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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동하는 믿음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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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믿음 (약 2:14-26)


복개천 지하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한 달 가까이 계속 이어지고 낯선 사람들이 복개천을 들락거리며 철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출동해서 복개천에 들어가 봤더니 몇 사람이 복개천 지하의 콘크리트를 부수고 철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잡아다가 조사를 해 봤더니 한 달이 넘도록 복개천에서 철근을 빼서 고물상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일에는 철근 도둑들이 쉬었습니다. 경찰이 조사를 해 보았더니 도둑들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었는데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느라고 철근 도둑질을 멈춘 것이었습니다. 1주일 내내 철근 도둑질을 하고 주일에는 성수주일을 한다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신앙과 생활이 이분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교회를 통해 자신들과 다른 차이점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성도와 교회 속에서 자신들과 별 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 사람들이 선한 눈을 가지고 교회를 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6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우리의 생명은 영혼과 육체로 이뤄져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몸에서 영혼이 없다면 그것은 시체입니다. 영혼이 없는 몸을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믿음이 삶속에서 행함으로 보이지를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고 죽은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온전한 믿음은 그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행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거룩하게 드렸다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월요일에 복개천으로 출근해 철근을 도둑질 하는 그 믿음을 어떻게 좋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둑질을 해도 걸리지 않고 많은 것을 도둑질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왜곡된 병든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믿음은 행함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마태복음 7장 21절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은 ‘주여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믿음과 행함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믿음+행함이 아니라 믿음=행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전한 믿음의 공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앙의 세 가지 유형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감정을 중심으로 한 믿음입니다. 15-17절 말씀을 보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말씀은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를 보고 감정적으로는 매우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뭘 좀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추운데 옷을 좀 입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자신의 것 중에서 어느 것도 나눠주지 않고 돌아 선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 되게 하려면 감정에만 치우치거나 말로만 하는 신앙고백의 차원을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은 매우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교인들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열심히 모입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처럼 뜨겁게 기도하는 교인들이 없습니다. 새벽기도회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 교회에만 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목요기도회, 금요철야기도, 기도원 특별집회. 거기 모이면 30분 이내로 분위기가 달아오릅니다. 

통성기도가 시작되면 1분 이내로 하늘이 진동하도록 기도합니다. 반면에 사회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사건들에 꼭 기독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모이고, 그렇게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말고, 그 열심과 뜨거움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변화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믿음의 감동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지식을 중심으로 한 믿음입니다. 19, 20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이 한 분인 줄 믿는다고 하는데 귀신은 하나님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기에 부들부들 떤다고 말합니다. 어기에서 ‘떤다’는 말은 사시나무가 바람에 떨 듯이 떤다는 의미입니다. 귀신이 우리 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단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그가 인용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내가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아닙니다. 도리어 더 많이 아는 것이 병이 될 수 있습니다. 차라리 모르면 겸손하기라도 하는데 알고 있기 때문에 가르치려고만 하지 배우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교만해지기만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병중의 중병입니다. 성경 공부를 한다고 이곳저곳에 기웃거립니다. 

이곳에서 이런 은혜를 깨달았고 저런 은혜를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삶의 자리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신앙의 본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아픔이 됩니다.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지식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지식이 많다고 해서 성숙한 신앙인은 아닙니다. 이것이 지식의 신앙의 한계입니다. 귀만 크고, 머리만 큰 기형적인 믿음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느낀 것을, 말씀 안에서 새롭게 깨달은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의 본으로 제시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여리고 성의 라합을 보면 그들은 느끼고 깨달은 바를 행동으로 옮긴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이 말에 머물지 않고 몸으로, 행위로 고백되어져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약방 연쇄점은 '어커드 드럭'입니다. 전국에 1700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주인은 잭 에커드인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기도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의 모든 점포에서 음란 잡지를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지배인들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 섹스 잡지의 판매고가 연간 5백만 달러에 달하는 것이었으나 에커드는 그 일을  단행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약방에서도 음란물 판매 추방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니 돈을 버는 것보다 중요한 것 등이 계속 내 눈에 보입니다. 나는 눈에 보여 주시는 대로 행할 때 기쁨이 충만합니다’ 라고 에커드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과 야고보가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도 행함이 포함된 믿음이고, 야고보가 말한 행함도 믿음을 전제로 하는 행함입니다. 믿음이 없는 인간의 선행은 결국 교만이 되고 자기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결국 위선자를 만들고 그가 믿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 22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여전히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 중에도 온전한 믿음, 산 믿음입니다. 그 온전한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며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가정과 이웃, 직장과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주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행함이 있는 온전한 믿음 위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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