교회 사역자들을 대표하는 바울,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목회하면서 행정적인 대표자로 자리를 잡은 야고보로 삼각 편대와 같은 리더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치의 야고보가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적은 이유는 바로 이 ‘同病常鱗’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자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기 어려웠던 것처럼, 예수님의 同胞인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런 배경으로 기록된 야고보서의 주제는 “성숙”입니다. 왜 야고보서의 주제가 “성숙”일까요? 야고보가 바라본 ‘성숙’은 한 마디로 믿음과 생활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즉 말과 행동이 같아지는 것이죠. 야고보가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쓴 이유는 당시 유대인 신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기 전에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경건한 척, 의로운 척, 말씀대로 살아가는 척하는 것이 몸에 벤 사람들이었지요.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이런 특징을 버렸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행동보다 입이 먼저였고, 행동 없이 말만 있는 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들의 믿음이 “귀신들의 믿음”이라고 하면서, ‘귀신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에게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았고 도리어 훼방했다’고 책망하면서, 입술로만 믿는 신앙,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신앙은 ‘귀신의 믿음’과 같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주님과 복음과 교회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믿음과 삶이 일치하는 것,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유대인 신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성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이러한 주제를 가진 편지를 시작하자마자 곧 바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2).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지역, 즉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등지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편지의 시작에서 밝히는 대로 현재 그들은 “시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험은 어떤 것일까요? 

이 편지는 주후 62년 이후 네로 황제의 기독교회에 대한 핍박이 본격화되기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로마 정부로부터의 핍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적인 핍박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는데, 그 이유는 이미 주전 44년 경에 사도 야고보가 순교 당했기에 외부로부터의 핍박이 전혀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런 외적인 환난이 야보고가 말하는 “시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본문이 말하는 시험은 어떤 것일까요? 2절, “여러 가지 시험”, 3절 “믿음의 시련”,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13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등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험은 일상적이고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시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육신을 입고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만나게 되는 인생의 여러 가지 시험, 인생의 무거운 짐, 실패와 좌절, 갑작스런 사고와 질병, 자녀들의 문제와 사업의 문제,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의 얽히고 설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일들, 그리고 그것에서 오는 아픔과 미움과 갈등과 좌절 등을 말하며,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시대와 환경을 불문하고 모든 성도들이 당하는 바로 그 시험을 말합니다. 

이 시험에서 예외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보기에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고, 또 남 보기에 복 받은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고통과 질병과 걱정이 면제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과거에 혹독한 시련 가운데 있었거나, 지금 시련 가운데 있거나, 혹은 장차 시련 가운데 있게 된다는, 일종의 “시험 혹 시련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 이 시험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 비록 하나의 법칙 같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는 시련이 없거나, 설사 시련이 오더라도 정도가 덜한 것이거나,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다른 것에 매이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하고 그러면서 가정과 직장에 더 충실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것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또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시험은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라는 것이, 아무리 일상적이고 누구나 겪는 것이라 해도 당장 그 시험을 만난 사람에게는 정말 큰 시련이고 삶의 위태로운 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성도가 시험 혹 시련을 당하는가?” “하나님은 왜 성도가 시험 가운데 빠지도록 버려두는가?” 

우리처럼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 신자들에게 야고보서는 성도들이 환난과 시험을 당하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➀ 첫째, ‘인생의 환난과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욥이나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이나 시련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약1:13).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편안하게 잘 살만한데, 가족들과 더불어 재미있게 살아가는데, 갑자기 시험이 닥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치명적인 질병을 선고받습니다. 사고를 당합니다. 잘 되던 사업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직장에서 밀려납니다. 믿고 신뢰하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합니다. 때로 자녀들 때문에 시험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관계로 인해서 머리가 복잡해질 때도 있으며,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는 경우도 당하고, 깊은 갈등으로 잠 못 이루는 밤도 생깁니다. 

심지어 때로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모든 상황,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심지어 억울한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13). 그렇지만 하나님이 친히 아무도 시험하시지 않는데, 왜 우리에게는 시험이 있는 것일까요? 성도가 시험을 받는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➁ 야고보서 1장 14절 말씀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시험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즉 시험의 이유가 우리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의 욕심 때문에 옵니다. 그렇다면 ‘욕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욕심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은 반드시 경쟁 상대가 있고,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들보다 나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범죄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는 善惡果를 보고 ‘보암직도 보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끌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혹한 사탄이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부추김으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는 최상이고 가장 이상적인 인류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 첫 범죄와 같이 야고보서는 우리가 시험 당하는 이유는 각자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최초로 사람을 범죄케 만든 바로 그 죄, 즉 욕심의 죄라고 말합니다. 시험은 왜 오는 것입니까? 내 안에 욕심이 있어서 그 욕심이 시험을 불러들입니다. 

