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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을 실은 사랑 (막 12: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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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실은 사랑 (막 12:28-31)  

  
어떤 분이 신앙 간증집을 냈습니다. 그 간증집을 읽어보면 두 가지의 수난을 겪었습니다. 하나는 눈물겨운 고난입니다. 마치 욥이 받은 시험들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런 시련 속에서 강한 성령의 함께 하심을 경험했고 치유를 경험했으며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젊은 여성이 냉탕 온탕 왔다 갔다 한 격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시련은 아버지의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너무 유명해서 온갖 스트레스를 다 받았습니다. 

아버지 이름 때문에 얌전한 체 해야 했고 공부도 잘해야 했고 누구에게나 착실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가는 곳 마다 누구 딸이구나 하는 말에 행동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더 큰 스트레스는 아버지가 너무 근엄하고 가부장적이어서 딸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으로만 사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딸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딸이 원하는 사랑은 스킨십도 있는 자상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름대로 사랑을 주었고 그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딸에게는 그 사랑이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딸은 마침내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랑을 찾아 어린나이에 조혼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깊고 뜨겁게 사랑해도 상대에게 전달이 안 되면 소용없습니다. 그때 갈등하게 됩니다. 지난주일 설교에도 사랑도 신앙도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 깊이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또 어떻게 해야 내 피부에 와 닿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오늘 읽은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6장에서도 똑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첨가했다면 자손들에게 이 사랑 법을 가르치라고 강조하신 것뿐입니다. 이 말씀이 후에 이스라엘의 쉐마가됩니다. 자녀교육의 기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 네 가지 단어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기서의 네 단어 즉 마음, 목숨, 뜻, 힘은 모두 인간이 지니는 가장 소중한 인격을 말하는 단어들입니다.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이 인격을 다 동원해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형식적으로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네 단어 바로 앞에 “다” 라는 부사가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다”라는 말은 헬라어 “홀레스”(holes) 라는 말인데 “전 의지적”이라는 뜻입니다. 즉 “혼을 다하여”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흔히 쓰이는 형식적이란 말과 정 반대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사랑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전 의지적인 사랑 그리고 혼을 다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법에는 이 네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냥 생략한 것입니다. 본문의 정신으로 보면 이웃을 사랑할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준 위에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랑의 방법은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을 실어서 사랑하라”는 말 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할 때나 이웃을 사랑할 때나 모두 마음을 실어서 사랑하라는 말이고 그것이 최선의 사랑 법이라는 것입니다. 

마음 실은 사랑 

사랑도 마음이 실린 사랑이 있습니다. 이는 형식적인 사랑의 반대개념 입니다. 무슨 일에 마음이 실리면 뜨겁습니다. 생동감 있고 감동이 있으며 생산적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실리지 않으면 음직임이나 뜨거움이나 감동이 적습니다. 조직도 마음이 실릴 때 잘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조직은 잘 안 움직이는 조직이 있습니다. 복지부동입니다. 모든 조직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활성화되는데 조직원들이 병들면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즉 마음이 실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교회도 늙은 교회나 형식적인 신자들이 많은 교회는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한 말씀도 바로 이 말씀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입구까지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자신은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강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4장에서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들을 말씀하고 5장에서는 십계명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각종 규례와 법도를 기록합니다. 그 규례와 법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6장 4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니 너는 마음을 하다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마음을 실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표가 마음을 실어 살아가는 삶이어야 입니다. 마음이 실리면 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이웃도 사람들도 그런 내 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느낌의 존재입니다. 마음이 실리고 안 실린 것을 금방 압니다. 옛날에 어느 학부형이 아이의 담임선생님을 연초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돈 봉투를 건네면서 “일년치예요” 하고 돌아갔습니다. 아주 황당한 경우입니다. 아무 뜻도 없는 의무적인 선물이었습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으니 여기엔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사랑을 알고 분별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실리면 뜨거운 마음이 전달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은 둘이 앉아만 있어도 좋아합니다. 

말이 없어도 그 뜨거운 마음이 오고 갑니다. 이렇게 마음이 실리면 삶에서 직장에서 사역에서 맡은 일을 할 때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물건 하나를 만들 때도 의지가 있습니다. 이 의자가 하나님이 앉으실 의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소홀히 만들 수 있겠습니까? 고객이 하나님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함부로 고객을 대하겠습니까! 교회 식당봉사를 하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뒤늦게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대부분은 “시간 늦었어요!” 하고 돌려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늦으셨네요, 음식이 식었는데 괜찮겠어요?” 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마음을 실은 헌신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실어서 헌신할 때 그 헌신에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딱 한 가지 있습니다. 프로는 운동할 때 마음과 힘을 모을 줄 압니다. 야구선수는 온몸의 힘을 방망이 끝에 모을 줄 압니다. 축구선수는 발끝에 힘을 모아 걷어찹니다. 권투선수는 주먹 끝에 힘을 실어 앞으로 뻗습니다. 모두 마음과 힘을 실을 줄 아는 지혜가 잇습니다. 그래서 파괴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음식점도 그렇습니다. 온 정성을 맛을 내는데 모읍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마음 실린 영적 생활 

