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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사람을 힘입어 (행 13: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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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힘입어 (행 13:13-52) 
 
 
기록된 바울의 설교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밤빌리에의 “버가”에 이르렀을 때, 시중들던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13).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나중에 바울이 마가 요한을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라며 다시 선교여행에 동참시키는 일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여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선 것을 보면(15:37-39), 바울에게는 심각하게 여긴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버가에서 갈라디아 남부 해발 1,100m 고원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까지의 길은 몹시 험난했습니다(14). 하지만 성경은 전도자의 개인적인 어려움들은 생략합니다. 그것은 기록되지 않아도 무방하며, 생략할 수 없는 것은 사도가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회당장의 권고로 즉석에서 행해진 이 설교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서론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합니다(17-2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을 택하셨고, 그분께서 높이셨고, 그분께서 인도하셨고(17), 그분께서 참으셨고(18), 그분께서 멸하신 후에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19), 그분께서 사사를 주셨고(20), 그분께서 왕을 주셨다가(21), 그분께서 폐하셨고, 그분께서 다시 왕을 세우셨습니다(22). 그리고 그분께서 다윗에게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였습니다(23). 그리고 이 사실을 세례 요한이 먼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선포했습니다(24-25).

서론은 좁게 보면 구약성경의 요약이고 넓게 보면 인류 역사의 요약입니다. 역사는 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바람에 따라 바다 물결이 일렁이듯 수많은 민족들이 흥망성쇠하며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지만, 그 속에서 분명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해류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속역사를 진행시키십니다. 우연한 일들에 의해 이리저리 바뀌지 않고, 그분의 영원하신 계획이 “약속하신 대로” 착착 성취되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사의 초점, 언약의 핵심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설교의 본론(26-37)은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구주로 오셨을 때,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은 예수님도 선지자의 말도 알지 못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27). 그런데 이 일로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되었습니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했지만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요청한 사건 역시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었습니다(28-29a).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무지에서 나온 행동조차 당신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 속에 살았지만, 역사가 보여준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끊임없는 반역이었습니다. 그들은 실패하고 또 실패했습니다. 매주 선지자의 말씀을 외우는 독실한 종교인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속사는 도무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구주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죄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면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조차 심판 외에는 기대할 것 없는 반역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인간의 반역까지도 섭리하셔서 당신님의 뜻이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인식을 가진 유대인들이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29b)둔 분을 구주로 영접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신 21:23). 그분의 죽음은 메시아 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조차 무너뜨렸습니다(눅 24:21).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셨고(30), 부활하신 후에 여러 날 동안 증인들에게 보이셨습니다(31). 그래서 전도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그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33a)고 선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 예언구로 받아들였던 구약의 구절들 중에 세 구절은 어떻게 부활이 “조상에게 주신 약속”(32)들을 성취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시편 2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내 아들”로 부르셨는데(33b), 예수님은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롬 1:4). 70인역(LXX) 이사야 55장 3절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34)는 예언은 우리 성경에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언약의 영원한 신실성을 확정한 사건이었습니다. 시편 16편 10절에는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 예언되었습니다(35). 다윗은 썩었으니 다윗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36). 오직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썩음을 당하지 아니”한 예수님이 이 예언의 성취자이지요(37).

결국 성경의 모든 약속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속사의 정점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데 있습니다. 지엽적인 종교 활동에 열심을 내기보다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거룩한 대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르게 인도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후의 구속사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쪽으로 계속 진행되며, 그 나라가 극치에 도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설교의 결론(38-41)은 전도를 받은 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먼저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으나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38-39).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죄 사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끊임없는 죄의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의롭게 될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분의 의로우심을 전가받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분의 나라를 상속받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결론은 삼가는 마음 또한 강조합니다.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41, 합 1:5)는 심판의 말씀도 반드시 성취되어 멸시하는 자들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43b)는 권면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이 설교를 하고 몇 달 후 바울은 이들에게 갈라디아서를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신 의미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와 율법과 약속과 은혜 등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며 항상 은혜 가운데 있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42-52절은 설교의 결과입니다. 다음 안식일에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일 정도로 복음의 핵심을 선포한 설교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44). 그런데 동일한 말씀 앞에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나뉘어졌습니다. 설교가 삶의 처세나 지엽적인 종교 생활을 넘어 진리의 본질과 핵심을 드러낼수록 거부하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의 구별은 선명해집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 칭의(以信稱義)의 진리를 다시 깨닫고 선포했을 때도 똑같은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했습니다(45). 회당이 이방인들로 바글거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의롭게 되려고 고생하며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동안 이방인들은 마음껏 죄를 즐기며 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방인도 유대인과 차별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해 우쭐 할 수 있었던 특권이 사라지자 자존심이 상했고, 오히려 은혜 충만해서 환호하자 시기심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말한 내용을 “변박”할 뿐만 아니라 감정적이 되어 “비방”했습니다.

남들보다 더 은혜를 받을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러한 특권의식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은혜는 ‘자격’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오래했으니 은혜도 더 주셔야 마땅한 것처럼 시기한다면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46)하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면, 13장 13절부터 바나바보다 바울이 주도적인 인물로 부각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그들에게는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고’, ‘누가 리더가 되느냐’하는 서열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들은 그런 일을 진리가 잘 드러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도는 그들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이방인에게로 분명하게 돌아섭니다(47, 사 49:6). 그러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습니다(48a). 본문은 말씀을 대적하고 비방하는 자는 스스로 자처한 것임을 지적하는 동시에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48b)로 표현합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는 책임은 인간에게 있지만,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발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동시에 기록했지요.

격렬한 핍박 속에서 전도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렸습니다(51). 불신의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선언적 행동입니다(마 10:14). 한편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는데(52), 믿음으로 반응한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유대인 성도들과 차별 없는 은혜가 임했음을 보여줍니다(2:4). 주의 말씀의 폭발적 역사와 더불어 핍박 또한 거세었지만, 복음의 전진은 계속되어 “이고니온”으로 이어집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습니다(딤후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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