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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신앙의 패러다임을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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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신앙에서 나눔의 신앙으로

-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장)

한국은 세계에서 민주화와 경제부흥, 교회성장이라는 세 가지 기적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다.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은 가난과 전쟁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훌훌 벗고 경제 대국이라는 한강의 기적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88 서울올림픽을 개최한 지가 어언 20년, 월드컵이 개최된 지가 6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3번째 장로 대통령을 주셨다. 기독교인 엘리트들이 국정에 등용되어 나라의 터가 점차 기독교적인 마인드로 바뀌어 갈 수 있는 여건을 갖는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만큼 하나님이 우리 한국을 축복하신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 성도들이 새벽마다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의 응답이기도 하다.

북한은 부정과 이념을 국가 동력으로 삼았고 6·25 침략으로 한반도를 폐허(廢墟)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여전히 국민을 배곯게 하는 세계 유일의 공산독재의 세습 국가로 잔명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무역대국·산업대국으로 올라섰다. 정치적인 민주화를 이룩하여 이번에도 성공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선거에 의하여 좌파 집권당이 참패하고 국가의 경영권이 우파당으로 바뀐 것이다.

한국은 1950년대, 국민소득 60달러의 최빈국에서 2007년,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정보산업국가로 탈바꿈했다. 발전 경제학의 세계 표준교과서는 대한민국이 걸어온 발자취를 발전의 표준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지하자원이 없고 인구자원만이 있는 한국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힘은 한국의 정치, 경제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나누어 가졌던 ‘긍정의 힘’과 ‘진취적 기상’이었다.

여기에 한국 기독교는 ‘소유’와 ‘성장’의 신앙을 통하여 경제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지난 60년간 한국교회는 “우리도 잘 살아보세”라는 정부의 구호에 맞춰,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며 양적 성장에 전력했다. 해방 이후에 교회는 급성장하였고 가톨릭까지 합한 전 인구의 1/4(1천 2백만명)의 신자수로 늘어났다. 이 시기에는 가난을 몰아내어야 했으므로 기복신앙이 필요했고, 한국동란 이후 잿더미에서 일어서야 했으므로 소유를 중요시하는 신앙도 필요했다.

교회는 양적 전도에 중심을 두었고, 근대화하는 국가 정책에 보조를 맞추며 ‘양적 성장’을 제일의 가치로 추구했다. 그러나 양적 성장과 소유 지향적인 신앙은 후유증을 동반했다. 그것은 ‘교파의 분열’과 ‘전시 효과’, ‘윤리성의 결여’였다. 신앙은 삶과 헌신에서 분리되었고 신앙이 좋다는 것은 항상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눔과 주기보다는 가난과 빈곤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했고, 번영과 성공과 성취만이 기도의 응답이었다. 기복과 소유위주의 신앙이었다.

성장과 싸구려 의인(義認)과 성취가 교회가 추구한 목표였다. 기독교 신앙은 어느새 기복신앙과 동일시됐고 십자가 신앙은 강조되지 않았던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성장이 정체되고, 성장이 가져온 교회의 이기주의성과 비사회성, 비윤리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교회의 분열과 각종 사회적 비리에 교인들이 연루되고, 각종 해외 선교사업의 이벤트성이 노출되자 대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다.

지난 해, 평양 대부흥 백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1907년 부흥을 다시 주소서!’ 라는 범교단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평양 대부흥 성회를 기념하는 부흥집회를 가지며 단합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인위적인 모습으로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부흥이 아니다. 교회가 성령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에 지배당해야 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부흥은 고무풍선에 공기를 불어 넣어 공중에 띄우는 것과 같아서 내실이 없다. 한국사회가 선진화 시대로 나아가며, 교회도 이에 걸맞도록 앞장서 나가야 한다. 얻으려고 하고, 가지려고만 하는 ‘소유 중심의 신앙’에서, 주고 나누는 ‘섬김 중심의 신앙’으로 패러다임이 달라져야 한다. 전자가 ‘기복 신앙’이라면, 후자는 ‘성화 중심의 신앙’이다. 전자가 ‘신앙의 초보’라면 후자는 ‘신앙의 장성한 모습’이며, 전자가 ‘의인에 머문 신앙’이라면, 후자는 이웃을 향하여 열린 ‘장성한 자의 신앙’이다.

말로만 하는 전도가 아니라, 삶을 통하여 그 변화를 보여주는 전도가 필요하다. 대형교회는 소형교회를 도와서 자립할 수 있도록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재벌 기업이 동네의 구멍가게를 흡수하듯이, 대형교회가 작은 교회를 흡수하는 것은 소유의 신앙이지, 나눔의 신앙은 아니다. 더 이상 자본주의의 성장 방식으로 자기 몫을 챙기고, 자기 교회 부흥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나누고, 주며, 서로 협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이같이 성숙한 신앙의 형태를 가질 때 우리 사회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도 신앙적 영적 가치 추구에 있어서 선진화 진입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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