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님 알기 :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가? (롬 8:26-28)

첨부 1


제목: 성령님 알기: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가?
본문: 로마서 8:26~28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누구를 볼 때 "참 좋다!"라는 느낌이 드시나요? 저는 "Becoming a Better Christian"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그냥 좋으셨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그냥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요?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 아닐까요? 아니, 그 기쁨을 막 전염시키는 사람이 아닐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삶의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도 있고, 근심이 충만한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성령님'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요한복음 14장에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 즉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님의 인격을 인정할 때,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며 기쁨으로 살 수도 있고, 그분을 근심시키며 살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3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지요. 어떻게 시험을 당하는데, 고난에 참여하는데 즐거워할 수 있나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참 이해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는 것임을 알 때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갑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안디옥 교회(깡통 교회)로 알려진 이동휘 목사님은 이런 표어를 교회에 걸어 놓았다고 하지요. 
"불편하게 삽시다!"

지금은 돌아가신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은 늘 "별세 목회"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분이 목회 초년병 시절 교인 때문에 무척 어려움을 당했답니다. 저 교인만 없으면 될 것 같아서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 교인 좀 딴 교회로 옮겨 주세요, 하나님, 저 교인 좀 빨리 데려가 주시면 안 되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답은 "목회자가 죽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고 하죠.

기독교는 놀라운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 안에서 살아갈 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 기뻐합니다. 뭔가 다른 기준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성령님 안에서 고난 속에서 기뻐하기"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3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오히려 시험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에서 늘 고난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우리가 늘 고난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뜻도 아닙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을 때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힘든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길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저는 길눈이 참 어두운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길을 헤매는 적이 종종 있습니다.

지난 5월 버지니아 만나 교회를 방문했을 때 조금 시간이 남아 공원을 걷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쯤 걸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표지판을 놓치고 길을 걷게 되었는데,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약 10km 정도를 헤매는 동안 비는 쏟아지고 사람도 다니지 않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참 힘든 것은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정표가 없는 방향은 나의 확신과는 참 다르다는 것을 나중에는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공원을 지키는 ranger에의 도움을 받아 나오게 되었고, 지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방향을 알지 못했지만, 그렇게 두려워할 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힘이 들어서 그렇지 계속해서 걸었더라면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 무척 힘들게 했다는 것이지요.
다음 날입니다. 날씨가 무척 좋았고, 이제는 지도를 가지고 그 길을 다시 걷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그리고 힘들지 않게 인도하는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을 따라가는 그런 인생의 지도 말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게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 도전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함께 찾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성경을 가만히 보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역할을 통해 우리가 체험하며 동행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다른 많은 곳에서 성령님에 대하여 설명하지만, 오늘 우리는 본문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26절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이 무엇인가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쁨이 무엇이고,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요?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기도의 소원이 눈으로 보일 때가 아닙니까?

오늘 "Becoming a Better Christian"의 주제가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기뻐하는 크리스천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영어로 "Rejoice always!" 사실 이 말보다 "Be happy always!"라는 말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재미있는 해석을 보았습니다. 'happy'라는 단어가 'happening'이라는 단어와 어원을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행복이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행복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에 따라 행복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죠.

하지만 기뻐하라는 것은 환경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결단과 관계된 것입니다. 어떤 결단이냐면 "성령님이 누구 신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의 인격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분이 성령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분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가 당신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쫓겨났다고 구원을 잃은 것이 아니며, 자식이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망가지는 것이 아니며, 돈을 잃었다고 천국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도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짐 엘리엇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고난을 견디도록 지어졌습니다."
사실은 고난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가 증명되며, 고난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가장 명확하게 경험합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실재하신 성령님, 인격적인 성령님을 경험해 갑니다.

[빛과 먹선 이야기]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고난은 
마음의 문을 요란하게 부수고 들어와
치열하게 내면을 청소해주고
단단하게 신앙을 수리해 준 뒤 조용히 떠나간다.

돌아보면 나에게 유익했기에
고맙다는 인사라도 건네고 싶지만
언젠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져줬기에
다시는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성령님의 역사는 때로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거나, 우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없는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한함이 무한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책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수도사로 있을 당시 1425년 책을 썼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신앙의 후진들을 위해서이지요.

1779년 미국 민요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 만든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전 세계를 돌며 약 2만 명에 가까운 노예를 실어 나르던 노예상인 존 뉴턴은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통해 영향을 받아 깊이 참회하고 45년간 목회자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존 뉴턴의 영향을 받은 윌리엄 윌버포스는 일평생 영국 하원의원 300명과 단신으로 투쟁하여 노예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수 백 년의 역사가운데 일어난 놀라운 사건은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려고 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했단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사슬처럼 얽혀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고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성공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참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시며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말할 수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본문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의 생각을 안다!"라는 것을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상황이 아닌 우리의 마음을 살피면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때, 고난 속에서 기뻐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길을 가기 때문이지요.

상담학 과목 중의 '상담 기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상담 기술 중 ABC가 나와 있습니다. 'A'는 상황을 뜻하는 Action이고 'B'는 believe, 'C'는 consequence입니다.

즉, 상황으로 말미암아 어떤 믿음을 갖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공부를 못하는 부모를 둔 학생을 두고 상담을 해온 분에게 어떤 해결책을 드려야 하나요. 간단합니다. 공부 잘하는 자식으로 바꿔주면 됩니다.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아내에게는 만족스러운 남편으로 바꿔주면 되지요.