시험은 누가 주는 것입니까? 우리 스스로가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끝없는 욕심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정말 자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녀에 대한 욕심 혹은 집착의 표현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명예에 대한 욕심도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도 있습니다. 결국 이런 모든 욕심들이 우리 인생에 불행의 씨가 되는 것이죠. 이와 같이 사람이 시련을 당하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자신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시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시험을 당하기도 하고, 주위 환경 때문에 만나는 시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 전 예수를 믿는 어느 교인이 남의 집에 하인으로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그 하인을 조롱하기를 “나는 예수 믿지 않아도 아무 시험도 없이 잘 만 사는데, 너는 예수를 믿는데도 왜 늘 어려운 시험을 당하느냐? 그럴 바에야 믿지 않는 게 더 낫겠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들은 그 사람은 “주인님, 노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가령 사냥 중에 사슴 두 마리가 있어 화살을 쏘았는데 한 마리는 즉사하고 다른 한 마리는 다리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도망간다면 주인께서는 어느 쪽 사슴을 보고 달려가겠습니까?” “그야 죽은 놈은 내 수중에 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산 놈부터 쫓아가 잡아야지.” “옳습니다. 불신자에게 시험이 없는 것은 영혼이 죽어 마귀의 것이 되어 버렸으므로 내버려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는 마귀가 자기 수하에 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니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라고 지혜롭게 대답을 했습니다. 즉 성도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고 범죄케 하려고 사탄이 주는 시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가 만난 시험이 자신의 죄나 부주의로 인한 것이든지, 다른 사람으로 인한 것이든지, 아님 사탄의 방해공작이든지, 아무튼 시험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험을 만났을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시험을 당한 성도의 자세 

1) 기쁘게 여기라!

먼저 오늘 본문은 성도가 시험을 당하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기쁨”이란 성경 원어로 “카라”입니다. 이 기쁨이라는 단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었던 양이나 잃었던 돈이나 혹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다시 찾았을 때 기뻐하는 그 기쁨을 의미하고, 요한복음 3장 29절에서는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기쁨이요, 그런 신랑을 바라보는 신랑의 친구들의 기쁨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과 요한복음 3장의 기쁨의 공통점은 ‘잔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 21, 23절에서는 ‘잔치, 축하 회식’의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이런 말이 됩니다. ‘시험을 당하거든 잔치를 벌여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여기라”는 말은 ‘시험을 기뻐하는 것’이 마음과 감정과 행동보다 앞선 것이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온전히”라는 말은 “어떤 것이든지” “전적으로”의 의미입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성도가 시험을 만났을 때, 비록 자신의 부족이나 실수로 인한 것이든, 다른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한 것이든, 사탄이 주는 것이든, 때로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시험이든지, 그 모든 상황에 대해 ‘전적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시험이든지 시험을 만나면 우선 기뻐하고 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자신의 실수로 온 시험과 어려움을 기뻐하는 것이 쉽습니까? 다른 사람이 준 것, 미워하는 사람이나 원수, 심지어 사탄이 주는 시험을 기뻐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주님은 그 시험이 무슨 연유로, 혹은 누구로부터 온 것이든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시험을 당했을 때 기뻐하면 어떻게 됩니까? 3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즉 시험을 기뻐하면 그 시험은 “믿음의 시련”이 되는데,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을 더욱 견고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뻐하는 가운데 “인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인내는 ‘견고히 섬, 확고부동, 기대, 기다림’의 뜻인데, 이것은 구약 희생제사와 관련하여 ‘온전하고 흠 없는’이라는 뜻과,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즉 시험을 만났을 때 그 시험을 기뻐하면 온전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미숙하고 부족한 우리가 성숙하게 되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면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만났다고 생각하신 분은 잔치를 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인내하라!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시험에 대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합니다. “인내”란 무슨 뜻입니까? ‘견고히 섬, 확고부동, 기대, 기다림’의 뜻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끝까지 참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어떤 목적이 이룰 때까지 참고 또 참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리고 “이루라”는 말은 ‘가지라’는 뜻입니다. ‘인내를 소유하라’는 말인데, 여기에도 “온전히”라는 말이 붙습니다. 그런데 이 “온전히”는 앞에서 본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의 “온전히”와는 또 다릅니다. 