그리스도인이 강한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실어서 하기 때문입니다. 오지로 나가는 선교사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집을 팔아 선교비를 마련하여 선교지로 떠납니다. 누가 시켜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실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의사 부부가 아프리카를 여행했습니다.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한숨을 쉬면서 “저 아이들을 누가 돌볼까”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네가 하라”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일하던 병원 문을 닫고 아프리카로 떠났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힘입니까? 누가 시켜서 병원 문을 닫고 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일에 내 마음이 실렸기 때문이다. 로마의 순교사화를 보면 예배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40여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웅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거기서 항복해야만 나올 수 있습니다. 모두 찬송을 부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뭉클한 감동에 받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한사람이 항복하고 뛰쳐나왔습니다. 그러자 지켜보던 군인 중 하나가 뛰어 들어가 빈자리를 채우고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힘입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거기에 뛰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마음이 실렸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위해서 부모가 아무리 아이들의 공부방 앞을 지키고 있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지키고 있어도 아이가 안에서 딴 짓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실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마음이 실리게 해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실려야합니다. 그래야 저절로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게 됩니다. 음식도 마음이 들어가야 맛이 있습니다. 마음을 실어야 제대로 된 맛이 나옵니다. 음식을 만드는 데 양을 속이고 재료를 속이면 누가 오겠습니까? 마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딴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그곳에 마음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신은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마음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들어간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감격이 나오고 감동이 나오고 명품이 만들어지고 명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작품은 마음이 들어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명작은 마음을 쏟아 그렸기에 작품이 된 것입니다. 명품은 정신과 마음과 혼을 쏟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짝퉁은 마음도 혼도 뜻도 전혀 들어가지 않은 물건입니다. 하나님은 짝퉁 사랑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명품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마음을 실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마음 실린 은사생활 

삶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율적인 삶이고 타율적인 삶입니다. 타율적인 삶은 의지나 생각이나 목적이 없이 누군가의 의지를 그냥 따라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율적인 삶은 내 의지와 의식과 목적이 뚜렷이 들어 있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율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나의 자존감을 높여야 합니다. 나는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 한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부르고 너를 창조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이 나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나는 하나 밖에 없는 특수한 존재로 나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자존감 입니다. 

내 자존감이 없으면 나는 결코 높아지거나 값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때로 자기를 비관하고 비하하는데 그러면 남들이 결코 나를 높여주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비하하고 무시하는데 누가 나를 귀하게 보겠습니까? 내 자존감은 내가 가져야 하고 내가 지켜야 합니다. 그렇기에 내 자존감을 높이려면 반드시 내게 주어진 은사를 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각 시간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시간이 다 되면 우리는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주어진 은사를 빨리 내가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빨리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밤새워 일을 해도 피곤함이 없습니다. 또한 돈이 적게 벌려도 더 없이 행복합니다. 게다가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면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내 은사를 발견하되 빛나는 은사를 발견해야 합니다. 남들과 비슷비슷한 은사라면 빛이 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비슷비슷한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 어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차별화할 만큼 내 은사가 빛이 나야 합니다. 남들이 못하는 분야를 내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그것이 없으면 평범 속에 갇혀 만년 2등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빛나는 은사가 없으면 차별화라도 시도해야 합니다. 출근이라도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할 만큼 제일 먼저 하고 상사의 책상을 정돈하고 동료의 책상이라도 치우고 청소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정돈하고 제일 늦게 퇴근 합니다. 그러면 나는 회사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라는 빛나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은사를 차별화 시키는 삶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은사도 없으면서 회사에 겨우 시간 맞춰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흉내나 내는 삶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짧은 인생을 늘 그렇게 살아가면 늘 2등만 하게 됩니다. “뭘 잘합니까?” 하고 물으면 “다 잘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내게는 은사가 없습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음식점에 가서 “무엇을 잘 합니까”하고 물으면 “다 잘 합니다”하면 그 집은 얼마 안가 문을 닫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스페셜 훼이스(special faith)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도 헌신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동기가 있어야 하고 열정도 있어야 가능합니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이 먼저 일 때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 먼저(God first)”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용기와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십일조도 용기 없는 사람은 절대 못합니다. 주일 출석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배는 적어도 내 삶의 중심이 실려야 할 수 있는 특별한 분야입니다. 

내 신앙의 자존심을 걸지 않으면 바쁜 시대에 매주일 꼬박 나와서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토요일에는 내일 예배를 준비하고 내일 드릴 헌금과 내일 입을 옷과 내일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사전에 시간을 배열하지 않으면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일날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삶, 그 삶이 최고로 행복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 삶이 힘이 실리고 마음이 실린 신앙인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입과 말로서가 아닌 마음을 실어서 즉 전 인격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신명기 6장에서는 이것을 자녀들에게도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어느 교회학교 교사에게 어린 아이가 넷이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분주할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누구보다 제일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기에 매주일 제일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오십니까?” 그랬더니 “간단해요. 저는 전날 애들 옷을 입혀 재우거든요”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신앙생활도 열정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열정이 있는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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