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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우리 주 Jesus Our Lord (롬 4: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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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예수 우리 주’ 입니다. 신약 성경에 600회 이상 불려지고 기록된 이 '주(主,퀴리오스)‘ 라는 칭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에 극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를 자기 손으로 만져 보고야 믿겠다는 도마에게 예수께서 직접 상흔(傷痕)을 내보이시며, ‘만져 보고 믿으라’ 하실 때 도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라고 한 말은 신앙 고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고전2:3)고 했습니다.

 


또한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고 마음으로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고 했습니다(롬10:9). 지적(知的)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인 것을 시인하고 고백하며, 의지적으로 그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을 수락하여 그가 나의 전 생애, 전 소유, 전 행위, 나의 의지와 시간의 절대적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고 헛되이 염불하듯 하는 부름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에 모신 주 -- 이 주(主)라는 말은 한 글자로 요약한 최고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위에는 주님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우리 주.” 이 말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담긴 명칭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이 명칭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主)’라는 호칭은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주님’ 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그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분의 성육신은 차라리 ‘종’의 신분으로의 낮아지심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짐승의 구유에 뉘어서도, 혹심한 가난 속에서도, 그리고 수치와 십자가 죽음 가운데서도 역시 우리의 ‘주님’ 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 우리 주.” 오늘은 이 칭호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생각코자 합니다.

 

 


1. 예수 -- 우리의 주님 되심

 

 

“예수 우리 주” 라는 말 속에는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 되신다는 신앙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드럽고 겸손한 삶은 우리로 하여금 이 칭호를 좋아하게 합니다. 주님의 일생은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온전히 온유하고 겸손한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신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욱 그를 주님으로 부르며 섬기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악 가운데서 허덕이는 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알게 된 사람은 그분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아무 쓸모없는 자들을 위하여 자원하여 갈보리 십자가로 나아가셨다는 것을 믿게 된 사람은 그분을 주님으로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무덤을 깨뜨리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구원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주 예수’ 를 영접함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골 2:6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 가운데서도 ‘주님’ 이 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멤버가 된 것 또한 놀라운 특권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고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멤버된 모든 성도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요 15:5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고 하십니다. 가지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이라 부르는 데 아무런 어색함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붙어 있기만 하면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며, 어떤 어려움도 해결해주십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있습니다. 당시에 전기 분야의 전문가였던 난쟁이 스타인 맥스와 있었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스타인 맥스는 미시간주 디워드 포드에 있는 헨리 포드의 첫 번째 공장에 큰 발전기를 설치했습니다. 어느 날 이 발전기가 고장나서 공장 가동이 중단되게 되었습니다. 많은 전공들과 수리공들을 불렀지만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에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스타인 맥스를 불렀습니다. 그는 도착하자 여기저기를 살핍니다.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일하는 것 같았는데 마침내 스위치를 올리자 그 큰 공장이 가동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헨리 포드는 스타인 맥스로부터 10,000 달러의 임금 청구서를 받게 됩니다. 포드는 대단한 부자였지만 대충 몇 군데 두드려 보고 고친 임금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메모를 붙여서 돌려보냈습니다. 

“이 청구서의 금액은 당신이 몇 시간 모터를 두드리면서 고친 금액에 비해 너무 비싼 것이 아닙니까?” 

 

스타인 맥스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모터를 두드리며 일한 임금이 10달러,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를 알아낸 것이 9,990달러, 합계 일 만 달러!” 


물론 포드는 그 금액을 다 지불했습니다. 인생들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투자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투자해서 해결하려고 해도 어디가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면 그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스타인 맥스가 포드 공장의 고장이 무엇인지 잘 알았듯이, 예수님은 인생의 문제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시고 고치십니다. 

 

 

예수 우리 주! 예수 우리 주!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의 입에서는 ‘주님’ 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2. 우리 -- 하나님에게 의롭다 함을 받음

 

23-24절=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우리’ 는 누구입니까? 본절에 의하면 ‘우리’ 는 ‘하나님에게 의로 여기심을 받을’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순종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이를 의(義, righteousness)로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以信得義, justification by faith)은 신약시대의 새로운 교리가 아닙니다. 이신득의의 진리는 이미 4천년 전 아브라함에게 밝히 보여주신 진리입니다. 오랜 역사적 근거를 가진 교리라는 말입니다. 



롬 4:1-3=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지적(知的)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확실한 행동력을 수반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었고,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도 아들을 얻게 될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100세에 기적적으로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물로 드릴 때,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 중에서 살려주실 것까지도 믿었습니다.