여기의 “온전히”는 ‘완성된, 완전한’의 뜻입니다. 이것은 구약 희생제사와 관련하여 ‘온전하고 흠 없는 희생 제물’이라는 뜻이며,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온전함’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도가 시험을 만나면 어린 아이들처럼 호들갑을 떨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거나, 혹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믿음의 어른처럼 성숙한 모습으로 그 앞에 서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시험 앞에서 어른이 되라는 것이죠.

그렇게 인내하면 어떻게 됩니까? 4절 하반절,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온전”이란 ‘흠없는, 완전한, 충분한, 최고의, 성숙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결여된 것이 없는, 충분히 자란, 완전히 성장한’의 의미입니다. “구비하여” 역시 ‘모든 부분에서 완전한, 어떤 부분도 결핍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남은 것이 없다, 뒤떨어진 것이 없다, 결핍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의 반복입니다. 인내를 통하여 보다 온전하고 깊은 성숙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으면 성숙해 집니다.

중국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춘추전국 시대 정나라 변방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우산 만드는 법을 익혔는데, 그가 기술을 다 익히자 유래 없는 가뭄으로 인하여 우산을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산 만드는 일을 포기하고 가뭄에 필요한 양수기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양수기 만드는 기술을 익혔는데, 그 기술을 다 익히자 연일 비가 내려 양수기 제작을 포기하고 다시 우산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나라 안에 도적떼가 일어나 군복과 무기가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산 만들기를 때려치우고 무기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무기 만드는 법을 익히자 나라는 전쟁이 없어지고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직도 미숙하고 유치한 인격과 신앙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혹 잘 참지 못해서이지 않을까요? 여러 가지 시험과 일과 관계 속에서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나거든 인내하십시오! 그러면 온전한 성숙의 자리에, 신앙의 어른의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3) 기도하라!

세 번째로 오늘 본문은 성도가 시험을 만나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5). 여기서 “구하라”는 말은 물론 기도하라는 말이지만, 그 뜻이 놀랍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원래 ‘자신의 몫으로 어떤 것을 요구하다’인데, 이 단어가 일반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거래, 계약(마14:7, 막6:24, 막6:25) 혹은 공적인 요구(마27:20, 막15:43, 눅23:23, 행9:2)’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상대가 아래 사람일 경우에 ‘요구하다’는 의미로 쓰였고(눅1:63, 행16:29),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빌려준 물건이나 위탁해 준 것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때 쓰였습니다(눅12:48). 

그런데 이 단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가 ‘불쾌하다’는 어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힐(D. Hill)이라는 학자가 주장했는데요. 그는 이 단어가 “다른 사람이 불쾌하게 느낄 정도로 요구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도가 시험을 만나는 것은, 스스로 자초한 경우, 다른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한 경우, 때로는 사탄의 공격으로 인한 경우 등 다양한데, 그 모든 경우에 다른 누구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인데, 그때 어떻게 기도하라는 말입니까? 정당하게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사람처럼,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때처럼, 상대나 다른 사람이 불쾌하게 느낄 정도로, 그렇게 구해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물론 여러분, 이 의미가 100%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험을 만난 성도가 하나님께 이렇게 구해도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나거든 그 시험에 대해, 그리고 시험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 당당하게 기도하십시오. 시험이 여러분에게 마이너스가 되지 않고 플러스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5. 시험은 복이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가정에 저녁때만 되면 불청객 한 사람이 늘 찾아왔습니다. 남편의 친구인데, 부인 없이 혼자 사는 이 분은 가족들이 저녁상을 치운 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남편과 술상을 벌이다 깊은 밤이 되면 돌아갔습니다. 남편이야 ‘혼자 사는 불쌍한 친구’라며 그와 술 한 잔 하는 것을 내심 즐기는 눈치였지만, 교회 집사님인 부인과 자녀들은 정말 괴로웠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이와 같은 불청객이 있습니다. 청하지 않는데도 어김없이 찾아와서 여러분의 내면과 삶과 가정을 흔들어놓지요. 바로 그것이 시험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정말 “여러 가지 시험”이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여러분이 만난 시험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이 오는가?’하면서 원망해서도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12절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험은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혹 우리가 잘못될 길로 가고 있다면 돌이키게 하며, 죄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시험으로 말미암아 인격과 신앙의 성숙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시험은 여러분을 보다 성숙하게 하고, 더욱 주님을 닮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을 믿음의 어른, 신앙의 장부가 되게 하는 것이 시험이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단서가 붙습니다. 시험을 만났을 때 기뻐하는 사람에게, 시험을 만났을 때 인내하여 참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리고 시험을 만났을 때 다른 누구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중에 시험을 만난 분들이 있다면, 환난 중에 있는 분이 있다면, 가정적으로나 직장 문제로 시험 가운데 있다면,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고, 기뻐하고, 인내하고,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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