사업에 실패해 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실패를 해결할 돈을 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바꿔 줄 능력이 있습니까? 정말 이런 상황을 바꿔주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끊임없이 문제는 다가옵니다.

상담의 기본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성령님은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십니까?"

그러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됩니다.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있습니다. "불공평한 환경을 공평하게 느낄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죠?"가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죠?"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왜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기를 원하실까요? 우리가 그만큼 연약하고 상처받는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셔서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서 심각한 문제는 상처를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곧 잊어버리고 살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아픔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기쁨을 상실합니다.

제가 언젠가 손을 벤 적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레몬을 짜서 넣는데 얼마나 손이 쓰렸는지 모릅니다. 다 같이 음식을 먹는데 저만 고통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관계에서 말씀에서 상처를 입습니다. 그 말은 그분에게 아픈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안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절대로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어,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

그런데 성령님이 뭐라 말씀하십니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너를 위해리기도하고 있어!"

종종 교회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봅니다. 아니, 우리 교회를 찾아온 분 중에 다른 교회를 돌아보고 만나 교회가 좋아서 왔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 완전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완전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교회라고 생각하고 찾아왔다면, 바로 당신 때문에 그 교회는 절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이상적인 교회가 여기다! 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당신 때문에 그 이상도 깨어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와 동행하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님 때문에 우리가 회복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령님의 뜻은 완전하다!

본문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 묻다]라는 책에서 제임스 패커는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착각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후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탄한 길을 걷게 된다고 해도 옳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는 틀림없이 인도하심을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새로운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때로는 고립되고 비난받기도 하며 친구들의 배신을 경험합니다. 온갖 종류의 좌절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요나를 생각하며 그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배를 타고 북쪽 다시스로 갔을 때 폭풍우를 만난 것을 기억하며 "현재 내가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은 요나처럼 길을 잘못 들어서가 아닌지" 자문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새로이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 자신이 인도받은 길을 주의 깊게 검토해 보는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어려움은 언제나 우리의 앞길을 검토해 보라는 부르심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반드시 곁길로 벗어나 있다는 표시는 아닙니다."

시편 34편 19편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심을 받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문제에 대하여 오히려 직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홍해를 가르게 하셨습니다.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를 지나는 순간마다 어려움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하나님의 침묵"이 대화의 방법이었고, "고난의 순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 번이나 밤중에 갈릴리 바다에서 악천후를 만나 고생합니다. 마가복음 4장 37절과 6장 48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기에 있었던 이유가 모두 예수님의 명령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라는 말씀이 있지요.
사도 바울이 인도하심을 따라 여정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가 인도하심을 따라 첫 번째 다다랐던 곳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후에 바울은 또 "성령 안에서 …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심"(행 19:21)합니다. 그리고는 도중에 만난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2-23).
그리고 실제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일이 낭비처럼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낭비가 "거룩한 낭비"이기에 헛되지 않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고난을 받으나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고난이 거룩한 자들이 누리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특권'을 오늘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믿음은 사건 하나하나를 보면서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퍼즐처럼 맞춰 가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퍼즐을 맞춰 본 경험이 있으신 분이 있나요? 퍼즐을 맞춰 가다보면 점점 난이도가 높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한 조각을 들고서는 한숨이 나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합쳐질 때 온전한 그림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퍼즐의 특권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바보처럼 당하는 고난이 특권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참 멋진 말입니다.

"우리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끌어 낸 하나님의 인도는 조만간에 우리를 빛에서 어두움으로 이끌고 갈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길의 일부입니다."

선교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벳이 남편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남편을 죽인 부족에게로 들어간 사건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귀한 남편이, 하나님의 사람이 허무하게 죽을 수 있습니까? 아니요, 허무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또 하나의 빛으로 인도하고 계셨을 뿐입니다. 그 놀라운 사실 앞에 엘리자벳은 슬픔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역을 향해 나아갔고, 하나님은 그의 남편의 죽음을 통해 한 부족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고난이 고통으로 끝나는가? 고난이 성령님 안에서 특권으로 고백되는가? 어쩌면 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묻고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지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인생이 틀어졌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여러분의 인생이 끝난 것입니까? 우리는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고 그분의 권능을 믿습니다. 혹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든지,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고난을 당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도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조이스 마이어가 [단순함이 주는 기쁨]이라는 책에서 참 멋진 말을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든 당신이 화내지 않는다면 사탄은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신뢰하는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 능력입니다. 반대로 사탄의 능력은 당신을 동요케 하고 두렵게 만들어서 당신의 힘을 소진하게 합니다.

어떤 역경을 겪고 있다면, 단순하게 고요한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해 보십시오.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순간을 맞을 때마다 멈춰 서서 ‘지금 사탄이 무엇을 하려 하는가?’하고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을 때 성령은 역사하십니다. 고난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 있다면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고 견딤, 평온함, 쉼과 같은 성경의 단어는 모두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쁨과 평안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극복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나 ‘극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각각의 상황에서 당신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을 깨닫는 것이 크리스천의 기본 단계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다음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긍정적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상황을 넘어 선, 믿음의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고난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과 고린도 후서 1장 6절을 보세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골 1:24).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고후 1:6).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여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방식은 설교나 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고난과 수고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 아펜젤러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 언더우드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조선의 구원과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또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천국을 준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고난이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면 고난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신비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의 신앙 고백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보게 됩니다. 
(김병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