 

히 11:18-19,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수천년 전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일어난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리는 창세기의 모리아산 번제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 22:5절에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에서, 원문에 보면 “우리가 돌아오리라”(나슈바)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린 후 죽은 이삭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다시 함께 돌아올 것을 믿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고 칭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22절).

 

 

성도 여러분! 이 칭의(稱義)는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23-24절).

 

 

여기 ‘우리’ 라고 한 것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들의 주님이심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신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본문 25절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가룟인 유다는 탐심 때문에 자기의 스승을 당국자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리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인하여 내줌이 되셨습니다.

 


예수 우리 주!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이중적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육신적 죽음입니다. 그가 죄 없으신 분이기에 더 큰 고통을 감내하셔야 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의 영원한 죽음의 고통, 지옥의 고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통은 적어도 역사상 구원받을 모든 성도들의 고통을 합친 것이었습니다.

 



이 고통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서릿발 같아서 자신의 독자라도 희생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의 속죄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신 것은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증거입니다.

 

부활은 성경의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너무나 생생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에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자연법칙 속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원리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것을 보십시오. 겨우내 앙상한 가지들이 봄이 되어 다시 파릇파릇 싹을 내는 것은 부활의 법칙이 분명히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 우리 주.” 여기 ‘우리’ 는 내어줌과 부활을 송두리째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믿음을 생활로 나타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들을 하나님은 ‘의롭다’ 고 칭해 주십니다.

 





3. 우리 --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과거에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입니다. 원수라는 말이 얼마나 굉장한 말인가는 세상살이에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서로 다투는 사이라거나, 서로 미워하는 사이 정도가 아닙니다.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우리 주’ 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과 화평스런 관계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성도 여러분! 이 화평은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한 사람에게는 내적인 깊은 평안을 주십니다. 이 평안은 예수님의 평안이며(요14:27),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절대적인 것이어서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지각에 뛰어난 것입니다(빌4:7). 이 평화는 노한 파도가 부딪쳐 깨지고 천둥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절벽위에 어미 새 날개 밑에서 조잘거리는 새끼 새의 평안 같은 것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화해요 화평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니 이후로부터 성경의 관심은 하나님과 인간사이가 다시금 화목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그 처음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경은 하나님을 등지고 불화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과 그들을 찾아오셔서 화목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위대한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바로 하나님과의 화해, 거기서 비롯되는 인간과의 화해를 방해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갈등이란 대부분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신앙적인 욕망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저버리고 죄 가운데서 자기의 즐거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육신적인 욕망과의 다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잃었던 화목을 완전히 회복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용서와 화목의 삶을 이어가도록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진노를 사랑으로 바꾸셨고,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반항과 미움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자기사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처럼 미움과 용서의 문제는 성경을 관통해 흐르고 있는 커다란 물줄기 입니다. 그리고 그 물줄기는 사랑이라는 바다로 통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자는 기도하는 일에 자유롭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섬김의 은사를 나타내게 됩니다. 진리를 발견하는 일에 예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인간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화평하지 않고는 서로 간에 아름다운 사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고 내적으로 깊은 하나님의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자기 속에서 내란이 끝났음으로 모든 이웃과 더불어 싸움이 있는 곳에 화평을 심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천년왕국에서 사자가 풀을 뜯어먹고 아기가 독사와 장난하는 우주적 평화 시대의 시민으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은혜생활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전제로 합니다. 화평치 않고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우리 주! 오직 감사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 ‘우리’ 라는 말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1인칭입니다. 2인칭 ‘당신들’ 이나 3인칭 ‘그 사람들’ 이 아닙니다.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의 주님이십니다. 여기에는 ‘나’ 를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 의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매우 큰 특권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하나님에게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산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벌벌 떨며 모세에게 소리쳤습니다: “모세여, 당신의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우리로 망하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님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 모든 신자는 단수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예수님’

 


주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찬송가 315장에는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라고 했습니다. 찬송가 288장을 보십시오.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은 저의 간증이요, 여러분의 간증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종일토록 부를 찬송입니다.




여러분! ‘나의 주’ 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모여 ‘우리’ 를 형성합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현세의 우리 모든 삶에서 나타나고, 마침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예수 우리 주!”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들입니다. 우리에겐 하나님과의 화평과 영원한 소망이 약속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 로 모십시다. 주님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삶을 삽시다. 내 시간, 내 생각, 내 계획, 내 물질 등등,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철저히 순복시킵시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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